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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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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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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작성
20.09.0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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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DUMMY

저번처럼 은행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대신 손님이 이쪽으로 오는 쪽을 택했다. 건물 정문 왼쪽에서 기다리던 나나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그녀가 벽면에 기대던 등을 떼고 바로 서자, 이쪽으로 손을 흔들며 오는 여성이 보였다. 은비였다.

이런 방법을 먼저 제안한 건 역시나 진석이었다. 지금까지 계속 이어왔던 방식이 아니라 따로 그녀를 불러내는 길을 생각한 이유는 그가 어제 나나에게 털어놓았던 비밀이었다.


‘네?’


진석에게 그런 반전이 있을 줄은 조금도 짐작하지 않던 터였기에, 나나의 첫 반응은 이러했다. 그러나 진석은 딱히 부끄러워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오히려 시작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는지 이야기의 물꼬를 본격적으로 트게 되었다.


‘은비, 그러니까 제 여자친구 말이에요. 은비가 꽃을 좋아해서 그런 척을 하거나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던 거예요.’

‘아······ 그래도 별로 상관없지 않아요? 어차피 꽃 싫어하는 사람이 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직접 말하셔도 될 것 같은데.’


귀찮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그의 비밀이 크게 놀랍지도 않았던 터라 나나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미안지심 같은 건 느끼지 않았었다.


‘알죠, 아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서요.’

‘부끄러운 감정은 저도 아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으시면 오히려 상대가 더 감동할 거 같은데요?’

‘쉽지가 않아서요.’


나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같은 말만 되뇌는 진석은 대화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힌 듯 보였다.


‘쉽지가 않다니, 무슨 말이에요?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잖아요. 직접 이야기하시는 게 더 좋을 거예요.’


직접 낸 용기가 바닥이 나버린 건지 진석은 말소리를 차츰 줄여나갔고, 나나의 위로로도 불안을 덜어내지 못하였는지 입속말까지 하며 비밀을 밝히는 일이 쉽지 않음을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고백이라 함이 원래 자발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결국은 들켜버리고 마는 것 같은 수치심도 어느 정도 동반한다고 나나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연인 앞에서까지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어려운 고백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비밀은 너무 간단한 것이라고 나나는 다시 생각했다.


‘쉽지가 않아요.’

‘글쎄, 그건 털어놔 봐야······’

‘이게 전부가 아니니까요.’


진석이 나나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처음부터 은비를 속였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욕심이었어요. 사실 그전부터 은비를 좋아하고 있었거든요.’


아까와는 다르게 그는 말을 하면 할수록 부끄러워하고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잡고 있던 지팡이를 놓치는가 싶더니 다시 간신히 낚아채고 안도하기도 하는 모양새는 꽤 우습기도 했었다. 그는 어떠한 사실의 진상을 밝힌다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두서없이 뒤섞는 것에 가깝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기회를 가로챘다고 할까요.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치졸하고 교활했죠.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그렇게라도 안 하면, 영영 저에게는 기회 같은 건 없을 줄 알았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더는 시간을 잡아끌고 싶지 않았던 나나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윽고 바로 침묵이 찾아왔다. 본론, 그러니까 핵심만을 말하기 위해서는 진석에게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회를 가로챘어요.’

‘그러니까 어떤 기회를요?’


마침내 꺼낸 말이라고는, 아까 했던 말의 되풀이였다. 잠자코 넘길 수 없는 나나가 콕 집어 집요하게 캐내려 들었다.


‘고백할 기회. 은비에게 고백할 기회 말이에요. 다리를 잃고 나서 보상 문제로 은행을 들락날락거리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때는 은비도 지금이랑 다른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방문할 때마다 만날 수 있었어요. 어떻게 은비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말하자면 너무 기니까··· 너무 붙잡아두지는 않을게요.’


그 배려를 냉큼 받겠다는 뜻으로 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고백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마는 단계가 찾아왔어요. 아시다시피 몸이 이러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려고 할 때 엿듣고 말았던 거예요.’


진석은 깊은 한숨 뒤로 더 깊게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밖으로 꺼냈다.


‘같은 은행 직원이 건물 밖에서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거든요. 은비를 좋아하는 직원이 곧 고백하려고 한다는 대화였어요. 그리고 거기서 알게 되었죠, 은비가 꽃이나 식물을 아주 좋아한다는 걸.’


그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나나는 그 정도까지면 그래도 꽤 나쁜 비밀은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가졌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러니까 좀 얄미운 짓이기는 하나 굳이 비밀로 하여서, 또 그 비밀을 밝히는 바람에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어느새 눈앞에 가까이 마주하게 된 은비를 향해 나나는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덩달아 상대가 맞인사를 하는 통에 고개를 더 숙인 나나는 꽃다발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어야 했다. 은비는 그것이 분명히 자신에게 온 꽃다발임을 직감했지만, 바로 건네주지 않는 나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괜찮으시면 잠시 같이 걸어도 될까요?”

“네? 시간은 왜?”


공손하게 깍지를 낀 채 배꼽 아래에 두었던 두 손을 풀지 않은 채, 은비가 당황하며 물었다. 당황하는 순간에도 처음 보았던 때처럼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이 꽃다발을 드리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사정이 있어서 꽃다발은 꽃집에서 대신 전해줄 거라는 말은 먼저 듣긴 했지만······ 하실 말씀이 뭐길래 그러세요?”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점잖게 대하며 그 상대를 도리어 경계하는 독특한 어법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기분이 나쁘지 않으려고 내심 노력한 나나였지만, 왠지 꽃을 미끼로 순진무구한 한 사람을 유인해내는 것이 자못 도덕에 저촉되는 수법인 것 같아서 마냥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고객의 연인이 자신에게 느끼는 경계심을 풀기 위해 활짝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사정이라는 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그러거든요.”

“혹시 진석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차분하게 의심하고, 침착하게 대답해오던 은비가 크게 동요하는 것이 나나의 한눈에 보였다. 어제 자신이 감당하기 벅찬 부탁을 하고 간 남자와 이 여자가 같이 있는 장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나에게는 곧 그들이 연인이라는 것을 믿게 되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직접 말씀드리지 못할 거 같아서 저한테 부탁하신 거거든요.”


전부 창명(彰明)하게 설명할 계획이다. 단, 하나만은 은비에게 비밀로 하자고 다짐했다. 나나는 순간 어제 자신이 꺼낸 말을 듣고 마지못해 응하던 진석의 의기소침한 얼굴을 떠올렸다.


‘조건이 하나 있어요.’

‘조건이요?’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이 조건을 꺼낼 때의 황망한 눈빛은 당연히 부탁을 청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제가 전해드리기는 할 텐데요. 그래도 그날 따로 또 말씀하셔야 해요. 어물쩍하게 넘기지 말고요.’


충분히 도도하게 말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나였지만, 그녀의 얼굴을 살피기에 진석은 그녀가 내건 조건을 판단하느라 바쁜 상태였다.


‘왜 대답이 없어요?’

‘알겠어요. 어차피 제 입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전해야 하는 이야기기도 하니까······ 그럼 도와주시는 거죠?’


나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대화가 끝나자 진석은 더 매달려서 귀찮게 하거나 풀지 못한 속내를 마저 풀려고 자신을 붙잡아두지도 않았다. 짧게 인사로 마무리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 그녀는 가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됐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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