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연재수 :
333 회
조회수 :
14,266
추천수 :
244
글자수 :
1,286,707

작성
20.11.08 23:58
조회
30
추천
0
글자
10쪽

157화

DUMMY

그는 허름한 벙거지가 드리운 그늘에 가려진 얼굴로 신상을 밝히지 않은 채 다가왔다. 방금의 목소리가 어땠는지는 너무 놀라서 초영과 야담 모두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했으나, 차림새로 보아 늙은 나이의 남자였다. 하지만 이런 외관을 단서로 치지도 않을 만큼 이들에게 낯선 자의 정체를 짐작하게 하는 정확한 단서는 따로 있었다.


“······설마, 황호니?”


비록 뒤돈 상태로 그를 맞이하기는 하였어도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초영이 재빨리 돌아보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마음이 좀처럼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이 속세에 떠돈다면 그는 분명히 12성인 중 한 명일 것이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정말로 몰랐지만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은 노인의 태도로 파악컨대, 들려오는 이름을 딱히 부정하지 않음에 그가 바로 황호라는 믿음을 두 사람에게 심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대화에는 참여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누군가가 봐서는 안 되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만약에 다른 이가 기억이라도 하는 한, 모든 계획이 한낱 포화(泡花)가 될 테니까.”


그러면서 그는 두 사람을 비껴가더니 더 안쪽으로 들어서서 그들에게 계단 아래의 공간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는 손짓을 했다. 재촉의 손짓은 빠르고 짧았다. 이에 야담과 초영은 서로를 마주보아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을 확인할 시간도 갖지 않은 채 황호가 있는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황호는 그늘 안으로 모든 것을 감추고 나서야 비로소 이야기를 꺼냈다. 시작은 오래간만의 재회에 대한 소감이었다.


“역시 두 사람도 여전하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우리 성인들의 장점이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가능성의 조건에서도 말이야.”

“그 말인즉 누군가는 변하긴 한 모양이군.”


야담의 뼈가 있는 지적에 황호는 헛웃음을 쳤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는 모자의 끝부분을 뒤통수 밑으로 끌어내리며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었다. 그동안에 자신이 끌려다니며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던 그의 얼굴에는 피곤기가 어리기는커녕 오히려 지금껏 본 그의 노년의 모습 중에 가장 멀끔한 모양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맑고 건강한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애석하게도 말이야.”


안타까움에 황호는 미간을 좁히는 사이에도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시간에 쫓기어 서두르는 눈치다.


“바보가 아니라면 대충은 짐작들 했겠지. 뭐, 태강은 너희들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던진 신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응. 지금도 그러고 있어.”


초영의 빠른 대답에 황호는 잠시 웃음소리를 내었다.


“한 방에 강한 녀석이니까. 이런 일에는 적성이 맞질 않겠지. 여전히 변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반가운 소식이군.”


태강의 이름이 들리는 데에 표하는 반가움도 잠시, 그는 곧 즐거운 표정을 없애고 제 턱을 쓸어만지며 깊고 어두워진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어. 사람들이 곧 빠져나올 시간이 다가오니까. 누구도 우리가 함께였다는 것을 목격해서는 안 돼. 그러니 지금까지의 일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하지.”

“백면이 위험하다고 전한 쪽지부터 설명해주었으면 하는데.”


야담의 제안에 황호는 세찬 고갯짓으로 이를 기꺼이 승낙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백면이 남긴 시집에 아무래도 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래서 계속 시집의 판본은 모두 찾아다니는 것이지. 최근에 나온 것들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주로 이전에 나온 것들을 도서관마다 다니면서 훔쳐야 했지.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양심을 갖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줄이야.”


그때의 일을 떠올리기도 싫은지 황호는 질색하는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더불어서 말하자면, 저번에 실은 몰래 영월을 만난 적이 있지. 심연도에 있는 백면의 유품 중에 혹시 그 시집과 관련된 것이 있는지 알아봐야 했으니까.”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영월이 우리에게 네가 보낸 편지를 들켜버리고 말았으니까.”

“아, 그런가?”


야담의 미지근한 반응에 다소 놀란 황호가 자연스레 초영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내 얼굴을 끄덕거리며 야담의 의견을 확실시해주자 그제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아무래도 영월이 고의로 그랬을 가능성도 있겠군. 이 가능성이 참 삶을 괴롭게 한단 말이야.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보여주니. 그래서 말인데, 네가 영월만 부른 것은 너희가 못미더워서 그런 것은 아니야. 가능하다면 나도 선수를 치려고 그런 수작을 부린 것이니 어쩔 수 없었지.”

“무슨 수작을 말하는 거야? 녹수가 정말 배신한 거야?”


초영이 성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기정사실화된 이야기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으나 정말로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되새겨 보는 것이었다.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배신일 가능성도 있고, 또 아닐 가능성도 있지. 가능성이란 말해서는 소용이 없는 것이잖아.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겠군.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단서를 찾는 데 실패했고 일은 결국에 녹수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어야 했지. 결국에 시집은 백면의 내생 중 한 명인 정안수의 손에 전해져야 했어. 이건 확실해. 왜냐하면 내가 그 남자에게 직접 전해 주었으니까.”


당시의 장면을 떠올리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달갑지 않았던 순간의 연극이었는지 착잡한 심정이 황호의 얼굴에 오롯이 드러났다.


“조작된 시집이라고 한다면, 내생 중 다른 한 명인 백나나의 필적을 가져간 이유와도 관련이 있겠군.”


야담이 넌지시 말했다.


“그래. 바로 그 백나나라는 아이의 필체로 필사본을 다시 꾸민 거였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말하자면 너무 길어. 녹수 역시 가능성에 기대어서 앞날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니까. 우리 중에 기껏 한 명이 있던 홍연도 죽었으니 별 수가 있겠나? 그래도 홍연이 죽은 건 다행이었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일이 더 복잡해질 뻔했거든.”


서서히 불안감이 늘어만 가서 황호는 바로 두 발을 동동거리며 좌우로 좁은 폭을 반복적으로 걸었다. 이를 지켜보던 초영의 정신이 사나워질 즈음에서야 그는 멈추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디까지나 부분에 불과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계획을 성사시키는 데 실패만 한다면 녹수도 나를 의심할 거야. 그리고 나를 죽이려고 하겠지. 지금 녹수에게 12성인이란 허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정말 앞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어. 우선, 정안수가 시집에 대해서 어떤 연구를 하는지 잘 지켜봐 줄 수 있겠어?”


황호는 야담과 초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누구에게 시선을 멈춰야 할지 몰라서 대답이 들려올 때까지 계속 고개를 움직였다.


“그거라면 아마 백나나 쪽에서 하고 있을 거야. 내생에 관한 일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백면의 내생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야? 백면이 자신의 영혼을 지닌 아이들의 꿈에 직접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심지어 영월조차도.”


먼저 대답한 쪽은 초영이었다. 그녀는 황호의 질문에 답하면서 중간에 든 의문을 그대로 토로했다. 앞날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고 두 번이나 황호가 선포했으나 그것이야말로 불가능에 대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모두 시집에 관한 것이니까.”


황호는 단칼에 대답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그러자 야담이 이 순간에 치고 들어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 방법과도 관련이 있는 건가?”

“그 방법이라니? 무슨 소리지?”

“아까 네가 직접 한 말이다. 백면이 남긴 시집에 그 방법이 있기 때문에 모든 판본을 모두 찾아다녔다고 말이다. 그 방법이 뭔지 우리도 알아야겠군.”


황호는 질겁한 얼굴로 입을 벌려 놀라다가 도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물쩍거리며 입모양을 괴상하게 비틀었다. 당분간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체 불명의 독백이었다.


“그 방법에 대해선 설마 영월한테도 말하지 않은 거야? 그게 뭔지 알아야 우리도 지금 우리의 처지를 이해라도 할 거 아니야. 천일나무가 썩는 것은 알고 있니?”


성이 난 초영이 타이르듯이 조곤히 다그쳤다. 그녀에게서 나무에 관한 소식을 듣고도 황호는 황망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알고 있어. 그래, 천일나무가 썩는 것도 홍연이 죽은 것만큼이나 무척 좋지 않은 일이지.”


그리고 그는 난데없는 소리로 자신의 앞에 놓인 두 명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내 부탁은 그거야. 정안수가 시집을 연구할 때 부디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너희들이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것이야.”


그는 설명이 한참 부족한 부탁을 다시 당부하며 서둘러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자신을 향하는 두 사람의 눈빛을 피하고 그늘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초영이 황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지만, 절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제대로 그녀의 부름을 듣지도 않으며 그는 떠난 것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달이 만든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87 186화 20.12.07 30 0 9쪽
186 185화 20.12.06 29 0 9쪽
185 184화 20.12.05 28 0 9쪽
184 183화 20.12.04 28 0 9쪽
183 182화 20.12.03 33 0 9쪽
182 181화 20.12.02 32 0 9쪽
181 180화 20.12.01 28 0 9쪽
180 179화 20.11.30 27 0 9쪽
179 178화 20.11.29 30 0 9쪽
178 177화 20.11.28 30 0 9쪽
177 176화 20.11.27 29 0 9쪽
176 175화 20.11.26 30 0 10쪽
175 174화 20.11.25 29 0 9쪽
174 173화 20.11.24 30 0 9쪽
173 172화 20.11.23 28 0 9쪽
172 171화 20.11.22 30 0 9쪽
171 170화 20.11.21 36 0 10쪽
170 169화 20.11.20 40 0 10쪽
169 168화 20.11.19 25 0 8쪽
168 167화 20.11.18 24 0 10쪽
167 166화 20.11.17 26 0 9쪽
166 165화 20.11.16 24 0 9쪽
165 164화 20.11.15 29 0 10쪽
164 163화 20.11.14 25 0 9쪽
163 162화 20.11.13 26 0 9쪽
162 161화 20.11.12 33 0 9쪽
161 160화 20.11.11 36 0 11쪽
160 159화 20.11.10 26 0 10쪽
159 158화 20.11.09 29 0 9쪽
» 157화 20.11.08 31 0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