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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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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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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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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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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114화

DUMMY

분위기는 조용하게도 면구스러워졌다. 홀로 있는 탓이다. 낯을 들고 책을 대하기에는 먼저 마음이 동요되었고 그다음으로 생각은 마비되었다. 책상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밀어보았으나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자신이 짓누르고 있는 책상이 도리어 꿈쩍도 하지 않는 버팀으로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서 작은 탄식에 몸을 맡긴 도진이 고개를 떨구었다.


‘오늘 백면이 꿈에 나왔는데······ 갑자기 더럽게 왜 그래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감은 눈 아래에 그대로 그려졌다. 그때 자신이 식탁에 함께 앉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 음성만은 경험에 의한 것이었으나 장면은 상상에 의한 것이었다. 이제 정말로 백면은 나도진의 꿈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할 때가 비로소 온 것이다. 처음에는 우연이었을지 모르나, 두 번째 우연은 인연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우연은 필연이다. 도진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홀가분하면서도 다행인 일이 아니지 않냐고 스스로 설득해도 그리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정수리에서부터 내려온 머리를 이마에서 마구 헝클어뜨린 그는 눈망울을 사납게 굴리며 괴로움을 감추었다. 이렇게 얼굴을 파묻는다는 것은 때로 자신의 전부를 숨기는 것이 된다.


“실례합니다.”


누군가가 도진을 불렀다. 자주 듣던 목소리도, 이미 알던 목소리도 아니다. 공허에 시야를 허덕이는 자를 의심의 여지도 없이 낯선 자가 불렀다. 그럴 때 괴로운 자가 느끼는 감정은 일말의 공포였다.


“그 책 말입니다.”


도진이 바짝 고개를 세우며 앞을 바라보자, 중년의 남성 한 명이 도진의 손끝이 닿는 지점 부근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진은 그 방향을 따라 눈치껏 책상을 훑어보았다. 그쪽에는 자신이 오늘 하루 동안 읽으려고 모아온 책들이 층을 이룬 모양새였다. 그 작은 기둥 하나를 두고 이 인분의 시선이 서로를 건너 살폈다.


“혹시 다 읽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액면가로 대충 보아 못해도 조카뻘이 될 듯한 자신에게 경어를 쓰는 웃어른은 자못 젊은이로부터 손쉽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을 마치 대단한 어떤가를 이루어낼 사람처럼 대해 준다면 그러고도 더 내놓을 일이다. 도진도 예외는 아니다.

도진은 지금까지 줄곧 제 앞에 펼쳐둔 책 한 권만을 께지럭거리고 있었기에 남자가 가리킨 책을 다 읽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보여준 상대방의 예의에 모질지 못했던 그는 거짓말을 하고 만다.


“예, 그렇습니다.”

“참 다행이군요.”


중년남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서 중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그럼 제가 그 책을 좀 가져가도 괜찮겠습니까? 이번에 진행 중인 연구의 참고자료로 필요한 문헌이라 이렇게 부탁드리니다.”


남성의 언어는 빈틈없이 정중했고 완벽하게 공손했다.


“이 책 말씀이시죠?”


가장 꼭대기 층에 올려져 있던 책을 도진이 집어 들었다. 양장본의 책 표지는 두꺼운 갈색 판지로 되어 있었다. 그 위로는 『허무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맞습니다.”


남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진으로부터 책을 받아 펼쳤다. 마치 자신이 원하던 것이 맞는지 꼼꼼하게 둘러보는 손길에 도진은 감정가로부터의 평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을 조였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뺏어서 미안합니다. 그럼 이만.”


도진이 무어라 인사를 건넬 새도 없이 남성은 허리를 꾸벅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럼에 도진의 시야에는 자신의 앞에 있던 사람의 뒷모습이 고작이었다. 그 모습을 먼 산처럼 물끄러미 쳐다보니 기시감 같은 것이 그의 기분을 아리송하게 만들어놓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작게 읊조린 도진은 고개를 옆으로 갸울이며 새로운 의문을 가졌다. 남자의 목소리와 얼굴은 분명히 낯모르는 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남자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점이 되기도 전에 방향을 트는 바람에 책장 사이로 사라진 사람을 두고 도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라진 것을 두고 내는 노여움이 아니라 흐릿한 것을 더 잘 보기 위한 노력이었다.


***


“미쳤어요? 보긴 뭘 봐요?”


나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팔을 힘겹게 내리며 따져 물었다.


“나랑 같이 심연도에 돌아가서 천규가 살아나는 걸 보자!”


고조된 목청으로 한껏 힘주어 말한 태강이 들뜬 얼굴로 나나의 옆에 졸졸 붙었다.


“일단은요.” 요리조리 그를 피해 보았지만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소용이 없자 기진맥진한 나나가 멈추어 서며 그런 태강을 마주했다. “심연도에 같이 돌아가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말하는 도중에 검지를 까딱거리면서까지 그녀는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드러냈다.


“왜 말이 안 돼? 우리 모두 결국 심연도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까는 천장을 가렸던 태강이 이제는 바닥까지 자신의 얼굴로 채워놓았다. 시선을 회피해 눈을 아래로 뜬 나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제가 돌아가야 할 곳은 심연도가 아니라 저쪽 세계에 있는 우리 집이거든요?”


위를 올려다보는 태강의 얼굴을 향해 조금의 주저도 없이 나나가 쏘아붙였다.


“백나나 너무해.”


태강이 곧바로 울먹이는 목소리로 눈을 찡그렸다. 불쌍하고 딱한 모양새로 동정심이라도 유발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헛수고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그걸 알았으면 저한테 이런 부탁을 하지 말았어야죠.”

“말했잖아! 네가 제일 한가하니까 부탁하는 거라고.”

“저 지금 하나도 안 한가하다고요!”


대화의 진행이 조금 이상한 길로 틀어지게 되었다.


“너무해. 치사해.”

“네네. 그러시겠죠.”

“나는 널 얼마나 도와줬는데! 이러면 진짜 치사한 거야, 너.”


태강은 허리가 슬슬 아파지던 차에 자세를 고치며 나나를 얄밉게 흘겼다. 씩씩대던 숨은 가라앉았지만 속상하고 서운한 감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도와준 건 도와준 거지만 무리한 부탁만 하니까 그러죠!”


지쳐버린 나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힘겹게 주장했다.


“그리고 애초에 왜 제가 같이 가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병원에서 모든 일을 다 해결할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이제는 또 심연도에 가서 살린다니 뭐니, 결심을 바꾼 사연에 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냅다 데려가려고 하면 순순히 따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언젠가 그리고 누군가 월계에 관해 물어온다면, 이유 따위는 개나 주던 곳이 월계라고 대답하리라 나나는 다짐했다.


“그거야 내가 다 들켜버렸으니까 그러지.”


오히려 더 기운이 빠진 태강이 섭섭함이 묻어나는 말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계획을 포기하든가 다른 계획을 세우든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난 계획을 바꾼 거야.”

“장소만 바뀌었지, 계획을 바꾼 게 아니잖아요.”


나나의 말에 태강은 얼굴 살갗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금껏 감정을 솔직하게 표하던 그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나나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냐, 완전히 바꾼 거야. 전부 바뀌어버린 거라고.”


눈에 칼을 세운 태강이 억척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 극성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서글픈 모습으로.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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