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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우스K 님의 서재입니다.

크라이 오브 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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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우스K
작품등록일 :
2021.04.05 20:25
최근연재일 :
2021.05.20 21:51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19,418
추천수 :
383
글자수 :
230,487

작성
21.04.06 22:46
조회
950
추천
13
글자
12쪽

[제1장] 300년 만에 깨어나는 자-03

DUMMY

치렁치렁한 옷을 펄럭이며 내 옷자락에 얼굴을 파묻던 그녀는 슬며시 몸을 빼내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흠··· 냄새는 없는 걸로 봐서 다른 여자랑 놀아났던 건 아니군요.”


“그, 그럴 리가 있겠어? 아련(娥孌), 정말 술만 마셨다고. 이래 봬도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인을 부인으로 두고 있는데 어찌 내가 바람을 피울 수가 있겠어.”


여소천이 약한 모습으로 변명을 주워섬기자, 그녀는 꽤 도발적이고 당돌한 모습으로 흘겨보며 말했다.


“그 말 한번 달변이시군요. 좋아요. 이번 한 번은 봐드리지요. 하지만 다음엔 어림없어요!”


“다음부턴 내 조심하지.”


잘못을 비는 내게 눈웃음 짓던 아련은 고개를 돌리더니 매서운 눈길로 진하를 훑었다.


“그리고 도련님!”


날카롭게 새어나온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긴장과 두려움으로 붙잡았다.


결국 진하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굴욕적인 항복의 의사를 표명하고 말았다. 하긴 저런 여인에게 이길 수 있는 사내는 없겠지.


“다, 다음부턴 형수님, 공인된 자리에서만 술자리를 갖겠습니다. 맹세하지요.”


“그 말, 꼭 지키세요!”


그제야 웃는 낯으로 반겨주는 그녀는 화사하게 만개한 꽃처럼 아리따웠다. 나는 물론이고 분노의 화살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진하조차 넋을 잃었다.


“그러면 이만 소녀는 물러가 드리지요. 두 분 말씀 잘 나누세요.”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를 고한 그녀는 손을 흔들고는 긴 옷깃을 나부끼며 멀어져갔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하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꽃이 아니다. 그녀는 한 마리의 나비였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며 그 화려한 자태와 아름다움을 뽐내는······.


“······!”


순간 거센 충격이 나의 의식을, 아니 나의 영혼을 강타해왔다.


이 광경··· 언젠가 본 듯하다. 아니, 분명 보았던 것 같다.


화려한 색채로 물든 옷자락의 흔들림과, 넋을 잃게 하는 화사한 아련의 웃음과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향기. 그리고 멀어지는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모두 낯익었다.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걷어내기 어려운 침묵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아련을 만나고 느꼈던 즐거움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지울 수 없는 어둠이 가득 찬 듯했다.


조금 전 허둥대던 모습과는 달리, 굳어진 얼굴의 진하가 넌지시 말을 건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씻을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며 있었다.


“형님, 아까 말씀드린 사천은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놔두면 더 크게 번질지 모릅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여소천은 깊게 한숨을 쉬고는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그들 각 문파가 스스로 자제할지도 모르니까 맹의 이름으로 적당히 경고문만 보내게나.”


“그것만으로 먹힐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사천에 얽힌 이권이 큰지라 그들도 쉽사리 물러나진 못할 겁니다.”


순간 여소천의 가슴이 차갑게 식어간다. 그것은 마치 냉엄하기 그지없어서 그와 하나가 되어 있는 나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정변화는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고도 사천무림 스스로 자정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


일순 가공할 기세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그야말로 천지를 짓누르는 것. 나름대로 강자라 자부하던 나조차도 느껴보지 못했던 힘이다.


그것이 바로 여소천이란 사내가 천하제일인으로 불리게 된 진면목이었다.


현재 그와 하나가 되어 있는 나는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힘인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그 힘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너무도 익숙했다. 마치 오래도록 잃어버렸던 힘을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희열과 의문, 그리고 고뇌에 휘말린 그 순간, 기세를 거둔 여소천이 낮게 선언했다.


“내가 직접 나서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진하의 염려 가득한 반문에, 여소천은 짧고 낮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기세는 사라졌지만 그 속에서 배어나오는 기백은 이미 천하를 아우르고 있었다.


“내 별호가 바로 만절무신이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나를 천하제일인이라 불러줬지. 이번에야말로 다시 잊지 못하도록 그 진정한 의미를 그들의 뼛속 깊숙이 새겨줄 수밖에.”


“······.”

그 짧은 읊조림을 끝으로 대화는 끝을 맺었다. 두 사람 사이를 잇는 것은 오로지 무거운 침묵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어느새 하나가 되었던 내 몸은 다시 분리되어 바깥에서 여소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나는 누구고,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지금까지 나는 여소천과 하나가 되어 있었는데··· 과연 나는 여소천일까?


그리고 지금 이 광경은 과연 꿈일까? 아니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옛 과거의 기억일까?


그리고 낯설면서도 친숙한 이 기분은, 그리고 그녀의 미소와 동작 하나하나에 가슴이 진탕되는 나의 이 느낌은 무엇인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나는 누구고,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지금까지 나는 여소천과 하나가 되어 있었는데··· 과연 나는 여소천일까?


그리고 지금 이 광경은 과연 꿈일까? 아니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옛 과거의 기억일까?


그리고 낯설면서도 친숙한 이 기분은, 그리고 그녀의 미소와 동작 하나하나에 가슴이 진탕되는 나의 이 느낌은 무엇인가?


“······.”


답변 없는 침묵 속에서 의식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득해지는 심연 속으로 나는 침잠해 들어가 어느새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 * *


“.........”


나는 감겼던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꿈을 꾸고 있던 것일까?


나는 고개를 돌려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풍경이 시야를 채웠다.


그래, 확실하다. 이곳은 분명 잠들기 전에 봤던 그 황량한 벌판이다. 아직도 타다 남은 장작이 불똥을 토해내고 나는 그 옆에 누운 채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진하라는 자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백일몽(白日夢)?


나는 상체를 일으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어둠이 가라앉은 세상에는 은은한 달빛이 요요하게 내리비취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사이 구름에 가렸던 달이 고개를 내민 것이다.


영문 모를 꿈 때문인지 시간 감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자정은 확실히 넘은 듯하다. 시린 달빛과 오밀조밀하게 모인 별빛이 칠흑 같은 밤하늘 중천에 걸려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도 상념에 잠긴 나의 가슴을 감동으로 적시기엔 부족했다.


지금까지 언데드가 꿈을 꾼다는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꿈은 어디까지나 생명을 가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몽환적 파편인 것이다. 이미 미래 그 자체를 빼앗긴 언데드 따위가 꿈을 꿀 이유 따윈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무얼 본 것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것을 두고 아쉽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분명 그 꿈을... 그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


나는 말없이 주먹을 힘껏 거머쥐었다.


그때의 그 시간을 놓치기 싫은 이 짙은 안타까움은 뭐란 말인가? 스스로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의 변화에 미칠 것 같았다. 아직도 아련이라는 여인의 나풀거리는 옷자락과 미소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 모든 것이 거짓이다. 이것은 나의 기억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꿈 따윌 꿀 이유가 없어. 뭔가에 홀렸던 게야. 그래... 분명 그럴 테지.’


그렇게 스스로를 자위하며 억지로 납득시키던 그때,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뇌리에서 폭발했다. 그것은 마치 사방으로 비산하는 것처럼 나의 의식을 뒤흔들었다.


“으윽!”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졌다. 그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언데드인 내가 느낄 정도의 고통이라니!


하지만 고통은 잠깐이었다. 그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경악으로 부르짖고 말았다.


“뭐지, 이 지식들은!?”


생경한 지식들이 머릿속으로 무수히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둑을 허물고 쏟아져 나온 해일과도 같았다.



내공(內功), 대주천(大周天), 단전(丹田), 주화입마(走火入魔), 검명(劍鳴), 검기(劍氣), 검강(劍罡), 강환(罡丸), 어검(御劍), 심검(心劍), 무형검(無形劍), 절정(絶頂), 초절정(超絶頂), 화경(化境), 현경(玄境), 삼재검(三才劍), 육합권(六合拳),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 태극검(太極劍), 양의검(兩意劍), 창궁무애검(蒼穹無涯劍),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태허도룡검(太虛도龍劍), 오행검(五行劍), 칠상권(七傷拳), 사일검(射日劍), 분광십팔수검(分光十八手劍), 삼절검(三節劍), 반야장(般若掌), 백보신권(百步神拳), 태을무형검(太乙無形劍), 제운종(梯雲從), 매종보(梅從步),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 유운보(流雲步).......




내가 알 리 없는 수많은 단어와 의미, 그리고 지식들은 그야말로 거대한 산과도 같았다. 미처 정리할 수 없는 지식에 다시금 심신이 노곤해졌다.


그러나... 심신 따위의 피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야말로 공황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도대체 나는 누구지?”


혼란에 젖은 작은 의문성만이 어둠에 잠긴 황야를 고요히 울리고 있었다.



* * *


막연한 감정에 휩싸인 채 황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 이후로 도저히 마음을 걷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기분전환으로 황야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건만, 심란한 마음은 여전히 꿈틀거린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라니··· 이 얼마나 기가 찬 일인가! 하지만 내 기억 한곳을 차지한 지식들과 꿈에서 느낀 친숙함은 더 이상 나 자신에게 변명할 수 없게 만든다.


가슴 깊은 곳은 말하고 있었다. 그는, 여소천이란 사내는 너 자신이라고.


하지만, 하지만······.


지금 와서 기억에도 없던 그딴 것을 내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가?


“······.”


그때, 거대한 다섯의 거체가 땅속에서 솟구쳐 나왔다.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튀어나온 거대한 전갈형의 몬스터.


그것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내 감정은 일순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자이언트 스콜피언이군.”


이미 느껴지는 기척을 통해 알고 있었던 바였지만, 역시 하라한의 황야의 경계를 넘어서자 바로 나타나는군.


나는 힐끔 시선을 돌리며 검을 빼 들고 대적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카마트에게 지시했다.


“자네가 한번 상대해보게나. 실력 테스트일세.”


“호, 혼자 말씀이십니까?”


“그럼 여기 자네 말고 누가 더 있던가? 그럼 저 조카 녀석도 함께 싸우게 해줄까?”


“아, 아닙니다. 저 혼자 해보겠습니다.”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젓고는 앞으로 냉큼 나서는 카마트.


그래도 자신이 섬기는 소가주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다는 건가. 후, 충성심은 나쁘지 않은데 실력이 못 따라가서 문제지. 나름대로 키워줘야겠지만 지금은 실력을 살펴볼 때군.


“이야야압!”


한차례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검 끝이 푸르게 물든다.


내참, 오러 섀도(Aura Shadow, 검기)는 그렇다 쳐도 이 필요 없는 기합성은 뭔가? 기본이 안 되었어.


레나딘도 그것이 위태롭게 보였던지 내게 슬그머니 물었다.


“괜찮을까요?”


“걱정 마라. 위험하게 되면 내가 나설 테니까.”


물론 나서긴 하겠지만 죽을 정도가 아닌 이상은 나서지 않을 거다. 그러나 굳이 이런 말을 조카 녀석에게 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잠시 후 이어진 결과는 나를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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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4장] 거슬리는 놈은 마음 가는 대로 벤다-01 21.04.12 550 13 11쪽
10 [제3장] 임시 대리가주로 취임하다-03 21.04.09 600 12 14쪽
9 [제3장] 임시 대리가주로 취임하다-02 +1 21.04.09 627 13 12쪽
8 [제3장] 임시 대리가주로 취임하다-01 21.04.08 647 13 13쪽
7 [제2장] 가문의 현실은 암담하다-02 21.04.08 689 13 13쪽
6 [제2장] 가문의 현실은 암담하다-01 21.04.06 796 13 12쪽
5 [제1장] 300년 만에 깨어나는 자-04 21.04.06 904 12 11쪽
» [제1장] 300년 만에 깨어나는 자-03 21.04.06 951 13 12쪽
3 [제1장] 300년 만에 깨어나는 자-02 21.04.05 1,186 15 12쪽
2 [제1장] 300년 만에 깨어나는 자-01 21.04.05 1,520 18 11쪽
1 서장. 21.04.05 1,601 23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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