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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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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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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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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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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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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DUMMY

자그마한 꽃집 앞에 놓인 등벤치 앞에 멈춘 초영과 여명은 나란히 등을 기대어 앉지 않고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다. 시간이 마냥 우리들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시집의 행방을 알리기는 하였다만 그 뒤의 이야기도 마냥 우리들의 편이 아닌 것처럼 낯설기만 하다. 그 분위기를 짐작한 여명은 슬쩍 초영의 눈치를 살피며 등을 더욱 꼿꼿하게 폈다.

바깥쪽에 앉은 초영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인정하기 싫은 기억 하나가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아 체한 느낌이다. 그러다 그녀는 검은색의 프레임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제목이 없는 시가 있다고 하셨던 게 마지막 말씀인 것 같네요.”

“그랬었나요? 그리고 야담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죠?”

“네. 그러셨어요.”


눈물을 보인 이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순종하게 된다. 밑바닥까지 보였다는 생각에 낯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질 줄 알았건만, 지금의 여명은 나긋한 어조로 대답하며 오히려 초영의 마음을 달래고 있으니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순종이었다.


“혹시 말이에요.”


제 이야기를 하려다가 문득 초영은 여명에게 한 가지를 묻는다.


“기분 나쁘게 듣진 말고요, 편견은 아니니까요. 어차피 나 같은 성인이 편견을 갖고 있다고 해봤자 일반적인 인간들은 사는 데 별 지장이 없기도 하거든요.”

“어째서죠?”

“우리를 종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요.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찾을 뿐이죠. 우리가 그들에게 갖는 편견보다는 그들이 우리에게 갖는 편견이 더 힘을 지녔다고 봐야겠죠. 아무튼 이런 걸 이야기하려던 게 아니에요.”


긴 머리카락을 부여잡아 턱을 감싼 초영은 괴로움에 눈을 세게 감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진저리를 친 후에야 난리를 멈춘 그녀는 원래 질문하려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것은 여명, 그러니까 고여명보다는 고여명의 집안에 관한 것이었다.


“혹시 집안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어요?”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에요. 고도훈보다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어느 정도로요?”

“당신 조상 고정백까지요.”


여명은 멍한 반응을 보였다.


“열녀비의 주인, 정윤옥에 대해서도 말이죠. 혹시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아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우습긴 하네요. 나는 마음이 아니라 기억을 읽으니까 말이죠. 사랑을 제외한 기억을 읽는 건 다른 아이들이 인간의 한 감정을 제외하고 다른 감정은 흐리게 느끼는 것처럼 자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신 기억에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죄송하게도 그게 사실이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회상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초영이 말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어릴 적에 들은 기억이 있는지 여명은 제가 살아온 시간을 더듬었지만, 무엇도 짚이는 게 없었다. 눈가 근처를 가볍게 긁적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게 전부다.


“그래도 쓸모없이 꺼낸 말은 아니에요. 이걸 말해주려고 온 거니까요. 소식을 전하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본 거였죠. 그렇다면 됐어요.”

“제가 더 부모님과 함께였다면 뭔가 들었을지도 몰랐을 텐데요.”

“그러니까 편견이 아니라고 내가 먼저 일러둔 거예요. 그렇게까지 받아들이지는 말아요. 나는 당신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라 백면, 정확히는 백면의 시에 대해서 말하려는 거니까.”


초영은 목청을 가다듬고서 바로 대화 주제를 돌렸다.


“달, 원래 제목이 없어야 하는 그 시에 대해서 말할게요. 그 시를 읽은 적이 있지만, 잘 떠오르지 않죠?”

“네, 맞아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내가 간 다음에 찾아봐도 괜찮아요. 그건 「달」이라는 제목에 맞추어서 보면 달돋이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어수선하게 두었던 머리를 차례로 매만지며 용모를 단정하게 정리하며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 모습에 머쓱해진 여명은 제 뒷목을 손바닥으로 몇 번 문질렀다.


“야담은 그게 사랑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해요.”

“사랑이요? 그럼 월출을 사랑에 비유한 건가요?”


예상도 못 했던 이야기가 나오자 다소 놀란 여명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낭만적이네요. 달이 뜨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성인이었나 보군요.”

“그래요. 그랬나 봐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래서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왜요? 사랑이 아니고 본래 백면이 주관하는 감정인 허무여야만 했나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랑의 성인(聖人)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사랑만을 느끼며 살아온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증오와 비애를 동반하기 쉬운 감정이라서, 제 일에 황호나 녹수가 끼어드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저 역시 사람들이 사랑을 하며 느끼는 감정은 물론이며 기억 속에 묻어둔 사랑을 떠올릴 때의 회한이나 환희도 모조리 겪어야만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백면이 살아생전에 무엇을 느끼고 살았는지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떠들 권리가 제게는 없었다.


“난 백면이 사랑의 전문가였다고 해도 별로 관심이 없어요. 굳이 그 감정에 점수를 매겨 내가 그 아이보다 등수에서 밀린다고 해도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을 테고요. 다만······ 나는 모두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을 앞에 두고 다시 서로에 대한 처음의 사랑을 느끼길 바랐던 건데, 막상 내가 제일 먼저 그 일을 실천하지 않고 있던 거예요.”

“무슨 일을 겪으셨군요.”

“예전에 백면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여자가 한 명 있었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인지라 거리를 무시하고도 내게 닿을 정도의 그 간절한 마음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죠.”


만약 가까운 거리에서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더라면 아마 금방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지나간 사실을 부정하는 가정일 뿐이라서 초영을 더욱 시름으로 괴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정윤옥일지도 모른대요, 야담이 말이죠.”

“그분이 그럼 열녀가 되셨던 저희 조상님이라는 건가요?”

“처음엔 믿지 않고 싶었어요. 하필 고도훈의 아들로 태어나려고 했다는 게 의문이긴 했는데, 그랬다면 이해가 되더라고요. 백면한테 중요한 건 고정백이니 고도훈이니 이런 인물들이 아닐 테니까요.”


초영은 이번에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막막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떠들어봤자 당장에 해결의 실마리를 쥘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말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보잘것없는 이기심을 느껴 그 실책을 끝내 감추려 들려는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 순간에 여명은 콧등을 문지르다가 새로운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책장에 낡은 책 한 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낡은 책이요?”

“네. 고서(古書) 말이에요. 너무 오래전에 집을 나갔던 터라 제 기억 자체가 불분명해요. 그러니 제 기억에 의존해서 단념하지 마셨으면 해요.”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여명은 혹시라도 자신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단 기대에 서서히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침착한 눈빛으로 초영을 바라보았다.


“뭔가 집안에 관련된 것이겠거니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범죄자였으니 당연히 자신의 핏줄을 증오하셔도 오히려 그 핏줄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는 관심도 없으셨겠죠. 그래서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이라 그게 원하시는 일의 단서가 될 거라고 확신을 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나는 상관없어요.”


오히려 그녀에게는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히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일러는 두었지만, 내심 이곳 난연에 와서 새로운 것을 얻기를 바라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명의 말대로 그것이 단서가 될 거라는 확신은 버려두어야 한다.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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