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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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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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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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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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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DUMMY

오늘 저녁 무렵에 열리기로 예정된 문학제가 금주에 있는 마지막 세미나였다. 시작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약 삼십 분 정도로 넉넉히 남았음에도 야담은 기어코 한 시간이나 먼저 와서 가장 끝자리를 사수했다. 그리고 그 옆은 초영이 꿰차고 있었기에 그들이 붙어 있는 그림은 상당히 낯선 풍경을 자아냈다.

야담이야 두 어깨에 무개를 실으며 짐짓 점잖고 엄숙하게 굴어 보였으나 초영은 영 그러지를 못했던 것이다. 결국에 야담은 놀이공원에 온 아이마냥 사방을 둘러보는 그녀의 귀에 작게 소곤거리며 주의를 주었다.


“남들이 너를 수상하게 보는 게 안 보이나 보군.”

“어머, 그럴 리가.”


초영은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며 예쁘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마음이 읽히지 않는 사람이 있나 보려던 거였어. 세미나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탐색 좀 하려는 거지. 고작 이런 일로 남의 눈치를 보면 되겠어?”

“그렇게 하다가는 상대방이 오다가도 도로 달아나겠군.”

“그러면 오히려 좋지. 적어도 상대가 누군지는 잘 보일 거 아니니?”


야담은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비비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이를 놀리듯이 쳐다보던 초영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본 다음에 이번에는 제 쪽에서 먼저 야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번에는 올 거 같은 예감이 들지 않니?”

“확신하지 마라.”

“확신이라니. 천만의 말씀. 나름의 근거를 갖고 하는 말이야.”


의기양양하더니 초영은 앞에 무대 위에 걸린 현수막을 가리켰다. 현수막에는 <제2회 명경 문학제 ⎯ 현대시의 문학성 제고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써져 있어서 이곳에 사람들이 왜 모여들었는지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 이름이 명경(明鏡)인 기념으로 거울을 소재로 삼은 시는 모조리 언급할 예정이라고 하니까 분명히 오지 않겠니? 둘 중 한 명이라도 말이야.”

“글쎄. 솔직히 오늘은 그런 목적으로 온 게 아니다.”


야담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줄 조금도 몰랐던 초영이 다소 놀란 투로 “그러면?”이라고 물었다. 야담은 슬쩍 주변에 자신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어차피 그쪽에서 이미 백면의 내생인 정안수에게 접근했다면, 오늘은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커. 오늘 강연자 중에 한 명이 그 대학 교수인 권기현이니까.”

“그래? 그럼 가능성이 낮아지긴 하네. 하지만······ 몰래 와서 듣고 갈 수도 있잖아.”

“아니.”


단답으로 대화의 맥을 끊은 야담이 팔짱을 낀 두 팔을 책상 위에 얹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마침 사회자가 준비를 마치고 들어온 때였다.


“이미 궁금한 건 그전의 만남에서 모두 캐냈을 거다. 다만 그때에 소득이 있었건 없었건 오늘 다시 이곳으로 권기현을 찾아와야 할 만큼 새로운 용건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


이후 사회자의 저렁거리는 목소리가 강당에 울렸다. 간단한 인사말과 발표자에 대한 소개가 끝이 나고 오늘의 강연자인 권기현이 무대 위로 나타나 허리를 숙였다. 수많은 경험으로도 새로운 경험 앞에 맞설 수는 없었으므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그는 살짝 떨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내는 순간에 그는 곧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거울을 소재로 삼은 고전시를 몇 편 가져오는 것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미나는 끝까지 주제에 충실했다. 청중의 흥미를 끌기 위해 쓰인 고전시는 순전히 비교를 위한 것이었다.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 ‘거울’이라는 소재가 ‘자아탐색’과 깊은 연관을 맺고 화자 혹은 자아가 자신을 깨닫는 촉매제로 쓰이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언급할 즈음에 드디어 『거울 나라』가 등장했다.

하지만 현대문학에 있어서 또 그보다 더 좁은 범위인 현대시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효시로서 쓰였기에 금방 지나치고 말았다. 더군다나 권기현은 이 시집이 작자 미상이라는 점에서 완전한 효시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입장을 넌지시 비치기도 했다. 그가 비중 있게 다룬 작품들은 그 뒤로 이어져 가장 최근에 가까워지는 현대의 시점에 쓰인 시편들이었다.

어쩐지 얻을 것이 없단 결론에 이르게 된 초영이 옆자리의 야담을 눈으로 흘겼다. 그도 기대와는 한참 다른 세미나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긴장되었던 얼굴을 점차 싸늘하게 굳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헛걸음을 했군.”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이 진행되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자신들이 나온 문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욕지거리라도 할 것처럼 사나운 눈매를 한 야담은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단 생각에 몹시 괴로운 심정으로 건물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작자 미상이라서 불완전하다는 것도 우리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니까. 백면이 썼다는 걸 속세에 알릴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다.”


애써 머리를 굴려서 해본 제안이 차갑게 거절당하자 본디 섭섭하던 차에 더욱 실망한 초영은 먼저 걷는 야담의 뒤통수를 몹시 노려보았다.


“참. 주화랑 화해하려고 하는 건 어떻게 된 거니? 야담, 네가 우리보다 빠르게 떠난 이유였잖아.”


그래서 상대방을 순순히 둘 수 없던 그녀는 야담이 가장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껄끄러이 여기는 주제를 불러들였다. 단지 그를 골탕 먹이려는 작정으로만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썩어가는 천일나무로 인해서 심연도에 머무르려고 하는 주화와 황호와 녹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야담이 요즘 부딪힐 일이 없었기에 최근 그들의 관계가 어떤지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게 별로 중요한 문제 같지는 않은데.”


역시나 야담은 그녀의 예상대로 문제를 회피하려고 들었다.


“중요하지 않다니. 너한텐 그게 제일 중요해.”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군.”

“그건 네가 대는 핑계고. 우리의 앞날이 어떨지 모르는데, 그런 미련을 만들어놓고 떠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야담은 최근에 들어 이 문제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민해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가 황호와 시집 문제로 가장 많이 궁리하고 파고들었기에 타당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녹수를 찾으러 먼저 떠나서 어딘가에서 무슨 일을 겪었다. 그리고 돌아오더니 아무 소식도 알리지 않고 일을 먼저 꾸몄다. 어차피 난편해진 분위기를 서둘러 바꿀 필요도 없이, 이참에 다 끄집어내기로 초영은 결심했다.


“너 혼자 떠났던 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러고 보니 아직 그 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한 게 없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참 이상하기는 해. 네가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 일에 나선다는 게. 황호를 잡으려고 하고, 또 어제는 황호가 배신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 사람도 무려 너였어. 원래도 그러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말도 더 짧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야 하지 않겠니?”


우리에게도 이제 운명이 생긴 마당에, 우리가 한 배를 타고 있단 것도 좀 알아둬야지. 저마다 나서서 사공을 자처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을 테다. 그런데도 야담이 끝까지 함구하려는 까닭을 짐작할 수 없었다.


“좋은 이야기였으면 진작에 했겠지. 그렇지 않은 데에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여겨주면 고맙겠군.”


야담은 제 구두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여전히 돌려 말하면서 자신의 진심은 드러내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동작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럼 그 이유라도 말해줘야 하는 게 도리 아니니? 백면만 해도 그래. 그 애가 시를 지었다는 것도 모르는 바람에 우린 제목이 없는 한 시에 원래부터 제목이 없는 게 맞는 작품인지 제목이 없는 작품인지도 모르게 됐잖아. 네가 입을 다물수록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모르게 되는 거야.”


초영은 두 팔을 가득 벌려 야담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약감의 힘을 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아직 건물 안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기에 주변은 고요하다.


“뭐든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 죄는 개인의 몫이겠지만, 벌은 늘 함께 당하는 거니까. 그게 보상이든 형벌이든.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백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도 그 애가 혼자 짊어져야만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네.”

“뭐를 말하는 거지?”


초영은 야담을 품고 있던 팔을 풀며 그와의 적정한 거리를 확보했다. 그녀의 위로가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도 다소 누그러진 표정의 야담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 말이야.”


백면에게 사랑이 있었던가. 기억을 아무리 뒤집어 보아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야담이 혼란스러움에 시야가 흔들리는 동안에 초영이 등지고 있는 방향에서부터 누군가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바닥에 아주 조심스럽게 닿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신중하게 다가오는 몸짓이었다. 그는 저들이 자신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에 아주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오랜만이군.”


초영의 예감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정녕 이들은 자신들을 직접 만나러 온 데다가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를 만나고 말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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