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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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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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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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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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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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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98화

DUMMY

“왜 거기에 서 있어요?”


나나가 진석을 불렀다.


“혹시 저 기다리거나 몰래 지켜보려던 거였어요?”


진석이 등을 돌아 그녀를 바라보기도 전에 나나가 먼저 선수 쳤다. 날래게 길을 죈 나나는 멈추자마자 제 앞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진석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주고받는 시선 끝에 나나의 것은 더욱 통렬해져 갔으며, 진석의 것은 점차 누그러져 갔다.


“그건 아니에요. 기다린 건 맞지만.”

“꽃다발 때문이네요, 그럼.”


자신의 얼굴보다는 그 주변을 더 헤아리는 듯한 애매한 진석의 표정을 읽은 나나가 곧바로 대답했다.


“주고 왔어요. 처음에는 저도 걱정이긴 했는데 결국엔 받으시더라고요.”


두 빈손을 고개까지 으쓱하며 털어 보았으나, 진석의 낯빛이 더 밝아지거나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렇네요.”


방황하는 눈동자를 애써 억누르며 대답해도 변함없었다.


“좋은 거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지팡이를 고쳐 짚은 진석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 발을 바닥에서 떼었다가 붙이며 갈등을 이어갔다. 답답한 마음에 나나는 또렷하고 고조된 언성으로 다시금 물었다.


“좋은 거잖아요, 받아주었으면 해서 그런 거였잖아요. 그런데 반응이 왜 그래요?”

“······그러게요.”


진석은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에 벽에 등을 바짝 갖다 대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선선하다기보다 따사로운 쪽이었으나, 하늘에는 땅의 시간이 흘러가는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량한 색으로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나나가 달을 올려다가 보았던 것은 진석이 이를 언급하던 참이었다.


“달은 여전히 예쁘네요.”

“그건 맞는데,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요? 이상해 보여요.”

“어젯밤에도 이렇게 달을 보면서 생각했거든요.”


진석은 지금의 자세가 불편했는지 금세 벽으로부터 멀어졌다. 바른 자세로 고친 그가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을 엄지로 문질렀다. 불안감을 없애려는 노력은 조용하고도 부산스러웠다.


“차라리 은비가 제 마음을 거부했으면 좋겠다고요.”

“어째서요? 받아주었으면 해서 저한테까지 그런 부탁한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었다면 도대체 왜 이런 상황까지 만든 거예요?”


나나의 목소리는 상당히 불만스러웠고 또 퉁명했다. 진석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노력은 헛수고나 다름없었다. 이를 그냥은 넘길 수 없었다.


“물론 제 욕심을 생각한다면 받아주었으면 좋겠죠. 그런데 막상 비밀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고 보니, 이건 정말 내어도 되는 욕심일지 아닐지 자신이 없어졌거든요. 그렇게 아침이 되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 땐 더 자신이 없어졌어요. 털어버리면 그만일 줄 알았던 비밀이 갑자기······”


진석의 말은 나나의 끼어듦으로 인해서 잘리고 말았다.


“갑자기 현실이 되었다고요?”


나나의 당찬 물음에 고개를 숙이는 쪽은 진석이다.


“그래요. 현실이 되니까 도저히 죄의식 때문에 감당할 수 없더라고요.”


나나는 그의 말끄트머리에 약간의 바람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진석 자신이 온전히 숨길 수는 없었던 자소(自訴)의 자조(自嘲)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를 떠보려는 심산으로 물은 것은 아니었다. 기운이 빠진 얼굴로 고민에 잠긴 나나의 얼굴에는, 앞에 있는 사람을 조롱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는 담기지 않았다. 그저 진석이 한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에 나나는 나름대로 점잖은 오만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노력을 해봐도, 달라지지 않네요.”

“정말로요?”

“······네.”


저답지 않게 말수가 심각히 줄어든 진석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참 이상했다. 원래는 필시 이러나저러나 낯선 사람이어야 할 진석에게서, 그보다 더 낯선 부분을 발견했다는 것이 나나로서는 참 이상한 일이었다.


“비겁하네요.”


그래서 홧김에 화를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건 비겁한 거잖아요. 누굴 위로하거나 도와주는 거 저도 정말 못하고, 그런 데에 책임감 같은 거 전혀 없지만 그건 너무 비겁한 것 같아요, 아니 비겁해요.”


나나로부터 날아드는 말이 비수가 되어도 진석은 고개를 달리 들지는 않았다.


“차라리 어제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저도 이런 좋지 않은 말 같은 거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랬을까요?”


되묻는 진석의 소리에는 전혀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다 잘되기를 바라다가 막상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니까 무서운 거잖아요. 사람이 반드시 항상 솔직할 필요는 없겠지만, 반드시 솔직해야 할 때는 있다고 봐요. 그래서 이렇게 그런 이야기까지 다 터놓고서라도 결혼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전부 다 맞아요.”


맥이 없는 진석의 대답에, 말을 하면 할수록 목이 막히는 듯한 이 기분은 제 탓은 아닐 거라고 나나는 확신했다.


“한 가지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나나는 자신과 진석 사이의 거리를 한 걸음 좁혔다.


“저번에 처음 병원에서 뵈었을 때 있잖아요.”

“병원이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진석이 고개를 들어 나나와 눈을 맞추었다.


“네. 그때 말이에요. 그때 제가 화분 배달하러 갔었잖아요.”

“···그게 왜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 진석이 짐짓 겁먹은 얼굴을 지었다.


“그때 그 일 때문에, 제가 지금 이름도 모르는 화분을 키우고 있거든요. 뭐 고객님 덕분이라면 덕분인 거고, 우연이라면 우연인 거고. 그런 거겠죠? 잠깐,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듣다가 보면 알게 될 테니까 입 열지 말고 이 이야기부터 들어봐요.”


그 탓에 진석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자신의 두 귀를 열어두었다.


“아무튼 그때 제가 거기로 간 건 황당한 우연이었어요. 갑자기 그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도 계획된 거라면 그런 걸 수도 있겠죠. 왜냐하면, 어쨌든 이 꽃집에서 제가 일하려고 했었으니까. 그러다가 보니 그때 처음 배달했던 화분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키우고 있어요. 물은 저보단 다른 애가 더 자주 주는 거 같긴 하다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제가 말하려는 건 말이죠.”


나나가 대뜸 진석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 토닥이는 것이 바로 이 어깨인데, 그건 아마 어깨 위에 있는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털어주겠단 배려 때문이 아닌지 나나는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었는지 계획이었는지는 어떻게 보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김진석 씨가 보기에는 자신이 마치 몹쓸 계략을 꾸미고 곽은비 씨의 인생에 훼방을 놓은 것 같겠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다를 수 있다고요.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사람은 언제나 전부 다 알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결국에는 다 알고도 그 꽃다발을 받아준 게 아닐까요?”


진석의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나나는 진석의 어깨를 조금 강하게 두드렸다. 그는 아직 쉽게 말을 내놓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다짐하고 시작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끝에 가서 새로 다짐해야 마무리가 되는 일도 있는 것 같아요.”


그의 대답은 지금까지 나나의 이야기를 쉬이 긍정하거나 완곡히 부정하지도 않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비겁한 거고요.” 진석이 쓰게 웃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이렇게 열변해주신 것에 감사하지만 죄송하게도, 아직 다짐하지는 못했어요.”


순간 나나의 눈가에 실망감이 맴돌았다.


“그래도 일단은 가야겠죠.”


나나의 뒤로 골목을 바라보는 진석의 시선이, 아까 달을 보고 있던 것과 닮았다는 토막생각이 나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마워요.”

“네?”

“역시 그쪽한테 이야기하길 잘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진석이 고개를 숙인 후 바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자신을 지나쳐 가는 그를 붙들기 위해 나나가 뒤돌아 그를 불러 세웠다.


“무슨 느낌인데요?”

“말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요. 가볼게요!”


다짜고짜 맥락도 없이 들은 것이 칭찬인지 아닌지 나나는 분간이 서질 않았다. 그저 돌아서는 그가 손을 높이 들어 인사하는 꼴에 자신도 엉겁결에 손을 흔들고 말았을 뿐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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