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7화. 키잡의 고수(4)
“그래.”
쿨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대식이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하윤이의 옆에 앉았다.
“안녕? 난 대식…….”
인사를 미처 다 하기도 전에 하윤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강산이가 옮겨간 자리로 갔다. 거기에 앉아있던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나 하윤이가 앉았던 자리로 온다.
“어?”
대식이가 어리둥절해 하다가 따라 일어나려는 타이밍에 선생님이 수업 시작을 알렸다.
“자, 산들 반 친구들. 새로운 친구도 왔으니까 오늘 하루도 씩씩하게 시작해 볼까?”
대식이는 자유 시간이 되자마자 강산이에게 달려갔다.
“야.”
강산이는 삐뚜름하게 대식이를 쳐다봤다.
“왜?”
불끈! 대식이는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차마 주먹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절대 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너희 둘이 무슨 사이야?”
이거 참. 민수를 정리하고 좀 편하나 싶었는데,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나선.
강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딱히 그가 상대할 필요도 없었다.
“넌 뭔데?”
대식이는 자신을 무시하는 강산이에게 화를 내려다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바로 곁에 있던 여자애, 하윤이였다.
“어? 저기, 난 대식이.”
인형 같은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대식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강산이는 그것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좀 무서울 거다.’
하윤이는 이미 예전의 울보가 아니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간 강산이는 하윤이가 울 때마다 진기를 주입해 진정을 시켜주었었다. 그 과정에서 하윤이의 건강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좋아졌었다.
진기를 주입하는 김에 몸속의 노폐물을 태웠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한 가지 효과가 더 있었다.
자신이 지닌 마기가 하윤이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형인 강현의 금강현마공은 그나마 덜 난폭한 마기가 쌓이는 거였다면, 자신의 천마구궁심법에 의한 마기는 천하제일인이 될 정도로 강력한 마기였다.
그런 마기에 2년 간 노출됨으로 인해 하윤이의 성격이 변하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꾸준히, 그것도 몇 년간 진기를 주입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벌어질 지는 그도 몰랐었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괜찮았다.
“누가 이름 물었어? 넌 뭔데 우리 사이를 궁금해 하냐고?”
“그야 네가 좋아서…….”
“난 너 싫거든?”
“뭐?”
“너 재수 없어. 생긴 것도 무식하게 생겨서는. 경고하는데, 강산이 내 거니까 건들면 가만 안 둘 거야. 명심해.”
성격이 변한 하윤이는 독점욕이 강해졌다. 아이들이 강산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괜찮았다. 편했다. 본의 아니게 보모 노릇을 하게 됐던 그를 하윤이가 구해준 셈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 대략 반 년 정도 되어가고 있었다.
강산은 새삼 이혜정을 통해 형의 주변을 관리하도록 만든 일이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되었다.
“가자.”
하윤이가 강산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대식이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상처 입은 짐승의 표정을 지었다.
문대식의 아버지는 복싱 체육관 관장이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기에 젖먹이 때부터 체육관에서 자랐다. 그러다보니 체육관 관원들이 대식이를 많이 아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혼나 본 적도 별로 없었던 대식이었다. 나쁜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었고 오냐오냐 하며 귀하게 자랐었다.
그런 대식이에게 하윤이의 독설은 크게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익! 야! 거기 서!”
화가 잔뜩 난 대식이가 크게 소리치며 두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것을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식이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모든 것이 하윤이의 옆에 있는 강산이 때문으로 보였다.
주먹을 들었다. 이대로 강산이를 때려줄 생각이었다.
“너 때문!”
퍽!
한껏 뒤로 젖힌 주먹을 뻗기도 전에 엄청난 통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쳤다.
대식의 눈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의 하윤이가 보였고, 하윤이의 발이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를 걷어찬 모습이 보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뭐야? 강산이를 때리려 했는데 왜 얘가 나선 거야?
“내거 건들지 말랬지?”
대식이는 뭐라 말도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너무 아팠다.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강산이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한 마디 했다.
“하윤아. 좀 심했어.”
“응? 하지만…….”
“그건 나쁜 어른들한테만 쓰라고 했잖아. 애들이 까불면 정강이 정도만 차라고 했지?”
“아, 응. 앞으로는 그럴게.”
강산이는 하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대식이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꼬리뼈 부위를 탁탁 두드려 주었다.
“이러면 좀 괜찮아 질 거야.”
그러면서 슬쩍 거기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다행이 터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팠지? 앞으론 까불지 마. 사실 나도 가끔은 하윤이가 무서워.”
대식이는 강산이 작게 속삭이는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윤이가 좋아하는 이 남자애가 어쩐지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
보글보글보글
김치찌개가 맛있는 향을 풍기며 끓었다. 엄마는 불을 끄고 냄비를 식탁 위에 올렸다.
“여보. 얼큰하게 끓였으니까 먹고 정신 차려요.”
“음, 냄새만 맡아도 속이 풀리는 거 같네.”
“산이 입학식인데 술을 그렇게 마시면 어떻게 해요?”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 산아, 미안하다. 중요한 일이라서 말이야.”
강산이의 나이도 이제 8살이 되었다. 유치원을 무탈하게 잘 마치고 이제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였다.
“괜찮아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부부는 서로를 마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현이 보다는 덜 그러지만, 형제 아니랄까봐 이따금씩 하는 소리가 애늙은이다.
“현아. 앞으로 동생 잘 챙겨줘야 한다.”
“네, 걱정 마세요. 제가 산이 잘 챙길게요.”
“저도 형 잘 챙길게요.”
“응? 여보, 요 녀석 말하는 거 봐봐.”
아빠가 산이의 머리를 헝클였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밥그릇을 놓으며 식탁에 자리했다.
“뭐 어때요. 그래, 산아. 너도 형 잘 챙겨. 형제끼리는 그래야 하는 거야. 알았지?”
“네!”
두 형제가 동시에 대답을 하자, 그것이 또 좋았는지 부부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구나.’
난 현재가 좋았다. 적당히 어리광을 부리고 적당히 아는 척하며 사랑받는 삶.
형은 5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엄마가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었다. 단지 학습지를 형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을 뿐이고, 학습지를 곧잘 풀자 신이 나셔서 다른 과목의 학습지까지 준 것이었다.
나한테는 같은 방법을 쓰진 않으셨다. 형이 공부하는 걸 보면서 자연스레 분위기에 휩쓸리도록 신경을 쓰셨다.
뭐, 난 다 아는 내용이라 거들떠도 안 봤지만.
어쨌든 형은 이대로 가면 엄친아는 따 놓은 당상이다. 잘생겼지, 공부 잘하지, 내가 심어놓은 무공 덕분에 운동신경도 좋지. 아, 춤은 그래도 못 추더라.
그래서 이제 한동안은 형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중간에 엇나가는 경우가 생길 때만 바로잡으면 될 일이다.
그러니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굳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싫었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
부모님과 함께 학교에 들어섰다.
“산아. 이제부터 네가 다닐 학교야. 좋지?”
한별 초등학교.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라서 시설도 좋았고 주변 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네.”
강산은 가볍게 대답하며 학교를 둘러보았다. 전생의 기억이랑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엄마, 아빠. 전 먼저 교실로 가볼게요. 이따가 입학식에서 봐요.”
“그래. 가보렴. 노래 잘하고.”
“네. 산아. 이따가 보자.”
“응.”
오늘 입학식 때 합창을 한다던가? 그나마 다행이다. 단체 율동 같은 건 아니라서.
“우리도 가자. 강당은 저쪽이다.”
푹신푹신한 인조잔디를 밟으며 강당으로 향했다. 주변으로 많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었다.
“저기 하윤이 아니니? 어쩜,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보겠네. 하윤이 엄마!”
선화의 부름에 모녀가 이쪽을 바라보고 다가왔다.
“하윤이 엄마, 오랜만이에요.”
“네, 강산이 엄마도 잘 지냈어요?”
“호호, 저야 늘 그렇죠.”
“강산이 아빠도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윤이 어머니.”
어른들의 인사가 끝나자 강산이와 하윤이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부모들은 아이들의 인사를 흐뭇하게 받았다. 예쁜 아이들이었고 묘하게 잘 어울렸다.
“일단 강당으로 가시죠.”
강창석의 말에 사람들은 걸음을 옮겼다. 하윤이는 자연스럽게 강산이의 곁에 붙으며 소매를 붙잡았다.
“부군께서는 좀 차도가 있으신지 모르겠네요.”
“많이 좋아졌어요. 요즘에는 조금씩 말문도 트였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하윤이의 아빠는 젊은 나이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나마 산재처리가 되어서 생활에 큰 부담은 없었지만, 다른 집안에 비해 형편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윤이가 고생이 많았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빠를 유독 잘 따르던 아이였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로는 그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대로 둘 수는 없었기에 어려운 형편에도 유치원을 보냈다. 유치원에서도 아이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할까 걱정이 많았었는데, 강산이를 만나고는 부쩍 밝아진 딸이었다.
“강산아. 앞으로도 우리 하윤이 잘 부탁해. 알았지?”
“부탁해요, 선생님.”
하윤이가 커다란 눈망울로 애처롭게 말한다.
“이거 참.”
3반의 담임선생님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반 배정은 무작위로 이루어지고 학교 폭력 같은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라면 변경될 수 없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하윤아, 그만해. 그래도 바로 옆 반이니까 자주 볼 수 있잖니.”
“하지만 강산이랑 떨어지기 싫단 말이에요.”
강산이의 팔을 쥔 손에 힘을 더한다.
“하윤아, 착하지? 하윤이가 이러면 선생님이 곤란해요. 산아, 옆 반이니까 하윤이랑 자주 놀아줄 거지?”
“네. 제가 하윤이 잘 챙기고 할게요.”
“산이 말 들었지?”
“……네.”
하윤이 엄마는 애틋한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같은 학교라서 다행이었다.
이런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치원에서 정이 들어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들은 종종 있어 왔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익숙해지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몸을 낮춰 하윤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윤아. 일단 입학식은 산이랑 같이 해. 대신 다음부턴 이러면 안 된다?”
“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아이였다. 애들이 다 귀엽긴 해도 하윤이 같은 아이는 오랜만에 보는 선생님이었다.
“어머니. 산이 담임선생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죄송해요, 선생님.”
“아니요, 괜찮아요. 애들이 그럴 수도 있죠.”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2반으로 간 산이와 하윤이는 빈자리에 앉았다.
“하윤아, 그럼 입학식 끝나고 보자.”
“네!”
선생님이 3반으로 돌아가자 환하게 웃던 하윤이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산이랑 같이 못 있게 하는 어른은 나쁜 어른인데.”
“하윤아. 선생님은 나쁜 어른 아니야.”
“그래도.”
“원래는 안 되는 건데 이렇게 같이 있게 해주셨잖아. 그런데 나쁜 어른이야?”
“그건 그렇지만.”
“어? 산아, 하윤아!”
뒤늦게 빈자리를 찾아 들어오던 아이가 둘을 보고는 반가워했다.
“대식아, 너도 2반?”
“응. 우리 셋이 같은 반이네? 잘됐다.”
갑자기 주변의 기온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딸꾹.”
하윤이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친 대식이 딸꾹질을 터트렸다.
강산이는 그런 대식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 뭐야? 우리 넷이 같은 반인거야?”
뒤늦게 나타난 민수가 차가운 공기에 액화질소를 뿌려 버렸다.
- 작가의말
즐겁게 읽으셨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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