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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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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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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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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DUMMY

이 씨의 서점이 있는 거리를 쭉 걷다가 보면 드러나는 모퉁이에 연붉은 꽃이 피었다. 6월도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지만 추위를 꺼리는 꽃의 만개를 위해서는 조금 기다려야 할 듯하다. 태양이 내리쬐는 것도 아니라서 여름이 왔음을 식별할 수 있는 풍경이 많지 않다. 그래도 잘 찾아보면 이렇게 일부분 하나쯤은 여름의 구색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배롱나무를 올려다본 황호는 항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서 들며 헝클어진 머리를 가볍게 털어내었다. 그러고도 머리는 여전히 사나운 모양새였지만, 차림새에 신경을 둘 만큼 그의 마음은 여유롭지 못하다.

백 일이나 붉다고 하는 꽃도 그 아름다움에 홀린 이를 백 일씩이나 붙잡아둘 수는 없는가 보다. 허름하고 지친 행색의 황호는 꽃을 향해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내딛는 걸음 역시 조금은 성급하다.


“여기.”


가장 한가해 보이는 행인을 붙잡았다. 나이는 어리지 않아 보였으나 퍽 너그러운 운명을 운 좋게 얻은 것인지 반반한 생김새가 이목을 끈 것도 한몫했다고 해야겠다.


“저 다리는 왜 생긴 겁니까?”


부교는 이 거리 옆에 있는 규모가 크지 않은 호수 위에 세워진 것으로, 황호의 기억 속에는 봄 무렵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었다. 그 길지 않은 길을 느긋하게 떠도는 이들이 있었지만 황호는 구태여 그들에게까지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는 제대로 뒤를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대충 고갯짓만 보인 뒤에 건성으로 대답한다.


“물 위를 걷고 싶은 인간들이 만든 거겠죠.”

“이유를 모르는 겁니까?”

“할아범, 왜 그런 걸 물어요?”


남자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캔버스를 고쳐 들고는 제 미간에 약간의 주름을 그었다. 그의 뇌리는 온통 작업실로 들어가 어서 이 캔버스를 부수어버리고자 하는 계획으로 차버렸다.


“그저 궁금해서 그럽니다.”


황호는 젊은이의 불쾌한 언성에 그만 겸연쩍어져 저의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다면 묻지를 말아요. 그렇지 않아도 저것 때문에 짜증이 납니다. 쓸데없이 여기를 다녀가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요.”

“쓸데없다니!”

“쓸데없죠. 전혀 없고 말고. 하여튼 나도 모르니 묻지 마세요. 알아도 대답하기 싫어지는 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몰라서 대답하기 싫어지는 때가 더 많거든!”


예의라고는 전혀 갖추지 않은 남자가 휑하게 떠나버렸다. 더욱이 민망해진 황호는 옆얼굴을 긁적거리다가 다시 모자를 썼다. 무례하기는 했어도 젊은이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저 많은 이들 중에서 자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을 알고는 있어도 이곳이 왜 존재하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뒤이어 떠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에게도 본래 이곳에 온 목적이 있었다. 그는 그대로 젊은이의 뒤를 따라갔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이다. 남자는 서점 바로 옆에 있는 작업실로 들어가 버렸고, 황호는 그를 잠시 지켜본 후에 서점의 문을 느릿하게 열었다.

바깥의 따뜻한 공기와 확연하게 다른 온도를 지닌 실내 공기가 황호를 제일 먼저 반겼다. 다음으로는 새로 들어온 책들을 쌓아 놓고 책장을 정리하고 있던 이 씨가 서둘러 고개를 왼쪽으로 비틀어 손님을 맞이한다.


“어서 오십시오!”


이 씨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는 어떤 영묘(英妙)라 하여도 그가 가진 학식은 대개 늙은이의 것에다 비할 것이 못 된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니 자신을 찾아온 이가 실은 언제든 젊어질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반기는 것이다.


“이 책을 정안수 교수라는 분에게 전해 주실 수 있나 해서 이리로 왔습니다.”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안수에 대해서 이름만 들어본 정도로 알고 있는 척 연기하며 황호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32절 크기의 얇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표지부터 하여 종이의 질감은 모두 옛것 같았다.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든 이 씨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경국』이라는 글자였다.


“이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당사자에게 직접 전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캐내려다 말고 이 씨가 책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거울 나라』라고 하는 시집의 원본입니다.”

“원본이라고요? 세상에, 원본은 이미 교수님께서 갖고 계십니다. 도대체 이건 뭡니까?”


황당한 나머지 이 씨는 맥을 못 추는 손짓으로 어설프게 책장을 뒤졌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놀라서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올시다. 이게 원본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이것을 전해드려요.”

“아니, 그렇다면 왜 직접 전하시지 않고 여기로 오신 겁니까?”


황호는 모자의 정수리 부분을 매만지며 잠시 눈길을 딴 데로 두었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여서 그를 매섭게 지켜보고 있다. 이내 이를 견딜 수 없어진 그가 목을 가다듬는다.


“이미 알고 계셔서 그렇지. 오늘 내로 찾으러 올 겁니다. 부탁 좀 합시다.”

“아니,”


이 씨가 무어라고 말문을 열기도 전에 황호가 가게의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들어올 때와 상반되게 빠른 행동이었다.


“이게 원본이란 말이지.”


믿을 수 없다는 눈길을 좀처럼 거두지 못한 채 이 씨가 책을 본인의 키보다 높은 위치에 두어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서 책을 펼쳐서 살피고 싶지만, 주인이 있다고 하니 우선은 기다려보기로 결심한다.


***


물론 황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안수를 포함하여 초본의 존재를 아는 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한 번씩을 펼쳐본 그 책 한 권에 대해서밖에 모른다. 다른 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찾아 나서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야담을 만나러 간 태강은 한곳에 허망하게 발이 묶여버리고 말았다. 야담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나서 원래 돌아오기로 했던 이곳에 완전히 머물게 되었으나, 그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만큼의 큰 충격을 받은 상태다.


“태강.”


침울한 양실의 분위기를 깬 것은 태강이 당분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곳으로 이제 막 들어간 영월의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태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전하라고 맡긴 유품도 전하지 않고 돌아와 놓고서 그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영월. 영월은 알고 있었어?”


바깥으로 보이는 바다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태강의 시선은 아무렇게나 공간을 배회하고 있다. 온전히 드러난 영월의 한쪽 눈만이 오로지 제가 보는 것이 뭔지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게 뭔지를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 문제 같군.”


영월은 자리에 앉지 않고 그의 앞으로 가, 나란히 앉은 태강의 그림자가 비스듬하게 이어지다가 변면을 타고 꺾이는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야담한테 영월이 한 말을 전하러 갔어.”

“그건 알고 있다.”

“그래. 실은 별로 특별한 이야깃거리는 아니었잖아.”

“그랬던가. 그건 몰랐던 것이군.”


태강이 꽤 사납게 영월이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그 애 내생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우리한테는 그다지 특별하진 않잖아. 백면이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실은 하나의 영혼을 그대로 지닌 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 말이야.”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였다면 네가 굳이 속세로 가서 그 이야기를 전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러니까. 하지만 야담이 백면에 대한 거라면 뭐든 새로운 정보를 얻고 싶은 게 눈에 훤하게 보이니까 그랬던 거지, 뭐.”


태강이 하소연을 하듯이 끝머리에 짧은 한숨을 붙였다.


“그게 그렇게 너희에겐 충격이었던 거군. 이렇게 돌아온 것을 보니.”

“아니야. 그것 때문에 돌아온 게 아니야.”

“원래 돌아오려고 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태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맞는데, 아무튼 아니야.”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영월은 알고 있었어? 야담이 황호를 찾으러 갔을 때 겪은 일 말이야.”


이번에는 영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 그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랬군. 어떤 내용이었지?”


그때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하려는 듯이 태강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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