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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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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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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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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19화

DUMMY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앉은 자리에서부터 일어나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얼굴은 여명의 것이었다. 가족의 애틋한 재회라도 되는 것처럼 나나도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온 거예요?”


막상 묻고 보니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 것 같아서 민망해졌으나 다행히도 여명은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주었다. 그의 뒤로는 그와 동행한 주화와 더불어 도진이 있었다. 조이와 아이는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일터로 아기를 데려갔으리라. 간단한 추리를 끝낸 나나가 다시 여명을 바라본다.


“잘 지내는지 보러 왔죠. 급하게 가기도 했었으니까, 심연도를 다녀왔다면서요?”


여명이 멋쩍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나나의 물음을 방법이 아닌 이유에 대한 것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생긋뱅긋하게 웃는 시선 교환 속에서 나나는 주위를 돌아 다른 이들의 표정도 살펴보았다. 모두 제 이야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네. 어쩌다가 보니··· 납치된 건 아니지만 구인(拘引)된 거나 다름없었달까.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되었거든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 나나가 슬금슬금 발을 움직이며 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뜨끔거리는 마음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그야 자신의 대답은 태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사항만 제외하면 어제 남겨둔 쪽지의 내용을 반복한 것과 같았으므로.


“천규에 대한 일이었어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아까는 여명의 뒤에 있던 주화가 이제는 제일 앞으로 나와 나나에게 다가갔다.


“네, 설마 모르고 계셨어요?”


놀라는 감정을 감출 수 없던 나나가 목소리를 살짝 높이며 물었다.


“태강이 따로 제게 와서 이야기한 건 없었거든요. 처음부터 태강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지도 못했고, 영월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거예요. 저번에 영월이 와서 부탁했었어요. 태강이 천규를 이곳의 병원이 아니라 원래 천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놓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결국엔 아무것도 못했지만.”


자책하는 투로 말을 끝맺음에 여명의 눈길은 주화의 뒷모습을 슬깃 지나쳤다. 자신의 가정사 문제도 그러했더니 이번에도 그녀가 다시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그러한 파심에서부터 그녀에게로 시선이 닿은 것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번엔 숨겨서 다시 되살리느니 뭐니 하더니 어제는 또 계획을 완전히 바꾼다고 했고 그래서 오늘 아침엔 나무 뒤의 굴에 눕히고 왔거든요. 아무래도 끝난 것 같아요.”


여명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나나가 요목조목 설명했다. 그리고 알짜가 되는 정보도 빼놓지 않았다.


“아무래도 야담 그 사람을 만난 뒤로 뭔가 동기가 생겼던 게 아닐까요?”

“태강과 야담이 최근에 만났던가요?”


함부로 반응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화를 이끄는 주화의 지휘에 맞추어 나나 또한 박자를 늦추고 천천히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본인한테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제 앞에서 그런 대화를 했거든요. 추정이기는 해요. 안 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미끼에 대해서 들었다면 아무래도 가장 최근일 테니까요.”

“미끼요?”


주화가 더욱 답답해진 심정으로 얼굴을 구겼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는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더없이 선택지가 늘어가고 있었다. 다만 그 수많은 선택지 속에 반드시 길은 존재한다는 믿음, 그리고 그 길이 미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기를 비는 바람으로 주화는 나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요······ 우선 지금은 쉬고 나중에 식사 때 이야기해도 될까요? 저도 지금 어안이 벙벙하거든요.”


하지만 나나로서는 지금 당장 자신의 컨디션을 우선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지칠 정도로 몸이 피곤한 건 아니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몸을 스리슬쩍 옮기며 그녀는 자신의 방문 앞에 섰다. 이제 문고리를 돌리기 직전이다.


“아, 미안해요. 그래요. 우선은 푹 쉬어요.”


자신이 상대방을 밀어붙였다는 데에서 오는 현기증을 느낀 주화가 이마를 짚었다. 앞으로 뻗으려던 걸음을 멈추고 여명이 주화의 옆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도진이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주화를 자리에 앉히며 그녀에게 진정할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인사도 없이 심각한 사색에 잠긴 주화를 한 번 쳐다보던 그가 여명을 향해 말했다.


“들어가보세요. 나나 씨에게 하실 이야기가 있던 것이죠?”

“아··· 그래도 될까요?”

“노크만 한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묵직하게 얼굴를 위아래로 움직인 여명이 눈인사로 도진의 배려에 감사를 표한 뒤 바로 나나의 방문 앞에 섰다. 도진이 일러준 대로 문을 두어 번 두드리는 행동을 가장 먼저 하였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나가 뚱한 표정으로 문을 발 하나만 간신히 내밀 정도의 넓이로 열었다.


“나나 씨 들어가도 될까요?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목소리의 주인공이 여명이었던 것에 의외로 놀란 나나가 그를 해시(駭視)했다. 그래도 문을 더 넓게 열며 그에게 그러해도 좋다는 뜻의 고갯짓을 보였다.


“무슨 이야기인데요?”


문을 닫고 여명을 따라온 나나가 물었다. 돌아보니 어디에 앉을지 몰라 좌우로 두리번거리는 여명을 향해 나나는 “그냥 침대에 편하게 앉으세요. 어차피 제 침대도 아니거든요.”라고 고했다.


“나나 씨한텐 실례가 많네요.”


여명이 말했다.


“네? 뭐 이런 걸 갖고. 바닥에 모여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더 수상해 보일걸요.”


나나는 피식거리며 그의 부담을 덜 만한 말을 가볍게 꺼내었다. 소리 없이 짓는 여명의 미소는 천천히 뚜렷해지는 만큼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그 아래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검은색 노트를 발견했다. 수많은 검은색 중에서도 어째선지 가장 낯익은 검은색이 마음에 걸려 눈앞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나나 씨, 이 노트는 뭔가요?”


허락을 구하는 양 여명은 나나에게 먼저 노트에 대해 물었다.


“네? 아······ 아, 이, 이건 말이죠.”


여명의 옆으로 앉으려던 나나가 하품을 하다 말고 당황했다. 그것은 여명의 본가에 다녀온 도진에게서 받은 노트였으니 당당하게 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서둘러 사이드 테이블 앞으로 가 최대한으로 여명의 시야를 가렸다.


“그러니까 이게··· 노트인데요.”

“그거야 알죠. 비밀노트나 아니면 일기장 같은 건가요? 그렇다면 제가 괜히 물었네요.”


나나의 태도가 평소와 달라 괜히 미안해진 여명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아, 아니 그렇기야 하겠지만 저기 그게 그러니까.”


자신을 위해 진실을 마다하려는 여명의 배려에 도리어 자신이 더 미안해진 나나가 두 손으로 그가 시선을 옮기는 것을 막았다. 어쩔 수 없이 솔직해야만 하는 스스로를 탓하며 그녀는 망설이던 입술 사이로 말을 꺼냈다.


“이거 여명 씨 노트예요. 아마도요.”


나나가 옆으로 물러서자 여명에게로 다시 노트가 보였다.


“제 노트요? 봐도 될까요?”

“그럼요. 아니, 여명 씨 노트라니까요. 저한테 그렇게 안 물어보셔도 돼요.”


아주 약하게 입꼬리를 올린 여명이 사양하지 않고 손을 뻗어 노트를 들었다. 낱낱의 장을 빠르게 넘기다가도 잠시 멈추고 이후 또 재빨리 노트를 살피던 여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마치 반성문을 검사받는 아이 같은 얼굴의 나나가 여명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제 노트가 맞네요.”

“그렇죠? 죄송해요. 돌려드릴게요.”


노트의 표지를 엄지로 계속 쓸던 여명이 그 손짓을 멈추고 나나를 건너다보았다. 흘끔거리다가 마주친 그는 분노를 상징하는 그 어떤 감정도 얼굴에 담고 있지 않았다.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저희도 도우려고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된 거거든요. 그래도 죄송해요.”

“그렇게 사과할 것 없어요.”


여명이 너그럽게 웃었다.


“어쨌든 고마운 쪽은 저니까요.”


그는 노트를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나나 씨가 갖도록 해요. 그렇지 않아도 나나 씨에게 줄 게 있기도 해서 이야기하자고 했던 거니까. 그나저나 그것보다 먼저 전할 소식이 있어요.”

“뭔데요?”

“이제 월촌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눈썹을 치켜올린 나나가 여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꽃집을 정리하고, 그곳에 가서 다른 일을 시작해볼까 해요. 아직 무슨 일을 할지 정하지 않았고, 뭔가 새로 시작하기에 애매한 나이이기도 하지만 도전해보고 싶어졌거든요. 어쩌면 아버지의 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이 있나 모색해보기도 할 것 같아요.”

“세상에, 꽃집 장사 잘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정리해도 돼요?”


문득 나나는 세상일에 저항하던 자신에게도 속물 같은 구석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여명 역시 그녀의 반응이 뜻밖이었는지 털털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건 도망친 길이었으니까요. 이제 모두들 덕분에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또 그 길을 걸을 방도를 생각하고 싶었어요. 이제는 저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일이니까 다시 나나 씨에게 부탁하려는 건 아니에요. 도진 씨에게도, 나나 씨에게도 전해야겠단 생각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명이 말을 마치자마자 나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아, 그리고 수도로 오기 전에 나나 씨가 이야기했던 도서관에 한 번 가봤거든요. 혹시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책이 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엔 그냥 나오고 말아서 나나 씨에게 그 이야기는 해줄 수 없네요.”


나나는 맑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여명의 입모양이 순식간에 변하는 광경을 주시하다가 난데없이 그가 말하는 데에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그건 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런가요? 돕고 싶은데.”

“뭐 일이 안 풀리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고 말죠. 거울도 다시 만들 수 있다는데.”


나나가 너스레를 놓았다.


“그래도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저도 찾아와요. 심연도에만 가지 말고.”


여명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따뜻해졌는지 눈을 기분 좋게 찡그린다.


“심연도에요?”

“주화도 돌아갈 거거든요. 심연도로. 꽃집을 정리하게 되었고 저도 이제 가족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주화도 돌아가야 맞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두 사람 이제 떨어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을까요?”


뭔지 모를 섭섭함이 나나에게 공기의 경계면을 타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썹을 팔자로 구부린 그녀의 표정은 솔직했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집을 혼자 지켜야 하는 아이를 보는 염려스러운 눈길로 나나가 자신을 쳐다보자, 여명은 어쩔 줄 몰라 민망하게 얼굴 근육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참. 제가 나나 씨에게 줄 게 있다고 했죠?”

“줄 거요? 선물이에요?”


호기심 담긴 얼굴로 바뀐 나나가 여명의 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죠. 나나 씨의 생각에 달렸지만.”


그런데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명은 자신이 입고 있는 리넨 셔츠자켓의 앞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더니 그 안에서 뭔가를 쥐어 나나에게 내보였다.


“이걸 저한테 준다고요?”


그것은 만년필이었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인지는 모르나 여명이 백면의 유품이라고 받아온 만년필이었다. 그런데 여명은 자신의 것을 나나에게로 거리낌없이 내어주는 것이었다.

마치 전성기를 구가해보았기에 아무 미련도 없는 행복한 사람처럼 밝은 얼굴의 여명은 끄덕거리며 나나가 만년필을 더 편히 집도록 나나에게 더욱 가까이 손을 뻗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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