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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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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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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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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DUMMY

안수의 말대로 오늘 하루는 유독 길게 지나간다. 좀처럼 쉽게 삶을 채가는 시간이 유달리 미적거리는 탓은 오늘 안으로 치루어야 할 사건이 있는 것을 암시하여서, 오히려 사람을 더 노곤하게 만든다. 정오를 넘긴 무렵이라 날은 아주 밝았다. 내리쬐는 따뜻한 기운에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나나의 눈이 찾은 것은 보름달 하나가 전부였다. 해가 없어도 달을 해로 삼으며 사는 월계인들의 삶은 자신의 삶과 무척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있고 달이 있는 세계와는 다르게 달이 있고 사람이 있는 월계에서는 애초에 삶은 낮과 밤이 일치하는 시간의 총체일지도 모른다.


“자, 봐요.”


도진이 ‘홍우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시집 하나를 나나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한 권만 가져온 모양이다. 남모르게 더워지던 바람은 이제 대낮에는 옷의 단추를 열뜨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손부채질을 자극했다. 아직은 땀이 흐를 정도의 날씨는 아니지만, 마시고 있는 공기가 텁텁한 것은 분명했다.


“정말이네. 새삼스럽지만 월계까지 와서 시를 읽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원래도 잘 안 읽는 건데 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나의 말에 동의한 도진은 제 뒷머리를 흩뜨리듯이 만지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잡념과 악념을 모두 털어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나는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 서점 옆을 훔쳐보았다. 오늘은 아예 아무도 없는 것인지 이젤조차 보이지 않고 안은 어쩐지 시간을 거스르는 것처럼 매우 어둡기까지 하다.


“있잖아. 기억하지?”


시집을 도진에게 돌려주며 나나가 자신의 얼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도진을 이끌었다. 그쪽으로 용건이 있을 줄 알았던 그녀가 가리킨 곳에 정작 공연(空然)한 허공만이 가득하니, 의심스러워진 도진은 반문하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데, 왜요?”

“혹시 그때 그 사람 말이야. 누군지 알아? 화가라던데.”


나나는 그가 유명한 화가라고 했던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동안에 당혹스러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지만 막상 휑한 안을 쳐다보니 마침내 그 생각이 났다. 화실 안을 전부 보여주는 투명한 유리창과 다르게 그 안을 감추고 있는 하얀 벽을 보는 순간의 일이었다.

도진이 대답하기에 앞서 나나는 그것을 보고 그 화가가 참으로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얼마나 유명하고 또 그의 작품은 얼마나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든 간에 저렇게 속을 모두 보여주는 것처럼 문은 유리로 만들었지만, 막상 들어가서 보면 커다란 벽이 가로막고 있는 정경을 보아하니 그리 생각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 화가는 솔직하지만 정직하지는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정작하지만 솔직하지도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아니어서, 유리창은 단지 깨끗해지고 싶은 그의 열망을 담아내는 건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어요. 화풍은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제가 미술사를 배울 때도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잘 다루지 않았고 저 역시 그렇게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분인지 나나 씨에게 이야기할 수 없네요.”


애석하게도 그의 이름은 그가 다시 나타나거나 그를 다시 생각하기 전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도진의 난처한 대답에 나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아예 화실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몰라도, 그가 어떤 사람이리라는 것을 꼭 간파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성공한 화가긴 한 것 같던데요. 작품 값도 꽤 비싸게 받을 거라고 그런 비슷한 말씀도 하셨으니, 다음에 그분이 안 계셔도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아······ 서점에 가서 물어보고 올까요? 두 분이 친하신 것 같은데.”


도진이 검지로 서점의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나나는 그 손가락을 직접 접어주며 그를 말렸다.


“됐어. 별로 안 궁금해. 그런 사람 이름.”

“왜요? 궁금해서 물어본 거 아니었어요?”


나나의 만류에 어쩔 수 없이 서점으로 가려던 마음을 접은 도진이 몹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나는 이곳에 더 머물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기 위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곧 도진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녀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니야.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져서. 그런데 이젠 별로 궁금하지 않아. 그리고 작품 값을 넉넉히 받는다고 해서 꼭 성공한 화가는 아니야.”

“그럼 나나 씨는 시대를 별로 믿지 않는군요.”

“시대를 믿지 않는다고? 그렇게까지 멀리 나갈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네. 이곳에 사는 화가들이 대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생활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죠. 저도 잘 모르지만, 예술을 하는 건 정말 힘들거든요.”

“그렇다면 세계나 월계나 예술은 다를 바가 없네.”


도진은 나나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묘안이 떠오르기라도 하였는지 가든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한 거 아닐까요? 사람의 마음은 결국 똑같으니까요.”


입을 다물고 그 말뜻을 되새겨본 나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그렇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도진의 뜻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으나 굳이 나서서 부정하고 싶지 않은 의견이었기에 그녀는 정말로 입을 다문 것이었다.


“제가 별로 못미더운 소리를 한 것 같네요.”


그 눈치를 알아채고 도진이 말했다. 결연한 의지 없이 한 대답은 너무 쉽게 들통나고 말았다. 하지만 나나는 자신이 도진의 생각에 반대한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니야. 네 말이 맞아.”


이상하게도 허무감이 들었다. 모든 것을 비우는 허무감이 아니라,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내쫓고 마는 허무감이었다. 그것을 쫓아내려고 하다가는 나 자신이 내쫓기고 말 것 같은 아주 위험한 허무감.


“아무튼 이름도 모르고 그림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이런 말을 꺼내기 좀 그렇지만,”


그래서 그녀는 결국 말을 돌려 다시 화가에 대해 언급했다.


“저 사람이 별로라는 건 잘 알겠어.”


굳이 나나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지 않더라도 도진은 그녀가 이름 모를 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름 모를 화가라고? 도진은 나나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름 모를 화가. 제목 없는 시. 누군지 모르는 시인. 전문가도 잘 모르는 곧 폐기될 뻔했던 시집. 이것이 한 데 얽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그냥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뭘? 저 사람을?”


하던 이야기에 하는 대답인 줄 알고 나나가 슬쩍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도진은 그녀가 이해한 게 아니라는 눈짓을 보이며 대신 새로운 질문을 하나 그녀에게 건넸다.


“나나 씨. 왜 저 분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응? 그냥······ 설명을 할 것까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그러고 싶어졌어. 막상 아무도 없는 화실을 보고 있으니까 흥미를 잃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 비관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기분이 들었거든.”


뒤이어 느꼈던 허무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했는지 도진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나 씨. 부탁이 하나 있어요.”

“무슨 부탁?”


갑자기 불안감이 나나에게로 엄습했다. 저 혼자 두고 세 명의 성인을 따라가던 도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애써 지워가며 나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용건이 뭔지 듣기 위해 기다렸지만 도진은 눈을 올곧게 뜨면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는 않았다.


“뭔데 그래?”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다시 물으니 도진은 어깨를 한번 들썩거리고 부탁이 뭔지 밝혔다.


“우리, 교수님께 이제 백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해요.”

“왜? 당장에 시집이랑 백면에 대해서 전부 이야기해야 되지 않아? 게다가 저자가 누군지 밝히는 연구를 한다는데······”


당황한 나나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조급해지자 도진은 미안하게도 그녀의 말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었다.


“나나 씨가 저 화가 분의 이름을 몰라서 그게 궁금해지다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죠?”

“그랬지. 하지만 그거랑은 다르잖아. 우린 지금 적극적으로 그 교수님을 말려야 할 때라니까.”

“그렇지 않아요.”


도진은 안수가 스스로 돌아오게 할 작정이었다. 안수가 스스로 자신이 원래 추구하던 목적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이다.


“교수님도 자연히 그렇게 되실 거니까요.”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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