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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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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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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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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DUMMY

얼마 지나지 않아 2층 위에서 하나둘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인파는 곧 흩어지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계단 밑에 있다 한들 소용없었다. 황호의 경고대로 위에서 내려온 이들은 두 사람이 그늘진 곳에 있는 장면을 너무 쉽게 목격하고 말았다.

도둑질을 들킨 것처럼 어깨를 껄끔대며 초영과 야담은 그늘에서 벗어나 아예 건물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며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회상했다.


“그 방법이란 게 뭐라고 생각해?”


이번에는 먼저 야담의 추리력에 기댈 생각으로 초영이 물었다.


“가능성이야 아주 많지.”


야담이 초영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는 황호가 했던 가능성에 대해 떠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시의 제목이 바뀐 것도 우연이나 변덕 탓은 아닌 것 같군.”


이야기를 마치며 자신을 외면하려 드는 야담에게 다가가 그의 시야를 가로막은 초영이 대화가 끝나지 않도록 냅다 화제를 돌렸다.


“그래. 그건 지금 우리가 궁리할 게 아닌 것 같고, 너 말이야. 그래서 말 안 해줄 거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부러 피하지 마. 저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혼자 짊어지지 말라고까지 내가 말했잖아.”


초영이 불만이 가득한 눈길로 야담을 쏘아보았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릿결을 뒤로 넘기면서도 그녀는 야담에게 향하는 눈빛을 잠시도 거두지 않았다.


“그나저나 먼저 들려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야담은 비밀을 밝히는 대신에 마치 이에 조건을 다는 모양새로 다른 이야깃거리를 제안했다. 다른 눈에 칼을 세우고 있던 초영의 각오가 호기심에 조금 누그러지는 순간이었다.


“백면이 혼자 짊어져야 했던 것이 사랑이라고 아까 분명히 말했었지.”

“응.”


초영은 하늘을 향해 눈을 위로 치켜뜨며 야담이 지금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이 나의 경험이라면, 초영 너의 견해에 따라 생각하자면 백면이 혼자 짊어진 것은 사랑이었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 사랑인 거지?”

“그거야 아주 간단하지.”


갈수록 어두워지는 낯빛의 야담과 달리 초영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아주 당당하고도 구김 없는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야담은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면이 혼자 짊어져야 했던 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초영은 어떻게 알았을까. 초영이 사랑의 성인임을 망각하고 있던 게 아니다. 백면이 언젠가 아직 존재했을 적에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에 대해 고백했던 것일까. 억겁이나 다름없었던 백면의 인생을 들여다보기란 그 시간을 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백면을 좋아하는 여자가 한 명 있었거든.”

“그럼 성인(聖人)을 좋아했단 말인가?”

“그래. 언제였지, 지난 일이라 기억도 안 나네. 언젠가 한 번 그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그 여자가 하는 기도를 내가 직접 세세하게 들은 적이 있어. 심연도에까지 닿을 정도로 진심이 엄청났거든. 어차피 말도 안 되는 거라 방관하다시피 넘겼지만. 그래도 나중에 백면한테 한 번 말해준 적은 있을 거야.”


초영은 그때를 떠올리며 짧은 웃음을 가냘프게 터뜨렸다. 어쩌다 던진 농(弄)에 야담이 저리 간단하게 넘어가다니 여간 우스운 게 아니다.


“실은 이건 그냥 하는 이야기야. 뭘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러니?”


그녀는 결국에 계속해서 나오는 짓궂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말한 건 삶에 대한 사랑, 애정을 말한 거였어. 보통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삶을 애정하는 법이잖아. 그렇지? 그런 뜻에서 한 말인데,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네.”


야담은 어쩐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보다 뭔가 중요한 단서를 초영이 아무렇지 않게 흘리면서 그것을 주워 담을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다는 데서 오르는 화였다.


“그래도 그때 말이야. 내가 다음날인가 백면에게 말해줬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 재밌었거든.”


야담은 잠자코 입을 다물고는 매서운 눈빛으로만 그녀가 계속 이야기할 것을 재촉했다. 그것이 재미있어 생긋이 미소를 지은 초영은 야담의 측면으로 보이는 가로수 풍경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붙였다.


“지금은 전부 떠오르지 않지만, 그땐 그게 너무 신기하고 흥미로워서 여자가 속마음으로 한 말을 거의 다 기억하고서 그대로 백면한테 전했거든. 그랬더니 백면이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슬며시 웃기만 하는 거야. 재밌지 않니?”

“그게 왜 재밌다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군.”


백면이 실제로 어떤 반응을 했는지는 몰라도 초영의 말에 의하면 그의 반응을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재미를 느낄만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 그는 자신에게 마음을 품은 여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였던 것일 테다.


“재밌던 건 그 애가 한 말이 아니라, 그 애가 하고 있던 눈빛이었어.”


듣지도 않고 그의 생각을 알아챈 초영이 뒤에 설명을 덧붙였다.


“적당히 쓸쓸하고도 적당히 기쁜 눈빛이었거든. 모든 감정이 딱 알맞게 공존하는 느낌 말이야. 꼭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아니, 백면이라면 그 사랑에 공감을 하고 있다고 해야 더 신빙성이 있겠지? 아무튼 신기했지. 뭐든 극단적이기만 했던 백면이 중간을 찾는 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재밌었다는 거야. 알겠니?”

“사랑에 빠지면 외로움은 없어야 되는 게 아니었나? 쓸쓸함을 느끼는 눈빛을 두고 어떻게 백면의 허무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해석을 했는지 모르겠군.”


야담의 멋모르는 소리에 초영이 가만있으라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죄를 알고 사랑을 모르는 자가 바로 죄의 성인 야담이었다는 점에 몹시 실망한 표정이다.


“넌 어쩜 애가 그런 소리를 하니? 사랑은 외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감정이 아니야. 원래부터 내게 있던 외로움을 받아들이게 하는 감정인 것이지. 짓는 것이 죄고, 없애는 것이 죄가 아닌 것처럼 말이야. 고작 이런 걸 헷갈리면 안 돼.”

“고작이라고. 어째서지?”

“죄로 인해서 운명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사랑 또한 마찬가지야. 실은 모든 감정이 그럴지도 모르겠네. 행복만 해도 고여명은 행복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었으니까. 아무튼 말이야, 사랑에 대해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닐 텐데 너의 낯선 그 표정, 나도 역시 너무 낯설단 말이야.”


초영이 바라본 야담의 얼굴에는 세속의 비밀과 원리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듯이 혼란스러워진 이방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있어 장족의 발전이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두고 원칙을 핑계로 무시하고 모면하려고 들었던 지난날에 비하면 확실하다. 초영을 피하지 않는 행동으로만 짐작해도 적어도 이제는 그러지 않겠노라는 노력의 신호를 상대에게 전하는 셈이다.


“제목이 바뀐 시가 무슨 내용인지 기억하고 있나?”


야담은 대뜸 본론으로 회귀하여 초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랑을 입밖으로 꺼내기가 부끄러워서 말을 돌리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자세히는 잘 모르겠네. 정확하게 떠오르진 않아. 아까 문학제 들으러 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서 잠시 확인만 한 게 다였잖아. 그러니까······ 클 때는 떠오르느라 나의 얼굴로도 가릴 수 없더니 떠오르더니 작을 때는 나의······ 뭐였지? 손바닥이었나?”

“손톱이었다.”

“그래. 손톱. 손톱으로도 가려지로소니. 뭐야, 기억하면서 나한테 물어본 거였니?”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단 사실에 불쾌해진 초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를 보고도 야담은 곧 초영이 한 말을 부정하지 않았는데, 알면서도 그녀의 입으로 시의 내용을 들어야 했던 것은 다시금 그 시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곱씹을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모르긴 몰라도 황호는 시집에서 백면과 그 내생들이 자신을 찾으면 녹수가 원하는 어떤 단서를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더군.”

“그래. 맞아. 그래서 우리한테 그런 부탁을 무작정 하고 가버렸잖니.”

“하지만 어쩌면 자아니 거울니 그런 것들로 인해 우리가 잘못 짚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이야? 그럼 시집이 전혀 다른 주제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거야?”


야담은 뒤를 돌아 아까 전부터 초영이 독점하여 바라보고 있던 가로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지는 하루의 끝에서 나무가 지은 무리는 오순도순했다.


“그래. 지금은 어디까지나 나의 해석이 지나지 않지만, 다른 시들은 몰라도 제목이 바뀐 그 시는 어쩌면 사랑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는 그 풍경을 떠나지 않은 시야를 한껏 누리며 대답했다. 어정쩡하게 끝나는 하루에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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