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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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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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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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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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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DUMMY

안수는 방금의 한마디가 대단한 발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론을 바꿀 만한 것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에 만난 정명훈은 복도에 지나다니는 몇 명의 학생들로 인해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도 예의를 갖춘 말투로 안수에게 그가 내심 품고 있었던 희망의 싹을 뽑아버리는 소식을 전했었다. 이미 학회에 통보식으로 연구 주제가 바뀐 것이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계획서를 다시 제출하였으면 한다는 학회장 권기현의 은밀한 통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애매한 대답은 결국에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여지를 덥석 던져준 꼴이었다. 후회인지 모를 감정으로 한숨을 내쉬니 문득 안수는 자신이 한심한 자라는 것을 분명히 느껴야 했다. 서슴고 주저하면서도 여전히 시집을 연구하고 싶어 하다니. 불만을 만들지 말자. 불만을 만들게 되면 만족할 테까지 욕심낼 것이다. 욕심을 내면······ 욕심을 낸다면 어떤 불만도 없이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 생각의 환기가 필요했던 안수가 향한 곳은 이 선생이 운영하는 서점이었다. 서점의 주인은 점심때가 다가오는 탓에 양팔의 팔꿈치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꾸벅 졸고 있었다. 낯선 기척이 공기의 온도를 바꾸어놓자 입술을 뻐끔꺼리던 이 씨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처럼 눈과 입을 크게 벌리며 화들짝 놀란 얼굴을 보였다.


“미안합니다.”


단잠을 끝낸 것이 자신의 등장인 것만 같아 안수가 인사 대신에 먼저 사과했다.


“아, 아닙니다. 교수님께 보여드리기 민망한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제가 어젯밤에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어서 말이지요.”


안수의 사과를 받지 않겠단 뜻으로 한쪽 손을 휘저으며 이 씨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책 한 권을 은근슬쩍 가리켰다. 아무래도 정오가 가까워지는 무렵에 졸음과 싸워야만 했던 이유를 어서 말하고 싶은 눈치다.


“이 책은 뭡니까?”


그래서 안수는 이 씨의 기대에 걸맞게 그가 원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책은 펼쳐진 상태였기 때문에 표지를 볼 수 없어서 단번에 어떤 책인지 알 수 없었다. 깨알 같은 잔글자는 없어 보였지만, 굳이 남이 읽고 있는 책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실례를 넘어서 도둑질 같이 느껴져서 안수는 바로 시선을 이 선생에게 두었다.


“12성인에 관한 교양서라고 할까요. 아무튼 전문가가 아닌 모든 비전문가가 읽기에 아주 괜찮은 책입니다. 아, 아시지요? 저희 가게 옆에 화실을 두고 있는 화가 친구 말입니다. 그 친구가 아침에 찾아왔는데 글쎄 근처 부교에서 어제 성인 야담을 보았다지 뭡니까.”

“죄의 성인 야담을 말이군요.”


죄인들에게 영혼의 사형을 내릴 때가 벌써 돌아온 것일까 의문이 들어 안수가 고심에 빠지는 눈빛을 보이자 이 씨는 서둘러 대답했다.


“네에. 그렇지만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닙니다. 그 친구가 이곳에 온 까닭을 물으니 달을 보고 있었다고 대답했다더군요. 그런데 그 친구가 글쎄, 저에게서 책을 빌려가려고 그렇게 아침 댓바람 찾아온 거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지요?”

“제게서 책을 빌리려고 그랬던 거지요. 아무튼 책이라곤 좀처럼 사는 법이 없습니다. 뭐, 저도 이런저런 부탁으로 귀찮게 하니까 거기서 거기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래서 별수 없이 책 한 권을 그냥 빌려줘버렸지 말입니까.”

“그런데 왜 이 선생이 이 책을 읽고 있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예, 그렇죠. 실은 그 친구가 제게 한 이야기를 아직 전부 말씀드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문학을 업으로 삼으며 살아온 세월 중에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토록 12성인의 이름을 우연으로도 자꾸 듣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안수는 생각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 선생만 괜찮다면 자세히 듣고 싶군요. 무척 흥미로우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그런 부탁을 먼저 드려야 맞지요. 교수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 이야기를 전부 들려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물론 이 친구가 어디 가서 함부로 떠벌리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 자리에 있었으니 그것도 별 소용없는 당부였을 겁니다.”


이 씨는 드디어 팔꿈치를 떼고 그대로 자신의 허리춤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안수의 눈에는 그의 행동이 모르긴 몰라도 책장수를 독서로 이끌 정도로 재밌는 이야기임을 보증해주었다.


“워낙에 이상한 사람인 건 아시지요?”


대뜸 이 선생은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고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누가 말이지요?”

“저 친구 말입니다.”


이 씨가 검지로 앞쪽을 가리켰다. 안수가 허리를 돌려 확인하니 바깥으로 난 길에 이야기의 주인공이 지나가고 있었다. 안쪽에서 친구가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지 그저 팔을 위로 올려 두어 번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그는 사라졌다. 팔에 캔버스를 차고 있었으므로 정처 없는 방황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화가가 보이는 방향으로 자신 역시 팔을 높이 들어 인사를 받아주던 이 씨는 안수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서 그가 다시 자세를 바로 하기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뭐, 워낙에 그림이 독특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분인 건 모르겠습니다. 색감이 참 따뜻하더군요.”

“속으시면 안 됩니다. 저 친구가 얼마나 냉혈한인데요. 저렇게 책을 마음대로 빌려가놓고 제가 달라고 할 때까지는 입을 싹 닦고 까먹고 사는 사람이 저 친구입니다.”


안수가 부드럽고 낮은 웃음을 흘렸다. 손님을 기분 좋게 웃겼다는 만족감이 들었지만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오기 위해서 이 씨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저 친구가 간밤에 만난 성인을 앞에 두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나 봅니다.”

“죄가 있다니, 성인 앞에 두고 고해할 만큼의 큰 죄였던가요?”

“그랬다면 제가 이 책을 읽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별것도 아닌 죄를 갖다가 용서해달라고 한 모양입니다.”

“뭔데 그러지요?”


이 씨는 엄지로 자신의 턱 밑을 누르며 노련한 탐정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가 젯소칠만 한 캔버스를 갖다가 그림이라고 팔았나 봅니다. 이번에 저한테 젓가락을 그려줬는데, 그걸 그리기 싫다고 머리를 굴리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죠. 그런데 그 그림을 판 이후에 계속 그림이 안 그려져서 결국에 그 구매자한테 그림을 돌려달라고 한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그것을 용서해달라고 혼자 있는 성인에게 겁도 없이 다가갔다는 겁니다. 참 이 친구도 이상하죠.”

“그래서 그 성인은 뭐라고 했지요? 대답이 궁금하군요. 저 화가 선생을 용서해주었던지요?”


그야 그건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야담은 그에게 그의 양심에게 물을 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침묵으로 일관한 적도 있으니 화가의 죄가 사해졌는지는 어쩌면 야담도 모를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직 거기까지는 듣지 못한 안수는 매우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이 씨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거야 모릅니다.”


결말까지 알고 있어도 결론을 모르는 건 이 씨 또한 마찬가지기에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군요. 게다가 저 친구 양심한테나 물으라며 상대를 한참 골라도 잘못 골랐다는 말을 했다지 뭡니까. 어쨌거나 그런 말을 꺼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죄가 안 생긴 게 어딥니까. 그런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태평한지, 역시 그림은 아무나 그리는 게 아니군요.”


안수는 여전히 왜 이 씨가 12성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는지 알 수 없어서 얼굴을 찌푸리며 그것에 대해 언급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지요? 성인을 직접 만나고 나니 12성인에 대해 궁금해졌고, 이 선생도 그 이야기에 흥미가 생겨서 찾아보는 겁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 친구는 12성인에 대해 궁금한 게 아니고 야담에 대해서 궁금해졌다고 하더군요. 죄의 성인이라면서 보잘것없는 화가의 중대한 죄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다면서요. 그러니 역시 이상하지요.”


뚜렷한 까닭을 얻을 수는 없어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때로 호기심은 막연하게 찾아오는 법이니 말이다. 화가 이야기는 이쯤으로 마무리하고 다시 책을 화제로 삼으려고 하니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뵈어도 되겠습니까?”


건장한 체격과 큰 키의 남자가 들어와서는 주위의 책을 둘러보지도 않고 계산대를 향해 만남의 허락을 구했다.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알고 이 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예.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남자는 이 씨가 아닌 이 씨 앞에 앉은 안수에게로 정확히 시선을 고정시켰다.


“선생님을 뵈었으면 합니다.”


그 소리에 당황한 안수는 어리둥절하며 몸을 돌려 문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미동도 없이 자신을 뚫어지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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