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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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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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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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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DUMMY

두 사람이 더 들어오고서도 한참이나 모두 침묵을 지켰다. 혹시나 더 입을 열었다가는 한 명씩 이곳으로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무언의 무게는 모두가 느끼기에 더없이 무거웠다.

몇 분이나 더 흘렀다. 옹기종기 모여 비좁은 공간 내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심상치가 않아졌다. 한꺼번에 몰려온 것을 두고 흘겨보는 상황이 우스워 태강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더 연구실 안으로 들어온 이후로 그들에게 최대한의 공간을 내어주기 위해 뒤쪽에 가 도로 앉은 안수가 그 소리를 신호탄으로 알아듣고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제안을 누구에게서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태강이 팔을 번쩍 들었다.


“난 찬성.”

“뭐?”

“왜? 여기서 서서 이야기하는 건 좀 웃기지 않아? 무슨 중대한 발표하는 것도 아니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초영에게로 태강이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히 그녀를 골리려는 속셈까지 계산된 얼굴이라는 것을 안수를 제외한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중대한 발표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겠군요.”


달목이 말했다. 그의 대답이 마치 태강의 편을 드는 것처럼 들려서 초영이 날카롭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 노할 일이 아닙니다. 보아하니 그 책도 뭔가 있는 것 같아서 꺼낸 말씀입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슬그머니 책임을 회피하는 달목의 태도에 초영이 사납게 머리를 넘겼다. 그러고는 아직 책을 모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그것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이윽고 가장자리에 서서 이들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 나나의 발언에 모두의 이목을 받는다.


“그럼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요?”


자칫 극단적으로 여겨지는 그녀의 결단에 모두가 눈을 번쩍이며 나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제 의도가 곡해된 것을 그제야 알아차리며 버벅거렸다.


“그, 그게 아니라 돌아가서 이야기하는 거죠!”


옆에 선 도진의 옆구리를 슬며시 찌르며 나나가 그의 동조를 구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마지못해 나나를 따라 이들 모두를 집으로 이끌어야겠다고 다짐한 도진이었다. 어물쩍거리고 있던 나머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하나둘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안수의 고갯짓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그들은 이 연구실을 벗어나 대화를 나누도록 결심한 것이다.


“나부터 말할게.”


자신의 지정석이었던 곳을 낼름 차지한 태강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는 초영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그녀의 용건은 애초에 정안수에게 있었으므로 말하는 내내 그녀의 눈길은 안수에게로 닿아 있었다.


“작품을 해석하실 거라면 제가 이야기하는 대로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대뜸 받은 명령에 놀란 안수가 맞은편에 앉은 그녀를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그리 갑작스럽게 말씀하시면 뭐라고 답을 드려야 할지······ 혹시 제가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연지사 있을 수밖에 없죠. 그건 사랑 이야기가 분명하니까요.”


입밖으로 직접 이야기하는 게 괴로웠던지 초영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답했다.


“사랑 이야기라고요? 아니, 아닙니다. 저는 어차피 작품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 책을 줄게요. 그러니까 제 이야기를 더 들어봐요.”


초영이 드디어 자신이 끝까지 내려놓고 있지 않던 책 한 권을 탁자 위로 드러내 보였다. 모두가 함부로 그 책을 건드리려고 하지도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연구에 관한 이야기라면 아무래도 제가 먼저 이야기를 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초영과 책을 번갈아서 들여다보던 달목이 평소보다도 사뭇 더 진지한 어조로 발언의 순서를 바꾸려고 들었다. 언제나 양보만 하던 그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태도다.


“그래. 그러도록 해.”


고집을 피우지 않고 바로 그에게 순서를 양보한 초영이 상체를 뒤로 빼며 물러섰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안수가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들었다. 그의 옆에서 지켜보던 도진과 나나도 고개가 그쪽으로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은 것 같은데, 제가 대신 그러해도 될는지요?”


달목이 안수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어깨를 바르게 펴고 고개를 공손히 굽히며 하는 그의 부탁은 안수에게 오늘 일어난 일이 탄로되어도 괜찮은지 상대방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안수는 책장을 넘기려다 말고 탁자 위에 책을 내려놓으며 그래도 좋다는 대답을 했다.


“선생님께서는 새로 받은 의문의 시집을 이용하시려는 목적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작자가 누군지 밝히겠다는 계획은 변함이 없을 테고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마 밝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성인의 권한으로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달목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안수의 말을 부정하는 의미에서 한 행동이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시인을 밝혀낼 수 있다고 어떻게 자부하는 건지요? 그저 저를 믿기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이런 신뢰는 너무 막연합니다. 신뢰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절대(絶對)는 곧 맹목(盲目)입니다.”


마른세수를 한 안수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구기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아닌 척을 하고 있었지만, 속이 말이 아닐 정도로 뒤틀린 것을 끝까지 숨길 수는 없던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 상대적으로 선생님을 신뢰하고 있을 뿐입니다.”


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진 나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몰래 하품을 하려던 태강과 눈이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각기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있었다. 싱긋이 웃으려는 태강을 서둘러 외면한 나나가 다시금 안수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달목의 말에 신중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부디, 어서 말을 하셔야지요. 제가 어떻게 해서 시인을 밝힐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는 겁니까?”

“그건 그 시인이 백면이기 때문입니다.”


허공에 내놓은 손짓이 그대로 굳었다. 자신이 백면의 내생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다. 원래 자신들이 전하려던 정보였으나, 어쨌든 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진 도진이 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그런데도 시인을 밝히는 연구를 계속하실 작정입니까?”


안수가 정신을 차리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달목이 말을 이어나갔다.


“선생님께서 시인이 다른 자라고 속이시는 일은 절대로, 그러니까 이건 상대적일 수 없을 겁니다. 학문은 선생님께 절대적인 본질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이라는 표현을 쓰도록 하지요. 선생님께서는 진리는 절대로 거짓과 하나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신념을 갖고 계시지요. 그래서 저는 감히 이런 계획을 권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이로운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그것은 믿는 자에 따라 다르기만 할 뿐, 더는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더 많은 말을 늘어놓을수록 수상하기만 하지요. 불신을 입증하게 되는 길을 맞이하니 말입니다. 정말로 시인을 밝히시려고 합니까? 그게 선생님의 진심이라면 말이지요.”


그러자 적막이 찾아왔다. 안수가 바짝 마른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째서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정말로 그렇다고 하면 밝힐 수야 있겠지요. 숨겨둔 것은 곧 밝혀지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정녕 문학을 하시는 분이라고 짐작할 수도 없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마주보고 있지 않아서 살짝 어긋난 시선의 교류가 오히려 그들 사이에 불화를 초래하는 것만 같아 두 사람의 눈길이 오고 가는 사이로 묘한 신경전이 느껴진다. 곤한 날들을 보낸 안수의 눈동자가 흐리다.

자신의 순서가 느닷없이 찾아왔음을 직감한 초영이 안수 앞에 있는 책을 당겨 가져와 제 앞에 놓았다. 그러고는 줄곧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서 반대쪽 다리를 꼬아 자세를 고쳤다.


“이젠 내가 말해야겠네.”


제 목소리가 꽤 커다랗게 울렸음에도 나나와 도진의 주목밖에 받지 못하자 초영이 안수의 앞에 제 손을 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이봐요. 이젠 내가 말한다니까. 어차피 지금 결정할 수도 없어요. 내 이야기를 들어보고서 결정해요. 난들 이런 이야기 꺼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체면 깎이는 기분이거든.”


이제야 안수가 뻑뻑해진 눈을 문지르며 초영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녀는 어느덧 자신이 가져온 책을 들고서 서두를 떼기에 앞서 고심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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