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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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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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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9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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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17화

DUMMY

“말은 많이 하지 않았던 애지만 어쩌면 우리 중에 대담한 사람이 있다면 천규일 거야. 이름 자체도 얼마나 멋진데.”


아까의 ‘동생바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는지 태강은 곧바로 “내 눈에는 내 동생이 최고여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야. 진짜로 멋지거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때문에 도리어 자신이 ‘동생바보’라는 점을 확고히 했음을 태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던 것은 그의 말이 전부 사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천규(天刲). 하늘을 찌른다는 뜻의 이름이야. 멋있지?”


그렇게 나나는 천규의 이름까지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 그에게 어떤 운명을 부여했는지까지 말이다. 이토록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고 누군가를 알게 되었던 적이 이전에 있었던가? 아마 수없이 있었을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사람만 해도 그렇다.

독일까지는 가봤어도 안타깝게도 바로 옆 프랑스에는 얼씬도 해본 적이 없기에 발자취조차 구경한 적이 없는데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폴 세잔이다. 아주 어릴 적에 처음 좋아하게 되었던 화가가 피카소도 고흐도 아닌 데다가 심지어 뭉크와 모네, 마티스와 고갱은 애초에 관심사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좋아하게 된 화풍이 바로 세잔의 것이었을 때 훗날 소년 시절에 나나는 자신에게 실망했었다. 세잔에 대한 평가가 어찌 되었건 그의 그림이 전체적으로 멋스럽지는 않았기에 왜 하필이면 이 사람이 자신이 처음 좋아하는 화가가 되었는지 억울하기도 했더랬다.

그래도 그 이름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다 못해 세잔의 그림까지도 이제는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세잔을 알게 된 방식과 천규를 알게 된 방식은 비슷한 것일까? 나나는 어쩌다가 알게 된 이름을 가지고 이런 모호한 수수께끼를 느끼는 자신이 낯설었다.


“세잔은 어떤 화간데?”


여념도 없이 천규의 이름을 속으로 곱씹어보니 태강이 말을 걸어왔다.


“들었거든. 세잔은 어떤 화간데 그래?”


나나는 잠시나마 태강이 성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자신이 한심하기보다는 태강이 더욱 그런 쪽으로 행동을 일관해와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음··· 제가 좋아하는 화가요?”


그러므로 대답은 얼버무리기로 한다. 솔직하게는 나나 자신이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는 탓이 컸으나 그래도 거짓말을 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 천규도 네가 좋아하는 성인이야?”


태강의 순진무구함은 상황을 가리지 않는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야기가 왜 또 그렇게 흘러가요?”

“그냥. 그러면 참 좋겠다 싶어서.”


투덜거리듯이 이야기하지만, 그는 꽤 본심을 털어놓고 있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직접 만나서 대화해본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없지 않을까요?”

“아냐. 내 생각에 너희 둘은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아.”

“어째서요?”


태강이 잡은 손잡이 위의 빈 부분을 쓸어 만지며 나나가 질문했다.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만약 천규가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말이야.”


우울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티 없이 순진해진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아니면 우울함과 순진함은 동질의 것일까. 나나는 천규를 놓아주러 가는 태강의 걸음에 굴속까지 동행하였다.


“벌써 간다고요?”

“응.”


돌아오는 길에 태강이 전하는 의사는 나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오늘 하루는 더 머물며 꿈에 대해서 의논도 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급하게 이곳을 벗어나려고 하는 태강의 내심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너무 일렀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속세로 떠나려는 정오 무렵에는 달목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뒤따라온 것인지 아니면 마침 이곳으로 오던 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이 더 갑자기 나타나자 나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제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태강도 마찬가지였다. 나나만큼이나 놀라지는 않았어도 어쨌든 그도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인 줄 알고?”


태강이 초영의 말투를 따라 하며 물었다. 자신의 딴에는 되도록 새침해 보이려던 것이다.


“뻔하지요.” 달목이 답했다. “속세로 돌아가시려는 것 아닙니까?”


단번에 정곡을 찔린 태강이 못마땅한 얼굴을 하였으나 곧 근거도 없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꾸한다. 찰나의 고집이었다.


“그렇긴 한데, 달목은 왜 가려는 거야? 딱히 속세에 볼일도 없잖아.”

“잊으셨습니까?”

“응? 내가? 나 뭐 잊은 거 없는데?”


달목의 걱정스러운 눈길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깨를 두어 번 으쓱거리면서까지 태강은 자신의 망각을 부정했다. 꽤 완강하기까지 하여서 나나 역시 태강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황호와 녹수를 계속 찾아야지요.”

“아, 그래! 그랬지, 참.”


깜빡했다며 태강이 와그르르 손뼉을 쳤다. 그 소리 덕에 순식간에 주위가 요란스러워졌다.


“달목 말이야. 내가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너나 다른 애들도 이미 알지 모르겠지만.”

“무엇입니까?”


상대가 나나에서 달목으로 바뀌긴 했지만, 태강의 천연덕스럽게 꾸민 어조는 그대로였다. 그는 주먹을 쥔 손으로 다른 손의 바닥을 통 튀기듯 건드리며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에 달목은 태강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이미 거니챘지만 말이다. 중요한 화제를 앞에 둔 그들의 뒤로 나나가 눈치껏 느리게 따라온다.


“야담이 녹수를 찾을 작정이래.”

“그 이야기는 야담에게서 들었습니다. 잠깐이기는 해도 심연도에 다시 들러 통보식으로 전하고 떠났다만, 야담답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녹수의 근황에 관해서 단서도 갖고 있겠군요. 무엇이든 새로이 들으신 것이 있습니까?”

“글쎄······ 나도 들은 건 없어. 미끼를 설치했다고 하던데 무슨 미끼인지도 모르겠고 굳이 그렇게까지 찾아야 하는 이유도 알려주진 않았거든. 그냥 엄청······”

“엄청?”


달목이 목마른 얼굴로 태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태강은 배시시 웃기만 한다.


“엄청 음흉해 보였어.”


미적지근한 대답을 어떻게든 살려보기 위해서였음은 그의 대답을 듣고서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뒤에 있던 나나는 용두사미로 끝난 이 대화에 못마땅한 눈빛을 태강의 뒤통수에 꽂았다. 그러기도 잠시, 그 시선의 기미를 느낀 것인지 태강이 뒤돌아 나나를 쳐다보았다.


“백나나. 너는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에? 저, 저요?”


달목 또한 뒤돌아 나나의 얼굴 변화를 살폈다. 갑작스럽게 닿게 된 두 성인의 집중에 소스라치게 당황한 나나가 연이어 느닷없이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딸꾹. 딸꾹. 한 번씩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눈앞이 조금 비틀거리는 듯하다. 정신을 붙잡기 위해 눈을 끔뻑대었으나 그런다고 딸꾹질이 멈출 리가 없다.


“웬 딸꾹질이야? 놀랐어?”


태강이 안쓰러운 듯한 눈빛으로 상체를 조금 숙여 나나의 안색을 들여다보았다. 오히려 역효과만 낳는 행동이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더욱 부담스러워진 나나는 딸꾹질의 간격이 좁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되겠군요.”


이제 길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바다와 바람이 만든 어렴풋한 하모니와 간간이 지저귀는 새들의 목소리가 전부가 아니었다. 이 모든 자연의 음성에 일정한 박자를 부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나가 아주 일정한 속도로 딸꾹질을 반복하게 된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달목이 대뜸 나나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 멈췄네?”


자신이 더 신난 듯한 반가운 얼굴로 태강이 감탄했다. 달목이 나나의 손목을 낚았던 순간에 그녀의 딸꾹질이 드디어 멈춘 탓이다. 대신에 나나는 놀라고 말았다. 얼굴 몇 번 본 게 고작이었던 달목이 예고도 없이 제 손목을 잡을 줄은 몰랐기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래도 나나는 태강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진 않았다. 딸꾹질을 멈추는 방법 중 한 가지가 깜짝 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달목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이제야 가만히 있게 된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아닙니다.”


달목의 화답은 그의 말투에 어울리게 간결했다. 그러니 그것으로 만족하여 넘어갈 일이었다. 그렇지만 달목은 안타깝게도 꼬투리를 잡아야 하는 자의 짐짓 괴로운 미간 모양새를 하며 나나에게 말을 걸었다.


“많이 놀라셨을 테지만 지금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네? 딸꾹질을요?”

“아뇨, 그쪽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달목의 옆모습을 지켜보는 태강도 무슨 낌새를 느낀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야담에 대한 것입니다. 녹수의 일로 무언가를 알고 있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최근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다만, 요즘에는 야담을 통 떠올리지 않았다. 거울도 잠시 잊었었다. 그야 그럴 게 백면이 꿈에 나오기도 하였고, 태강과 천규 형제에 대해서 방금 알게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야담에게 끌려가고 거울을 잃었던 일에 관한 생각 자체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나나는 다시금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달목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가 생각하거나 담아두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읽어냈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달목도 초영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읽는 것일까? 하지만 그랬다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부 알 수 있었을 테니 이런 질문을 할 리 없었다. 나나는 자신의 딸꾹질이 너무 일찍 멈춘 것 같단 생각에 곤혹스러워진 눈동자를 아슬아슬하게 굴렸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백루랑 님 오늘 보내주신 후원금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도 후원금 쪽지가 와서 정말 놀랐으나, 덕분에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정말 감사합니다.


부끄럽게도 제가 후원금을 받을 정도의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확신은 없지만

언제나 자신을 갖고 글을 쓰라는 뜻의 소중한 계기를 제게 주신 것으로 여기며

더 좋은 이야기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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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22 신주원
    작성일
    20.09.30 00:39
    No. 1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작가님 덕분에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로즈리
    작성일
    20.09.30 22:18
    No. 2

    글을 쓰며 느끼는 행복을 이렇게 함께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 감사한 마음을 더 다채롭게 표현하면 좋을 텐데, 쉬이 그럴 수가 없네요.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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