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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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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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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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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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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DUMMY

드디어 날이 밝았다. 날이 밝았다는 말이 엉뚱한 표현처럼 느껴지는 것은 실은 오늘은 하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눈을 뜨고 보니 시야는 훤했고, 그것으로 오늘이 왔음을 충분히 인정할 정도로 정신은 무르고 몸은 단련되어가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 작은 장소에 많은 사람이 들락거렸다. 좀처럼 머무는 법 없이, 잠시도 뒤도는 일 없이 손에 무언가를 쥐고들 떠나갔다. 가만히 서서 사람을 기다리고, 오는 사람을 맞이하고 마침내 돌려보내는 일이 이렇게 번거롭고도 등과 어깨가 굽는 일인 줄 몰랐던 것은 대신에 고개를 숙이거나 시야를 좁혀 그림을 그리는 길을 걸어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나나는 어쩌면 괜찮은 발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발견. 발견이라는 단어에 어젯밤 도진과의 대화가 떠올랐지만, 아무튼 입가에서 한숨보다는 “네”라는 말만 연신 나오는 것조차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다녀올게요.”


계산대 가장자리에서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누워서 향기를 내는 꽃다발을 나나가 집어 들었다. ‘가족의 날’이라는 기념일 자체가 생소하고 이번이 처음 맞게 되는 날이었지만, 기념일이 가져다주는 설렘을 전혀 모르지도 않았다.

어제의 피곤한 끝에 걱정이 몰려오고, 고민한 끝에 근심이 몰려오던 복잡한 생각도 예상보다 쉽게 흐릿해졌다. 수많은 사람이 스치는 동안에 가게 안의 꽃만이 아니라 머릿속 사념(思念) 또한 줄어든 탓일 테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점심 식사를 위해 테이블 위에 도시락을 놓는 여명과 주화가 보였다.


“얼른 와요!”


주화는 도시락을 열면서 그 안의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고 이처럼 말했다. 여명은 이 말을 듣고 이내 웃더니, 간단한 손짓으로만 인사를 전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나나의 등뒤로 이들은 진석에 관하여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비밀이길래 그럴까?”


여명이 수저를 놓다 말고 턱을 매만지며 진석의 비밀이라는 것을 추궁했다.


“글쎄요?”


주화가 덤덤하게 받아쳤다.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주화 너는 알고 있지?”

“나나 씨가 저한테 말한 적은 없어요. 뭐, 때가 되면 밝혀지겠죠?”

“너무한 거 아니야?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여명이 토라진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자, 주화가 종일 침착하게 일을 해치우던 저답지 않게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몰라도 말씀드릴 수 없고, 알아도 말씀드릴 수 없죠. 비밀을 받아들여야 할 사람이 아직 그 비밀을 모르는 상태니까.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새치름해졌다. “밥 먹고 해야 할 일 많은 거 아시죠? 지금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 없어요.”


그 말에 마치 사장과 직원의 위치가 바뀌어버린 듯싶었다. 열없어진 여명이 수저를 고쳐놓고 자리에 앉았다.


“긴장돼서 그러시는 거죠?”


따라서 옆자리에 앉은 주화가 식사를 시작하며 조용히 물었다.


“응. 그런가 봐.”

“이 도시락도 할머니께서 직접 싸주신 거잖아요. 가족한테서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어요?”


계란말이가 꽤 입에 맞아버리는 바람에, 주화는 하나를 먹고도 다시 다른 하나를 집어야 했다. 젓가락은 들었지만, 음식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여명이 맥빠지는 목소리로 밤사이의 속앓이를 뜨문뜨문 늘어놓았다. 손님이 있었을 때의 활기차고 씩씩하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다.


“알지, 그건 알지. 다른 사람들한테 죄송할 정도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야 나도 잘 알지. 그런데 그냥······ 그런 기분 알아?”

“어떤 기분이요?”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이 두려운 기분.”


그의 말에 고심하느라 젓가락은 내려놓았지만, 입을 오물거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는 주화가 계란말이를 모두 삼키고 나서야 답했다.


“글쎄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기는 알지만, 그런 거라면 제가 아니라 초영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행복은 대개 사랑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행복과 사랑이 너무나도 별개인 경우도 있고······ 성인이 온전한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잘 없고, 그런 사랑을 하는 경우도 드무니까요. 어디까지나 딱 관찰자의 시점인 거죠. 객관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니까 항상 함께해줄 수는 없는 관찰자 말이에요.”

“차라리 상대가 나를 미워한다면 용서를 구하는 게 더 쉬웠을 거야.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도 어차피 용서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의 죄가 명확해지는 거지. 차라리 구원을 받지 않는 쪽이 더 용서받는 것 같단 뜻이야. 그런데 상대가 사랑으로 날 용서해버리면······”

“용서해버리면?”


여명이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멈추자, 주화가 그의 마지막 말을 따라 하며 되물었다.


“그렇게 날 용서해버리면 내가 나의 죄를 모르게 되는 것 같아. 즉, 내가 나를 용서해버릴 것만 같은 더 두렵고 공포스러운 죄가 생겨버리는 거지. 괜찮다는 말도, 실은 괜찮지는 않지만 괜찮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인 것처럼.”


둘은 식사는커녕 대화에 몰입해버리는 턱에 천장을 바라보며 같은 고민에 빠져버렸다.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위만 쳐다보던 주화가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여명의 말에 동조했다.


“맞는 말이에요.”

“그렇지?”

“네. 왜냐하면 행복도 그렇거든요.”


그녀는 이제는 내밀었던 목을 들이밀고 계란말이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장님은 계속 같은 고민을 하시는 것 같아요. 이름만 바꾸고 표현만 바꾼, 같은 고민 말이에요.”


여명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매우 골똘해 보이는 주화가 보였다.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잖아요. 자신의 행복이든, 타인의 행복이든 모두가 염원하는 게 행복이에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행복이 뭔지 명확히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 행복을 갖게 되었을 때, 그 행복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행복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모르게 되었거나 혹은 처음부터 몰랐거나 거의 이 둘 중 하나거든요.”

“그렇구나. 나도 그랬었겠지?”

“엄청요.”


주화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도 똑같을 것 같아요. 아니, 사랑은 이미 이걸 전제로 시작하는 건지도 몰라요.”

“어떤 전제?”

“모르게 되었거나 혹은 처음부터 몰랐거나. 이 전제요. 행복은 대체로 이게 결말인 경우가 많은데, 사랑은 이게 시작인 경우가 많은 것 같거든요. 초영이 뭐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는 저도 말할 수 있으니까요.”

“모르게 되었거나 혹은 처음부터 몰랐거나··· 이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럼 보통 어떻게 끝난다고 생각해?”


주화가 입맛을 쯧 다셨다.


“알고 싶다 혹은 알게 되었다.”


계란말이가 얼른 먹고 싶어진 그녀였다. 결국에 주화는 대답을 마치자마자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니까 사랑은 모르게 되는 게 아니라, 알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사장님이 느끼는 감정은 비록 ‘알게 되었다’까지는 아닐지라도, 실은 ‘알고 싶다’가 아닐까요?”


그녀의 대답이 무슨 암시라도 되는 양, 여명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심정을 느껴야 했다.


“그렇겠네. 어쩌면 나는 나의 죄를 몰랐던 것이고, 그래서 알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그게 너무 두려웠던 거고.”

“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요.”

“고마워.”


여명이 등을 꼿꼿하게 세우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의 인사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주화는 뜬금없이 조건을 내걸었다.


“고마우면······”

“어?”

“이 계란말이 제가 다 먹어도 돼요?”


여명의 속을 태우던 고뇌와 번민이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헤시시해졌다. 분명했다. 자신을 아주 쉽게 행복하게 만드는 이 사람은, 행복을 아주 잘 아는 성인(聖人)임이 분명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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