XX 친구
이러나저러나 막무가내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숙박은?”
“아, 그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하하 웃으며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렸을 때랑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그 모습에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데 스마트폰에 진동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강혜린에게 온 보이스톡 전화였다.
[잘 도착했어? 근데 여러 번 연락했던데, 무슨 일이야?]
“어, 그게··· 혹시 나 말고 한 명 더 가도 될까 싶어서.”
[다른 인원? 누구?]
“이전에 내가 언급했던 유학 친구.”
[아하. 그 친구? 그런데 걔는 뉴욕에 산다고 하지 않았어?]
“너랑 친한다고 답장해 줬더니, 곧장 비행기를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러자 상대 쪽에서 한숨을 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좋아. 지금 같이 차에 타고 오고 있는 거야?]
“응. 일단은.”
[이왕에 탔으니까 같이 데리고 와. 그리고··· 숙소는 따로 알아보던가 해야겠네.]
“나도?”
[아니? 너는 상관없지. 왜, 걔랑 같이 잘 수 있게 2인실로 구해줄까?]
“아니야, 아니야. 그러지 마.”
상대는 이쪽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실은··· 아니다. 도착하면 얘기해 줄게.”
지금 얘기해서 더 큰 오해를 만드느니, 직접 마주한 상황에서 설명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뭐야? 실없이. 얼른 와.]
“응.”
연락을 끊은 뒤에, 안전요원에게도 그녀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얘기해 줬다.
그러자 해당 인원은 알겠다면서 곧장 숙소로 이동하겠다며 답해주었고.
그렇게 궁금증도 풀고, 해결해야 됐을 문제도 나름 봉합하게 되자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몰려왔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미 자고도 남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
저절로 눈이 감기며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고로롱
그렇게 차를 타고 이동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옆에 있던 그레이가 내 몸을 흔들며 ‘다 도착했어!’라는 말에, 무거운 눈꺼풀을 뜨며 도착한 지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놓여 있는 저택을 바라봤는데, 떡하니 입이 벌어질 정도로 좋은 곳이었다.
아무리 미국이라는 곳 자체가 땅덩어리도 넓은 데다, 주로 아파트대신 이런 저택을 짓고 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눈앞에 놓인 저택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보다 넓고 화려했다.
‘임시로 대여했다 하더라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다시금 코인을 번 당사자가 강혜린이 아닌지 의심이 치솟았다.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고선, 저택으로 향했는데.
우리가 도착했음을 알았는지 정문 쪽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원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이번에 초청한 당사자인 강혜린이었던 것.
이쪽을 알아보고선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는데, 얼마 안 가 내 옆에 있던 그레이를 보더니 석상이 된 것처럼 몸이 뚝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겠는가.
표정이 흡사 과거 정석만의 스파링 때 그녀의 아버지가 보여준 것처럼, 악귀로 변해서 나에게 일갈을 토하려던 찰나.
강혜린과 마주한 그레이는 자신의 캐리어도 내팽개치며 그녀에게 다가가 격렬한 포옹을 했다.
“팬이에요! 이렇게 직접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I'm a fan! I never thought I would have the chance to meet you in person like this!)
그러자 안겨있는 당사자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 네. 알겠는데, 떨어져 줄래요?” (Um... Yes. Okay, but could you give me some space?)
강혜린이 영어를 매우 잘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약간 버벅거리며 말을 건넸고.
그제야 그레이는 포옹을 풀고선, 평소에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관심 가졌었는지 속사포를 내뱉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몇 문장만 듣더라도 그레이가 진짜 강혜린 선수의 팬인 것은 더할 나위가 없었고, 강혜린은 자신의 ‘팬’을 대하듯이 영업용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다 문득, 그레이가 그녀의 모습을 못 볼 때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조금 있다가 두고 보자’는 식의 으르렁거리는 표정은 그 어떤 더위보다 나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팬과 선수로서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치고 나자, 강혜린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 손으로 앞머리를 뒤쪽으로 넘기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면 숙소 예약을··· 코치님-! 숙소는 취소해야 될 것 같아요··· 네, 그렇게 됐네요.”
그 말에 ‘웬 숙소?’라고 말하자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해 죽겠는 게 조용히 해라.’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코치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는지 이쪽으로 다가왔고, 서로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여성 혼자서 숙박을 하라고 보낼 바엔 그냥 이곳에서 같이 재우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와 그레이는 강혜린이 머물고 있는 저택에 머무르는 것으로 결정됐다.
**
저녁은 꽤 호화로웠는데, 이쪽에서 내가 올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릴에 구운 고기부터 파스타와 피자 등 여러 음식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에 반해서 식단 조절을 하는 강혜린의 경우는 조촐하게 야채와 닭고기 같은 단백질 위주의 음식이었지만.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자신에게 주어진 음식만 묵묵히 먹을 뿐이었다.
그렇게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각자 방 배정을 받아 짐을 풀어서 씻고 나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주인에게 호출당했다.
똑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트레이닝 반바지에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흰 나시티를 입고 있었다.
그렇게 입고 있는 편한 복장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결코 편해 보이지 않은 듯했다.
팔짱을 끼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드러나 보겠다는 듯이 턱끝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지시했고.
나는 저항 없이 움직여서 해당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심문이 시작되려는데.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잠깐만.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그런데 우선은 다른 얘기를 먼저 나누지 않을래? 그 이후엔 네가 이해할 때까지 모든 걸 가감 없이 설명해 줄 테니까.”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 좋아.”
라며 잠시동안의 유예기간을 주었다.
최근에 있었던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여동생이 버튜버였다는 것은 빼놓고 미국으로 오기 전에 집에 들렀다는 이야기도 에둘러서 말했다.
“그런데 이 저택 진짜 좋네. 빌린 거야?”
“응. 이쪽에서 경기한다고 몇 달 동안 대여하기로 했어.”
“얼만데?”
“··· 한 달에 1500 정도.”
“와우.”
잠시 들렸다가 가는 것 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금액을 소비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그 비용에 코치 분이라던지 인건비나, 여러 가지 비용을 합치면 한 달에 들어가는 금액이 한두 푼이 아니겠다?”
뜨끔
강혜린은 살짝 주춤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을 이어갔다.
“그, 봤잖아? 저번에 카톡방에 4억 있는 거 인증한 거. 그걸 쓴 거지.”
“아하.”
하지만 나는 추가로 반격할 수 있는 카드를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네 아버지 체육관을 옮기기로 했는데, 입지도 넓고 좋은 곳으로 옮겼다더라? 혹시 네가 지불한 거야?”
강혜린은 무슨 소리냐는 듯 강한 어조로 답했는데.
“아니이? 얼마 안 보탰는데? 수십 년 동안 체육관 운영하셨으니 바꿀 때도 됐지. 인기 많았잖아?”
“직접 전화해서 여쭤본다?”
당연한 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 아버지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고, 그녀 또한 우리 부모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 그, 이번에 파이팅 머니만 5억이야! 그리고 규정상 말해줄 순 없지만 PPV(시청료) 수당도 짭짤할 거라고!”
“그 돈, 아직 들어오지 않았잖아?”
그녀의 경기에 대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알게 된 정보였다.
경기가 온전히 끝난 이후에 한 달 내로 지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설마 하니 돈을 미리 당겨서 쓰진 않았을 텐데? 네 집안이 빚으로 고생한 걸 아는데, 네 성격상 그걸 용납할리가···”
그러자 강혜린은 양손으로 자신의 귀를 닫고 여는 것을 반복하면서 이와 같이 외쳤다.
“아아아-! 안 들려, 안 들려!!”
그 모습에 나는 눈을 반쯤 감으며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코인을 투자해서 돈을 벌었다는 것을 확인하더라도, 그걸로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걸 믿고 안 믿고는 본인의 선택이었고, 그 책임도 오롯이 본인에게 있으니까.
반대로 그녀가 돈을 잃었다고 해서, 내가 책임을 질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런 상황에 닥쳤다면 이런 저택보다는 좀 더 허름한 곳에서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궁금한 점이 하나 존재했다.
어째서 그녀는 내 말을 근거로 무모할 정도의 도박수를 감행했냐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와 메신저를 통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할지라도, 코인에 관한 얘기는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동기 모임에서는 내가 아니라 정석만이 본인의 돈 자랑질을 하면서 주목을 받지 않았던가.
그것 자체가 꼴불견인 것과는 별개로, 해당 코인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말은 나름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정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며 ‘아닌데. 왠지 얼마 못 가서 고꾸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라고 흘러가듯이 말했을 뿐이었다.
‘흐음’
만약 내가 한 말이 그녀가 해당 도박수를 감행하게끔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한다면.
혹시 그녀도 내 ‘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침묵인 상태로 지긋이 쳐다보자, 그게 부담스러웠던 탓인지 버럭 소리를 높이는 그녀였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남자여야 할 상대가 왜 여자가 된 건지 이유를 들어야겠어!”
그게, 이 시간에 나를 부른 이유였다.
나는 차를 타고 오면서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간략하게 줄여서 설명해 줬다.
그러면서 내가 그간 그녀를 남자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그러나.
“잠깐만. 너 걔랑 같이 목욕도 했었잖아? 그러면 남녀가 같이 목욕한 건데, 그걸 모를 수가 있다고?”
일부러 해당 얘기는 쏙 빼놓고 말해줬는데, 해당 부분을 언급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건··· 그때 걔는 트렁크 팬티를 입고 들어왔다고. 그것보다, 대체 그 얘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네가 유학 다녀온 뒤에 직접 말해줬으니까 알지! 친한 친구랑 같이 목욕도 했다고 네가 즐겁다는 듯이 말했는데···”
“그니까 어째서 지금까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거냐고.”
“지금 그게 중요해? 너, 걔랑 같이 목욕한 거 둘러대려고 남자라고 얘기한 거야, 혹시?”
나는 기가 차서 대답했다.
“돌아온 직후에 말한 거라면 당시 나이는 만 열한 살이라고.”
“그 정도면 다 알 거 아는 나이 아닌가?”
“말을 말자. 그리고 그땐 너한테 관심도 없었는데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냐.”
그러자 강혜린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입꼬리가 올라가며 말을 이어갔다.
“뭐야. 그러면 지금은 관심이 있다는 뜻?”
그 물음에 대답하기 싫다는 듯,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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