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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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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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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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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DUMMY

무슨 기대를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태강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은 성인의 일은 아님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작과 행동의 차이처럼 인식과 인정(認定)의 차이도 그러했다. 기적이라는 마침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끝나는 탈출구는, 종종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드디어 시작되는 비상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기적을 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무엇보다 태강 자신이었다.

문득 자신의 비밀 작전이 신문에 전재라도 된 것처럼 허무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가로등 아래에 있으면 그는 어느 정도 안전했다. 어디에 있건 자신이 안전하기를 원한다면 충분히 만강하고도 남을 몸이었지만, 유독 가로등이라는 이 인간의 발명품만은 자신이 비로소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참 이상한 사물이다. 아마 흑석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닐 테지만, 고개를 살짝 들면 그 친구의 잔머리까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오늘에 와서는 자신이 묶여 있음을 알려주는 고립장애표지 같기도 해서 여러모로 재밌는 사물이기도 하다.


“···모르겠어요.”


마음의 소리인지 아니면 목에서 나는 소리인지 우선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 저 여자의 생각과 말은 줄곧 일치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 건 오늘 오후였다. 한 노인네가 나나를 떠올리는 것을 시발점으로 저 둘의 뒤를 은근히 쫓게 된 것은 충동으로 인한 일이었다. 늘 이 충동성이 문제였지만, 이것은 자신의 동작을 행동으로 바꾸는 가장 큰 요소였기에 태강은 이에 대한 충고를 언제라도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왜, 왜 갑자기, 왜······”

“그러지 마라.”


내용은 단호했으나 말투는 부드러웠던 탓에 노인은 제 옆에 앉은 여자를 어르고 있었다. 병든 며느리를 달래는 데 온 신경을 쏟아부은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대충 사정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지켜본 도진과 조이, 아주 어려서부터 만나게 된 아기와 세계로부터 온 이방인 한 명만큼 알아갈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워낙 주화가 오랜 시간 그 곁을 지키기도 했거니와 고도훈의 문제가 끼어버린 이상, 자신보다도 더 나서서 일을 해결하려는 쪽인 야담이나 초영에게 맡기면 그만이었다.

그 도외시의 대가를 기어이 치르고 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 오늘을 이렇게 정처없이 살아버렸다.


“왜들 저런담?”


모자챙을 뒤로 돌리며 태강은 꼬투리나 잡았다.


“이제 시간도 너무 늦었어요.”

“그렇지만 아직 시간은 있지 않던? 괜찮을 게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 여자가 얼굴을 든 횟수 같은 걸 진작 세어볼 걸 그랬다며 속으로 아쉬워한 그는 이제 이런 이야기는 지겨워진 찰나였다. 그리고 평소에 하던 것처럼 머리를 굴렸다. 어떤 일을 저질러서 골려 주듯이 도와줘야 할지 방법을 탐색하는 시간이면 그런 대로 즐거워진다.


“아니지, 그건 좀 별로란 말이야.”


누구도 듣는 사람은 없지만 꼭 이렇게 자신이 만든 계획에 대한 평가까지 내려야만 하는 것이 곧 법칙이다. 방금 그는 자신이 아예 저 둘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기다리는 이에게 직접 가도록 하는 장면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상상만으로도 너무 시시했고 누구든 간에 그리 감흥을 얻지 못할 거란 생각에 재미가 시들해졌다.


“그 애한텐 저는 없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부모 같은 건 필요도 없는 아이들도 있다는 거,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여자가 애원했다.


“어불성설이다.”


늙은 여자는 엄격했다.


“부모도 부모 나름이에요, 저는 그 나름의 부모가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너무 늦어버렸어요.”


종일 울었던 여자는 이젠 울지 않았지만 실은 그만큼 더 서러워졌다.


“그렇다면 나는 뭐가 되는 게냐? 나는 무슨 죄인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도훈이어야 하는 건지 이 어미여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러지 마라,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이제껏 울지 않고 옆을 지키던 늙은 여자는 마침내 울고 싶어졌다.


“여명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아는 네가 그런다면, 여명이가 병들었을 적에 누가 그 애를 지탱해 줄지 아무도 모르는 게다. 그 애는 그럼 끝까지 혼자인 게야. 오늘 같은 날에 너도 어미이기에 이러겠다만, 네가 어미라면 이렇게 망설이지를 마라.”


하루 동안 들었던 노인의 말 중에 가장 본심이 많이 섞인 말이리라. 태강은 이 애달픈 대화를 곰곰이 듣던 중에 번뜩이는 영감 같은 것을 얻었다. 드디어 그가 궁리하던 계획이 때에 맞추어 완성된 것이다.


“병든단 말이지, 그거 꽤 괜찮은 생각이란 말이야.”


앞으로 자신이 할 행동 썩 좋은 짓은 아니라는 것을 태강은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모자챙을 다시 앞으로 가져와 제 얼굴의 반을 가렸다. 극적인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바로 필요한 것이 기적이다. 인간은 극적인 것이라 하면 대개 좋아한다. 그런 기적에는 어느 정도 인간의 희생이 따라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일을 만드는 건 내 선택이지만,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는 그쪽의 선택이니까.”


가로등에 기대어 태강은 나지막이 웃었다. 처음에는 머무르려고 했으나 이제는 자신이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겠단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무러면, 자신이 있으면 결국 일을 해결해야 하는 것 또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예상에서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누구, 누구 없어요?”


갑작스러운 복통에 노파가 앓는 소리를 내며 엎드렸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어도 제 옆에 있는 사람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느끼던 여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수북한 머리를 급하게 다듬어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태강은 사라진 후였다.


“어머니, 어머니······!”


아무리 불러봐도 노인은 알 수 없는 통성으로 대답만 할 뿐이다. 아주 늦은 밤이었다. 이러한 밤은 꼭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밤이었기에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어머니!”

“괜찮다··· 잠깐 배가 아파서······”


말을 잇지도 못할 만큼 찬땀을 금방 흘리는 모습에 기겁한 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신 안의 무언가가 깨져버려 산산조각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몰려왔다. 그 깨져버린 것은 분명히 마음이었으리라고 여자는 두 눈알을 굴리며 생각했다.

여자는 처음에 주저했다. 몇 발자국을 더 걷는다고 해도 그 정도의 거리에 도움을 요청할만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결국 용기만 낭비하는 셈이었다. 결국에 여자는 결정해야 했다.


“저한테 엎히시겠어요?”

“······뭐?”


여자가 등을 내보이며 손짓했다. 눈을 힘겹게 뜬 노파는 그 등을 커다란 산이라도 되는 듯이 두렵게 바라보았다. 검은 밤에 적색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등은 누군가가 고립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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