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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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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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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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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DUMMY

분수대 앞의 벤치에 두 명의 머리가 나란히 솟아 있다. 한쪽 다리만을 오그리고 앉은 태강기 기지개하며 기다란 하품을 연이었다. 날은 저물어가는데도 서서히 따뜻해지는 날씨에 기분은 몹시 따분해진다. 그 옆으로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달목은 무릎 위에 엊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제 나름대로의 사색을 하고 있었다. 태강이 그 시간을 곧 방해하고 말았지만.


“고여명은 고향인 동네로 돌아갈 거라 예상했지만 주화까지 없을 줄 몰랐어. 계속 여기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거야 오히려 더 당연하고 더 다행 아닙니까? 원래 주화는 심연도로 돌아왔어야 했던 인물이니 그렇게 아쉬워할 일이 아닙니다.”

“응. 그런데 말이야. 달목.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라 늦은 감이 있긴 한데 고여명은 왠지 좀 불편하지 않아?”

“불편하다니 어떤 면에서 불편하다는 겁니까? 아, 어쩌면 연쇄살인범 고도훈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태강의 저의를 헤아릴 수 없어 달목은 자신의 바르쥔 주먹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태강은 악의는 없었단 듯이 퉁명스럽게 진심을 내비친다.


“그게 아니야. 나야 그쪽으로 별 관심도 없고 고도훈 때문에 싸운 건 내가 아니라 주화랑 야담이잖아. 그렇게 백면 내생한테 편견을 가지면서까지 참견을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냥 고여명은 말이야, 사람이 너무 예의가 바르잖아.”


달목은 태강의 언어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이라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 예의이거늘, 태강이 오히려 자유분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고여명 군을 심연도에서 마주친 때가 다이기에 판단을 내릴 수 없군요.”

“아니, 글쎄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태강은 깍지를 낀 손으로 내 시야를 잠시 가렸다. 화창한 나날이 계속될수록 천일나무는 썩어간다. 이제는 남의 일처럼 여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제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야만 했던 날의 기억을 잊지 말자고 그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나나에게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만, 심연도에 그녀와 함께 돌아온 날의 밤에 태강은 직접 자신의 마음으로 빌어 천규를 잠들게 해야 했다.

그러니 지금의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천일나무가 다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섬뜩한 백면 같아.”


어쨌거나 여명을 볼 때마다 다른 백면의 내생보다 더 어렵게 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교태를 부리며 일을 꾸미는 데에 능했던 백면의 민낯을 보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마 그 일부분이 남아 하나의 인생이 다시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반드시 백면의 좋은 부분만 갈라졌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잖아.”


웬일로 이성적인 의견을 꺼낸 동료에게 짐짓 놀란 달목은 흐음 언짢은 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했다.


“아마도 앞으로 만날 백면의 내생이 그럴 가능성이 있기야 하겠다만, 고여명 군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어째서? 달목은 고작 한 번 봤다고 했잖아.”

“내면에 믿음이 아주 강한 사람이더군요.”


자신이 들은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태강은 양팔을 부비며 얼굴을 찌푸렸다.


“또 믿음 타령이야?”


그때 달목이 쥐었던 주먹을 펴며 자신의 두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며 둘러보았다. 자신이 달목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는 꼼꼼하고 의심스럽게 두 눈을 움직였다.


“믿음은 가장 오래된 마음이니 말입니다. 그 사람의 인품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 사람의 수많은 마음 중에서 믿음을 알아보는 길이 가장 적합합니다.”


태강은 입을 뻐끔거리며 할 말을 찾다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그 믿음이 영원하라는 법은 없잖아.”

“영원 말입니까?”

“응. 인간의 마음은 어차피 다 순간일 뿐이야. 그 순간에는 아무리 진실된 마음일지라도 나중에는 그 마음이 결국 변질되어서는 결국 인간은 마음을 바꿔 먹게 된다니까.”


자신의 일리 있는 설명에 감탄한 태강은 쉽게 말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줄 수도 없는 거잖아. 같은 인간의 말도 늘 다르기 마련이니까. 특히 기적은 더 그래. 오늘은 이걸 바라다가도 내일은 더 좋은 걸 바라는 게 인간이거든. 그래서 평생 하나만을 바라고 산 사람들은 속세에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더라고.”

“태강이 타당한 이야기를 하다니 조금 낯설군요.”


달목이 그의 옆모습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태강이 자신이 알고 있는 태강인지 확인하기 위해 빈틈없이 훑는 듯이.


“그러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옳은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태강의 견해에 전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인간은 영원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설령 영원을 갈망하는 존재라고 할 수는 있어도 마침내 인간은 언제나 순간만을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태강은 삐치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럽게 상대방이 한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원을 살잖아. 아니야, 정말 그런가? 이번에는 아닐지도 모르잖아. 곧 불안감이 그의 등 뒤로 그림자처럼 붙었다.


“달목. 우리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아. 어서 녹수를 찾아야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달려나가지 못해 안달하며 발을 동동 굴렸다. 그의 장단에 맞추기 위해 달목 또한 벤치에서 일어섰다.


“없잖아!”


책장의 가장 위부터 가장 아래까지 있는 모든 책을 뺐다 넣으며 뒤져보았으나 거울은 나오지 않았다. 절규에 가득찬 목소리로 태강이 소리쳤다.


“도서관입니다. 소리를 낮추어야지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달목이 그에게 조용히하라고 일렀으나, 머리를 쥐어뜯고 괴로워하는 태강에게 그 경고가 제대로 들릴 리 없다.


“어떻게 된 일이야? 녹수가 가져갔을까? 그럼 우린 지금 녹수를 놓친 거겠지? 아니면 녹수가 아닌 그냥 인간에게 도둑을 맞은 거면 어떡해?”


질문은 좀처럼 쉬지 않고 달려들었다. 달목은 두 손을 펴며 자신에게 가까워진 태강을 밀어내며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대꾸했다.


“야담이 가져갔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냐, 야담이 그럴 리가 없잖아!”


실로 야담이 거울을 가져간 것이 맞았지만, 애석하게도 태강은 그 점으로부터 의심을 가지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더욱 심적 고통은 거세졌다. 정수리를 책장으로 들이댈 정도로 극심한 번뇌에 사로잡힌 그는 끝내 어깨를 떨구며 기운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떡하지? 이대로 우린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거야?”


마침 이쪽으로 한 10대 여자아이가 다가와 시집 몇 권을 고른 후 저 너머로 사라져갔다. 그때까지 침묵하며 기다리던 태강은 옆얼굴을 책에 갖다 대고는 아이가 가자마자 바로 불쾌한 기분을 드러냈다.


“우리는 매번 인간을 도와주는데, 인간은 우리를 도와주지도 않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희는 성인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게다가 태강이야말로 우리 중에서 제일 자신의 마음대로 일을 꾸미는 자가 아니던가요.”

“그래, 그건 그렇지. 그래도 치사하잖아. 자기들은 속 편하게 저러고 있고.”


달목은 좀처럼 말려들지 않았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언제나 저희의 존재를 이해하려는 자들도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래봤자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 순 없을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건······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그런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저희의 존재도 흥미롭기는 합니다.”

“난 그런 데 전혀 관심 없어.”


얼굴에 자국이라도 날라 자세를 고친 태강이 자신이 베고 있던 책을 괜히 꺼내 폈다. 그 순간에 네모반듯하게 접힌 박지(薄紙) 하나가 바닥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뭐야?”


태강보다 빠르게 허리를 굽어 그것을 집은 달목에게 태강이 물었다.


“책과는 별개의 쪽지 같습니다.”

“뭐야. 그럼 귀찮게 다시 끼워 넣을 필요 없겠네.”


호기심을 잃은 태강의 건성거리는 말투에도 흔들리지 않고 달목은 그 종이를 펴 안에 담긴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난연으로 온 일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허탕이 아니게 되었다고? 거기에 뭐라도 적힌 거야?”


이제야 흥미를 보인 태강이 달목 옆으로 다가가 쪽지를 들여다보며 눈을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백면이 위험. 황호.]


휘날리는 필체는 쪽지를 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음과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쉬이 허락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되었다. 둘은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그 짧은 문장을 반복적으로 읽어야 했다. 게다가 그 끝에 붙은 황호의 이름을 볼 때마다 숨이 멎는 것 같은 긴장감에 현실임을 인지하기 위해서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황호가 쓴 게 맞을까?”


태강이 물었다.


“맞겠지요. 하지만 언제 이것을 쓰고, 언제 이것을 남기고 갔는지가 관건입니다.”

“백면이 위험하다니? 백면은 죽었잖아.”

“어쩌면 백면의 내생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황호가 백면의 내생을 어떻게 알고?”

“그건 지금의 저도 알 수 없군요.”


달목이 쪽지를 원래 접혀 있던 모양으로 돌려놓은 대신에 그것을 다시 책에 넣으려 하지 않고 제 손으로 살며시 감쌌다.


“황호가 난연에 아직 있는 걸까? 그럼 얼른 찾아봐야 하는 거잖아. 쪽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렇지 않을 겁니다.”

“쪽지가 거짓이라고?”


달목은 고개를 딱 한 번, 버젓이 저었다.


“쪽지는 사실이겠지요. 황호가 난연에 아직 있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아마 난연을 떠도 벌써 떴을 겁니다. 이 형편없는 글씨체처럼 급히 말입니다.”


자신들이 더는 이 자리에 머물 수 없음을 감지한 달목이 먼저 돌아서서 복도 가운데로 나왔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휴 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 있는데, 어느덧 10월이 되었다는 사실이더라고요.

바람이 제법 차가워져 밤이 더욱 따뜻하기를 바라는 계절로 완전히 바뀌었네요.

행복하고 따뜻한 가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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