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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난세의 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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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검향
작품등록일 :
2024.05.19 17:44
최근연재일 :
2024.06.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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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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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17,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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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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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난세의 시발

DUMMY

1


중평(中平) 6년(서기 189년) 4월 병진일(丙辰日), 양력 5월 13일 영제(靈帝)가 서른네 살의 젊은 나이로 붕어했다. 영제 소생의 아들 대부분이 어려서 죽고, 남은 아들은 하진의 누이인 하황후(何皇后)가 낳은 변(辯)과 하황후에게 독살당한 왕미인(王美人)이 낳은 협(協)뿐이었다.


영제는 병이 깊어지자, 동탁에게 칙서를 내려 병주목(幷州牧)으로 삼았고, 죽기 전에는 건석에게 협(協)을 부탁했다. 영제가 죽자, 건석은 먼저 하진을 죽이고 협을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결국 그 음모가 발각되었다.


하진은 외부로 피하였다가 마침내 정권을 잡았으며, 4월 무오일(戊午日)에 하황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가 되는 유변(劉辯)을 즉위케 하고, 유협(劉協)을 발해왕(勃海王)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진류왕(陳留王)으로 옮겨 책봉했다.


하황후는 태후(太后)로서 섭정하면서, 후장군 원외(袁隈)를 태부(太傅)로 삼고 대장군 하진과 함께 녹상서사(錄尙書事)를 겸하게 하였다. 하진이 조정의 권력을 잡으니, 원소가 하진에게 상군교위(上軍校尉) 건석을 포함하여 모든 환관을 죽이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하진이 우유부단했던 데다가 하태후가 건석을 싸고도니, 마침내 그 일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하진은 가문과 명성이 훌륭한 중군교위 원소와 그의 이복아우 호분중랑장 원술(袁術) 등을 조아(爪牙)로 삼고, 천하에 이름이 높은 선비 하옹(何顒)을 북군중후로, 정태(鄭泰)를 상서(尙書)로 삼아 그들과 매사 의논하였다.


​건석은 하진을 죽이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중상시(中常侍) 조충(趙忠)과 송전(宋典) 등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하진을 죽이자고 청하였는데, 하진과 동향인 중상시 곽승(郭勝)이 음모를 눈치채고 하진에게 이 일을 밀고하였다.


하진은 황문령(黃門令)에게 명령하여 건석을 체포하여 죽이게 하고, 서원팔교위의 둔병(屯兵)을 모두 장악하였다. 하진은 진류왕 유협을 싸고도는 동태후(董太后)와 그 아우 동중(董重)을 눈엣가시로 여겼으므로, 표를 올려 동태후를 애초에 영제가 해독정후(解瀆亭侯)였을 때 살았던 하간국(河間國)으로 내쫓고, 동중을 체포하여 하옥하였다.


얼마 후 동중은 자살하였으며, 6월에는 동태후가 갑자기 죽었는데, 민간에서는 하태후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써 민심이 하진을 떠나게 되었다.


사례교위 원소가 매번 하진에게 환관을 일소하라고 진언하자, 하진은 하태후에게 중상시 이하 환관들을 모두 파직하고 그 자리를 좌서(左署), 우서(右署) 및 오관서(五官署) 등 삼서(三署)의 낭(郞)으로 채우자고 아뢰었다.


그러나 환관들에게 둘러싸인 하태후는 오라비 하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환관들이 하진의 아우 표기장군 하묘와 태후의 모친 무양군(舞陽君)에게 뇌물을 가득 보내 목숨을 애걸했다. 이에 하묘와 무양군은 눈앞의 재물에 미혹되어 하태후에게 하진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니, 어리석은 하태후는 하진의 말을 더욱 듣지 않게 되었다.


​원소는 계책이 틀어지자, 지방의 장수들에게 병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올라오게 하여 태후와 환관들을 위협하여 뜻을 이루자고 진언하였다. 대장군부의 주부 진림(陳琳)이 반대하였으며, 전군교위 조조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주변의 믿는 사람들에게 하진이 실패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어지러운 도성의 상황을 간혹 전해 들으며 간옹은 예하 군을 닦달하여 더욱 군사 조련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다. 최소 군마다 2만 이상의 군사를 양성하여 절반은 청주 주목에게 보내도록 조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탁은 병주의 군대를 하동군(河東郡)으로 돌려 시세를 관망하는 중이었다. 이때 하진은 원소의 진언을 받아들여, 지방의 장수들에게 병사를 이끌고 경사로 들어오게 하여 환관의 세력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 명령이 승냥이처럼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동탁에게도 이르니,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한 그가 낙양을 향하여 서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뜻있는 사람들은 동탁의 성정을 잘 알았으므로 그를 도성으로 불러들이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은 시어사(侍御史) 정태(鄭泰), 기주 목에서 상서로 이전한 노식 등이었다.


하진이 듣지 않으니 정태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버렸다. 대장군부 연리(掾吏) 왕광과 기도위 포신(鮑信) 등은 태산군(泰山郡) 사람이었는데, 하진에게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병사를 모집하자고 진언하였다. 하진은 그 말을 옳게 여겨 포신과 왕광을 태산군으로 보내 각각 병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그 결과 ​왕광(王匡)이 먼저 강노병(强弩兵) 500명을 모집하고 상경하여 하진을 보위했으며, 포신은 병사 모집이 늦어 하진이 살해된 다음에야 낙양에 도착했다.


하진은 동탁의 입성이 늦어지자 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동군태수(東郡太守) 교모(橋瑁)를 징소하여 하남군(河南郡) 성고현(成皐縣)에 주둔하게 하고, 하내군(河內郡)에 주둔한 기도위 정원(丁原)을 무맹도위(武猛都尉)로 바꾸어 임명하여, 낙양과 가까운 하내군의 맹진(孟津)으로 옮겨 주둔케 하였다.


하진이 정원에게 군사 수천 명을 풀어 하내에 도적이 있는 것처럼 하여 소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하진이 아뢰기를, 십상시가 흑산적과 연계되어 있으니 마땅히 조충(趙忠) 장양 등을 주살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하태후는 듣지 않았다.


하묘는 환관들에게 많은 뇌물을 받았으므로 하진을 달래어 십상시들과 화목할 것을 권하였다. 정원은 하진의 지시를 잘 따른 보상으로 집금오(執金吾)로 승진하여 낙양성의 외곽을 순시하는 중책을 맡았다.


애초에 하진이 환관들의 세력이 큰 것을 근심하여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장수들을 불렀는데, 맨 먼저 응한 자가 바로 동탁이었다. 동탁이 낙양으로 들어오기 전에, 환관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하태후의 명령을 빙자하여 하진을 불렀다.


하진의 수하들이 들어가지 말도록 청했으나. 어리석은 하진은 자신의 위세를 믿으며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태후궁(太后宮)에 들어갔다가 환관들에게 목이 잘렸다. 대장군부의 장수 오광과 장장(張璋) 등은 하진이 살해된 것을 알고 호분중랑장 원술과 함께 궁궐을 공격하였는데, 마침 날이 저물자 원술이 남궁의 청쇄문에 불을 질렀다.


장양, 단규(段珪) 등의 환관들이 태후와 어린 황제 및 진류왕 등을 동반하여 북궁으로 달아났다. 상서 노식이 창을 잡고 이들을 공격하니 장양 등이 태후를 풀어주었다.


​원소는 숙부 원외(袁隗)와 의논하여 장양의 패거리를 숙청하였고, 오광과 장장 및 봉거도위(奉車都尉) 동민(董旻) 등은 하진의 아우 하묘의 배신을 벌하여 그를 죽였다.


애초에 거기장군 하묘는 모친 무양군(舞陽君)과 함께 십상시가 바치는 뇌물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하진이 십상시를 제거하려 하자 누이 하태후에게 간언하여 이를 막게 하고, 또 하진에게도 십상시를 해치지 말 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오광 등은 하묘가 하진의 피살에 책임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오광은 평소에 하묘가 하진과 같은 마음이 아닌 것을 원망하였는데, 또 그가 환관들과 함께 모의하였다고 의심하여, 이에 군중(軍中)에 영(令)을 내어 말했다.


“대장군을 죽인 자는 곧 하묘인데, 병사들과 군리(軍吏)들은 능히 원수를 갚을 수 있겠는가?”

하진이 평소에 인애(仁愛)와 은덕(恩德)이 있었으므로, 사졸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죽기를 원합니다!”

오광이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동탁의 아우 봉거도위 동민과 더불어 하묘를 공격하여 죽이고 그 시체를 금원(禁苑)에 버렸다.


​원소가 드디어 북궁의 문을 닫고 안으로 침입하여 환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니, 살해당한 자가 2천 명이 넘었다. 환관이 아니었으나 수염이 없어서 죽임을 당한 자도 숱하게 많았으며, 그중에서는 환관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아랫도리를 벗어 보이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한번 피를 본 원소, 원술 및 오광의 병사들은 궁궐 곳곳에 불을 지르고 궁녀들을 겁탈하며 금은보화를 탈취하는 등 북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환관 장양과 단규 등은 황제 유변과 진류왕 유협을 인질로 삼고, 북문을 빠져나가 황하의 나루터인 소평진(小平津)에 이르렀다. 공경들이 모두 평락관(平樂觀)으로 나아갔으나 황제의 일행을 뒤쫓지 못하였는데, 노식만이 말을 달려 밤에 황하에 이르렀으며, 하남윤 왕윤(王允)이 중부연(中部掾) 민공(閔貢)에게 노식의 뒤를 잇게 하였다.


민공이 소평진에 이르러 칼을 들어 몇 명을 참하니, 남은 자들은 모두 황하에 뛰어들어 죽었다. 다음날 공경과 백관들이 모두 천자를 봉영(奉迎)하였는데, 기회를 노리던 동탁이 군대를 거느리고 천자를 맞아 호위하여 입궁하였다. 민공은 이 공적으로 지방의 일개 연리에서 발탁되어 조정의 낭중에 임명되고 도정후(都亭侯)에 책봉되었다.


중평(中平) 6년(서기 189년) 8월, 동탁은 신료들을 모으고 폐립(廢立)을 의논하였는데, 상서 노식이 결사 반대하였다. 동탁은 원래 노식을 싫어하였으므로 이 기회에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평소에 노식을 아끼던 채옹이 말려서 그만두고 다만 관직만을 빼앗았다. 노식은 세상에 뜻을 잃고 유주 상곡군(上谷郡)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중평(中平) 6년(서기 189년) 9월 첫날, 동탁은 기어이 유변을 폐하여 홍농왕(弘農王)으로 삼고, 유협을 제위에 올렸다. 하태후를 영안궁(永安宮)으로 옮겼다가 이틀 후에 짐독(鴆毒)으로 살해하였다.


며칠 후 동탁은 태위 영유주목(領幽州牧) 유우(劉虞)를 대사마(大司馬) 영유주목(領幽州牧)으로 바꾸어 임명하고 양분후(襄賁侯)로 고쳐 책봉하였으며, 스스로는 태위 영전장군사(領前將軍事)가 되었다.


이어서 조정에서 신망이 높은 태중대부(太中大夫) 양표(楊彪)를 사공(司空)으로 삼고, 예주목(豫州牧) 황완(黃琓)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아울러 당고지화(黨錮之禍)에 연루되어 죽은 진번(陳蕃)과 두무(竇武) 등을 복권(復權)시키고 그 자손들을 기용(起用)하여 사대부들의 신망을 얻었다.


동탁은 이어서 상국(相國)이 되었는데, 상국은 승상(丞相)과 같으나 그보다 더 존귀한 명칭이었으며, 전한의 개국공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등 몇 명 이후로는 그 칭호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런 다음 천하의 사대부와 처사(處士)들을 대거 징소하고 조정의 대소 관직과 지방의 주목(州牧) 및 태수에 새로운 사람들을 기용하니, 일시적으로 새로운 바람이 이는 듯하였다.


한양군(漢陽郡) 사람 주비(周毖)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여남군(汝南郡) 사람 오경(伍瓊)을 시중(侍中)으로, 하남윤(河南尹) 사람 정태(鄭泰)를 상서(尙書)로, 남양군(南陽郡) 사람 하옹(何顒)을 상국부(相國府)의 장사(長史)로 삼았다. 처사(處士) 순상(荀爽)은 처음에 평원국(平原國)의 상(相)에 임명되었다가, 부임하는 길에 광록훈(光祿勳)으로 발탁되어 구경(九卿)의 반열에 오르고, 사흘 만에 사공(司空)이 되니 고금에 없던 일이었다.


진식(陳寔)의 아들 진기(陳紀)를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으로 삼고, 한융(韓融)을 대홍려(大鴻臚)로 삼았다. 공주(孔伷)를 예주목(豫州牧)으로, 상서(尙書) 한복(韓馥)을 기주목(冀州牧)으로, 시중(侍中) 유대(劉岱)를 연주목(兗州牧)으로 삼고, 장막(張邈)을 진류태수(陳留太守)로, 장자(張咨)를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삼았다.


* * *


위와 같은 많은 인사 발령 속에서도 간옹과 유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사 조치도 없었고, 동탁 자신이 거느리는 장수들 또한 승진시키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동탁이 비록 포악하고 음흉하였으나 시류와 인심을 잃지 않았고, 이때만 하더라도 자못 옛 권신(權臣)들의 흉내를 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동탁의 본성이 곧 드러나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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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77 나본좌
    작성일
    24.06.28 19:41
    No. 1

    지난 화부터 갑자기 쓰는게 달라졌네요 마치 구무협 소설을 보는 듯한 왜 이럼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또끼슈끼럽
    작성일
    24.06.28 22:16
    No. 2

    ^^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매검향
    작성일
    24.06.29 11:12
    No. 3

    나본좌님!
    당시의 상황 설명한 한시적으로 그렇고 곧 예전 그대로 돌아갑니다.
    감사, 감사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또끼슈끼럽님!
    감사, 감사드리고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 되세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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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전위를 수하로 NEW +4 21시간 전 247 15 13쪽
41 반동탁연합 +4 24.06.29 342 14 13쪽
» 난세의 시발 +3 24.06.28 394 13 12쪽
39 인재는 많을수록 좋다 +4 24.06.27 445 11 20쪽
38 단양병 & 태사자 +4 24.06.26 466 15 12쪽
37 청주 목으로서 +3 24.06.25 491 13 12쪽
36 그래도 웃자 +5 24.06.23 541 17 13쪽
35 문무 겸비 충절의 무장 +2 24.06.22 545 14 13쪽
34 채문희, 정희 +4 24.06.21 547 13 12쪽
33 겹경사 +7 24.06.20 561 13 12쪽
32 기계, 기책 +2 24.06.19 580 13 13쪽
31 미양 출전 +3 24.06.18 600 16 12쪽
30 장재, 장재, 인재 +2 24.06.16 639 13 12쪽
29 국고와 중장을 가득 채울 비책 +4 24.06.15 638 13 12쪽
28 논공행상 +2 24.06.14 644 17 13쪽
27 때로는 손을 비빌 필요도 있다 +2 24.06.13 658 15 12쪽
26 대공을 세우다 +4 24.06.12 677 15 12쪽
25 대공을 세우다 +2 24.06.11 687 15 13쪽
24 출전 준비 +2 24.06.09 703 14 11쪽
23 웅비를 위한 첫발 +5 24.06.08 708 15 11쪽
22 태수가 되다 +2 24.06.07 718 16 11쪽
21 혼인 +2 24.06.06 723 16 10쪽
20 신부감 +2 24.06.05 723 14 10쪽
19 신부감 +2 24.06.04 724 15 11쪽
18 순욱 +2 24.06.02 726 15 11쪽
17 평준령(平準令) +2 24.06.01 726 19 11쪽
16 낭관(郎官) 중에서도 +2 24.05.31 729 17 11쪽
15 조정 출사 +2 24.05.30 730 16 10쪽
14 종요와 순유 +2 24.05.29 740 1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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