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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깨비 님의 서재입니다.

투신, 조선의 복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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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깨비
작품등록일 :
2023.06.02 12:24
최근연재일 :
2023.07.21 19:10
연재수 :
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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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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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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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8화 일부 종장...(Part 1)

DUMMY

< 일부 종장 >






종서가 객방 침상 위에서 두 눈을 떴다.

창밖에서 해가 넘어온 추이를 보아하니 얼추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대인 것 같았다.

종서가 몸을 반절쯤 일으킨 채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재생(再生) 능력 덕분에 상처 부위가 이미 말끔해진 상태였다.

도무지 오른팔에 뼈가 보일 만큼 자상이 입은데다 복부에 칼이 관통한 바 있는 몸뚱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양팔 가드(Guard) 잘 세우고 심장 보호에만 신경을 좀 쓰면 절대 죽을 일은 없겠네.’


종서가 심장을 쓸어내렸다.

그때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을 좀 입어. 눈 둘 곳이 없으니까.”


종서가 화들짝 놀라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아, 조장.”


연우였다.

그녀가 임오준이 있어야 할 침상 위에 앉아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종서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뭐라도 좀 걸쳐.”

“아, 미안해요.”


종서가 헐벗은 자신의 몸을 보며 허둥지둥했다.

그러자 연우가 바로 옆의 선반 위를 가리켰다.

누군가 준비해 놓은 웃옷과 머리 끈이 놓여있었다.

심지어 뽀송뽀송한 새 옷이었다.

종서가 황급히 그 옷을 챙겨 입고 산발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어쩐 일이시죠, 조장?”

“어쩐 일이라니. 그게 할 말이야? 지난밤에 부상당한 당신의 몸을 누가 살폈다 생각하는 거야.”

“그야 같은 방을 쓰는 임형(兄)이···”

“어림없는 소리하네. 임처사가 누굴 보살펴줘? 그 인간은 어젯밤에 나갔다 아직도 안 들어왔어. 보나마나 술판 아니면 도박판 아니면 매음굴에 있을걸.”


일전에 그랬듯 연우에게 또 신세를 진 모양이었다.

종서가 앞섶을 여미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번번히 고마워요.”

“인사치레 받자고 한 일은 아니야. 솔직히 확인하고 픈 게 있었을 뿐이야.”

“······?”

“이래봬도 청록회의 지원 조장이야. 이 객주에 내 수하가 제법 많이 있어.”

“그러면 수하들을 시키시지. 뭐하러?”

“딱히 뭐 시킬 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예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까. 그냥 웃옷을 벗기고 그 주위 핏자국만 조금 닦아냈을 뿐이야, 그게 다야.”


연우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해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슨 해명을 요구하는 건지 얼추 알 것 같았기에 종서가 애써 그 눈빛을 회피했다.

하지만 한 공간 안에 머무는 지금 그녀의 질문을 회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신, 혹시 요괴(妖怪)니?”

“···예에?”

“어떻게 상처가 저절로 회복되는 거지?”

“······”

“시구문 밖에서 주워 올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 전서에 분명 임처사가 머리통이 깨져 죽은 시신이라 했었는데··· 말끔했었어. 그때는 뭔가 착오가 있는 거라 생각했기에 넘어갔었는데··· 그게 아니야, 당신은···”


연우가 무언가를 알아챈 것 같았다.

하기야 두 눈이 박혀 있다면 칼침 맞은 종서의 상처가 이각(二刻:30분) 안에 저절로 아무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것 참 곤란한 일이었다.

타인과 자신의 일급 기밀을 공유한다는 거 생각보다 위험한 발상일 수 있었다.

종서가 급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럴 때는 그저···


“증거 있나요?”

“뭐어?”

“증거가 있나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각축장에서의 일은 생각이 나네요, 어렴풋이. 거기에 횃불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어두운 폐곳간의 내부였죠. 앞경기에서 워낙 유혈이 낭자한지라 거기 사람들이 다 착각을 한 것 같아요. 제 피가 흐른 것 마냥 또 제 머리통이 박살난 것 마냥.”

“임처사가 분명 전서에 당신의 머리가 박살났다라···”

“각축장의 구조를 아시나요? 당시 임형은 간이천막 안에 있었어요. 대전이 벌어진 모래판과 거리가 좀 있었죠. 하기야 가까이 있던 군졸들조차 착각했을 정도이니 멀리 떨어진 임형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었겠네요.”


연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무작정 아니라고 우기는 게 최고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의심하면 어쩔 거야. 오리발 내밀면 할말이 없을 텐데.’


하지만 일전의 일은 그렇게 넘긴다 하더라도 이번에 목격한 바가 있었기에 연우가 생각보다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각축장의 일은 내 잘 모르니 넘어갈게. 하지만 범고개의 일을 어찌 설명할 거지? 당신은 분명 칼에 베이고 찔려서 피범벅이 되어···”

“그건 제 피가 아니에요?”

“뭐어?”

“그건 다 바우의 피였죠. 제가 녀석의 어깨에 죽장검을 찔러 넣어 그 핏물을 옴팡 다 뒤집어썼거든요. 해서 그렇게 보일 수 있었겠네요.”


뻔뻔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이었다.

이에 연우 역시 황당하다는 듯 재차 자신이 목격한 바를 이야기했다.









“그 자의 날 선 칼날이 분명 네 오른팔을 베고 복부를 관통한 바야.”

“아니, 아니죠. 바우의 칼날은 제 오른팔을 살짝 비껴갔어요. 그리고 복부의 관통상은···”

“잘못 본 거라 말하고 싶은 거야?”

“···복부의 관통상은 아예 없었어요.”


변명이 갈수록 가관이었다.

연우가 참지 못한 나머지 고함을 확 질렀다.


“거짓말이야!”

“바우의 칼은 제 팔과 옆구리 사이를 통과한 것에 불과했어요. 그때 제가 잽싸게 오른팔을 내려 칼날을 고정시켰고 곧장 왼손으로 바우의 몸통에다 세 방을 꽂아 넣었죠.”

“지금 그걸 나더러 믿으란 거야?”


이에 종서가 거침없이 자신의 웃옷 앞섶을 풀어헤쳤다.

그가 자신의 맨몸을 내보이며 복부 쪽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세요. 지금 제 몸에 관통상이 있습니까?”

“그야··· 없어···”


연우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그래도 여인네인지라 계속해서 사내의 맨몸을 빤히 쳐다보기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종서가 앞섶을 다시 여미며 말했다.


“해 떨어진 산중이라 많이 어두웠어요. 겨우 횃불 하나 정도로 그 어둠을 다 밝힐 수 없는 노릇이었죠. 게다가 조장은 이삼십보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그 정도 거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 눈은 무슨 옹이 구멍인 줄 알아!”


연우가 계속해서 발끈했다.

종서가 양손을 휘휘 내저으며 물었다.


“실례지만 어디에서 보고 계셨죠, 정면? 아니면 측면인 가요?”

“뒤에서 보고 있었잖아.”

“저런, 저런, 저런··· 이삼십보 뒤쪽에서 목격한 거라면 상황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는 거리나 방향은 아니었네요.”

“위치가 조금 떨어진 데다 뒷모습만 본 건 맞지만···”

“여기에서 질문 하나 갈까요?”

“······”

“복부에 구멍이 뚫렸는데 저절로 회복됐을 가능성이 클까요? 아니면 그냥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누군가가 잘못 목격을 했을 가능성이 클까요?”


연우가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종서가 무작정 우겨대니 이제 본인도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야 후자일 테지.”

“빙고(Bingo),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한답니다.”

“······”


연우가 침묵했다.

이번 침묵은 조금 길었다.

아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몹시 애매하게 몰고간 종서로서는 당장 화제거리를 빠르게 전환할 필요성이 있었다.

종서가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다른 질문을 했다.


“그것보다 온성(穩城)에서 별 다른 소식은 없었나요? 그래도 하루 정도는 더 지난 것 같은데.”

“···그 일은 잘 됐어.”


연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찝찝한 마음이야 없지 않겠지만 증거 없이 더 캐물을 게 없었기에 종서에 관한 의구심을 일단 어물쩡 넘기는 모양새였다.

종서가 일부러 다른 질문을 더 퍼부었다.


“첫 청부업이라 확실히 알고 싶어서요. 얼추 상황 설명을 해줄 수 있나요? 지원조 하루에게서 전서는 도착했나요?”

“아, 그게 그러니까······”


연우의 설명은 개략 이러했다.

듣자 하니 온성의 도호부사 정성백은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상황 수습을 결정한 것 같았다.

군졸들로 하여금 야인 무리로 위장한 채 도망친 전투조 인원들의 뒤를 쫓는 한편 수문 경계 강화, 잔여 세력 수색 등 사후 처리를 하루만에 깔끔하게 끝마친 모양이었다.

피해가 경미하다 판단한 것인지 군사적 차원의 대규모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피해 지역이 내성의 민가가 아닌 외성 노비들의 거처 관외채 하나 뿐인지라 그런 결정을 내린 것도 같았다.

그리고 임오준과 김강의 시신 바꿔 치기 역시 전혀 의심받지 않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그들의 이름은 노비 명부에서 깔끔하게 삭제가 된 바였다.

때문에 지금 두 사람은 작금의 조선 땅에 존재하지 않는 귀신 신세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축성장 노비 노릇이나 하느니 그냥 귀신 팔자가 훨씬 더 좋아 보였지만···


“그나저나 김강 어르신이야 신분세탁, 아니 어차피 족보위조가 필요한 경우라지만 임형의 신분은 어찌하나요? 이천냥 때문에 멀쩡한 자기 신분을 버린 게 되었잖아요.”

“멀쩡한 자기 신분을 버려?”

“어쨌거나 임형은 양인이지 않습니까.”

“그건 가짜야. 임처사는 ‘이름이 없는 자’니까.”

“···이름이 없는 자요?”

“내가 임처사를 임오준이라 부르는 거 본 적 있어? 꼬박꼬박 임처사라 하잖아. 임씨인 거 빼면 다 거짓말이니까. 아니, 임씨인 건 맞나? 여하튼 다음에 만날 때는 임육준, 임칠준이 자기 이름이라 그럴 걸.”

“그렇다면 당신 역시 연우라는 그 이름은?”

“법명(法名)이야. 본명은 까먹은지 오래라 어차피 그게 그거야. 검계에서 본명을 밝히는 사람은 잘 없어. 우리는 점조직이니까. 이름 뿐만이 아니야. 같은 계(契) 소속이라 하더라도 평생 가야 얼굴 한번 못 보는 경우가 태반일 거야.”


이름과 신분이 가짜다.

조선시대에 이처럼 익명성이 보장된 조직이라니, 제법 신박한 방법이었다.

과연 이 검계(劍契)란 조직, 포도청에서조차 애를 먹는 비밀 결사라 자부하더니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는데 도가 텄는지 여러가지 장치를 구비해둔 모양이었다.

연우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 하루와 벌써 친해진 모양이야.”

“일전에 본 하루 말입니까?”

“그래, 둘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그 짧은 만남 동안에.”

“그게 무슨 말인지요?”

“하루의 전언이야. 무사히 잘 전달했다. 하나는 하옥되었으며 하나는 산사(山寺)에 쫓겨날 예정이다··· 이거 설마···”

“좋았어! 하루가 일을 아주 잘하네요.”


종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인지 속시원한 전언이 아닐 수 없었다.

연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잿가루 좀 뿌렸어요. 은혜는 못 갚아도 빚진 건 반드시 갚아준다. 얼추 그런 거죠.”



***



이방 유정이 관아 정청에 올랐다.

그는 복도를 걷다가 왼쪽 방안에 들었다.

그곳은 온성 도호부사 정성백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정성백이 상석 자리에 앉아 한쪽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무척 무거웠다.

유정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채 문 앞에 서서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정성백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왔으면 기척을 좀 하지 않고서.”


무슨 근심이 그리 많은 지 목소리가 가라앉은 상태였다.

유정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고뇌에 빠져 계신 듯 하여 차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고뇌는 무슨 얼어 죽을··· 하, 제 집안 단속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위인이···”


정성백이 찌푸린 얼굴로 냉소했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책상 위에 서림의 치부책 하나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병방의 집구석에 가서 더 뒤져보았나? 뭐가 더 나왔어?”

“각축장 경영, 치부책 명부, 고리대 내역 심지어 축성장 죄인들의 집안에 금전을 요구하고 갈취한 정황까지 다 입수했습니다. 더러 공란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밝혀진 죄만 취합하더라도 충분히 파면할 만합니다. 아니 죽어 마땅한 죄일 것입니다.”


정성백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손으로 얼굴을 뒤덮었다.


“그런 자를 이제껏 육방 중 하나라 중용했었다니. 지난밤 외성이 뚫리고 야인 무리가 침범해 준동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 하겠구나. 이제껏 행정과 치안을 소홀히 한 적 없다라 자부해왔건만. 살쾡이 놈에게 어물전을 맡긴 격이 아닌가.”

“소인 놈의 불찰이오니 죽여주소서.”


유정이 쩔쩔매며 읍소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정성백은 체념한 듯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애꿎은 이방을 탓해 뭐하겠나. 본관은 행정도, 치안도 제대로 단속치 못한 무능력한 관리야. 어디 그 뿐인가. 집안도 단속치 못한 무책임한 아비지.”

“어찌 그런 황망한 말씀을 하옵니까.”

“됐네, 됐어. 서림은 지금 어디에 있나?”

“이미 하옥한 바입니다.”

“그럼 더 볼 거 없겠네. 파면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차후에 죄의 경중을 더 따져서 관노로 삼든, 목을 매달든 그 처벌을 더할 것이나··· 하아··· 그래, 그래··· 그 치야 그렇게 처리한다 치지만···”


정성백의 눈길이 치부책에서 십일 조장 문서 쪽으로 향했다.

그는 차마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정치수, 그 빌어먹을 개종자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도련님은 아직까지··· 가내(家內)에 계신 것으로···”


유정이 쭈볏쭈볏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정성백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치며 크게 불호령을 내렸다.


“도련님은 얼어 죽을! 내 그 빌어먹을 개종자 놈을 당장 산사(山寺)에 쫓아 보내라 하지 않았어!”


유정이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낮추었다.


“마님께오서 원체 정이 많은 분이온지라··· 생때같은 아들 중질 시킬 수 없다라 하시며 눈물을 뵈시는데 차마 소인 놈이···”

“대를 이을 자식이 어디 그 놈 하나뿐인가!”

“그래도 장자가 아닙니까. 본디 첫째 아들은 어미에게 각별한 법인지라 차마 천륜을···”


유정이 눈치를 보며 계속 말끝을 흐렸다.

정성백이 재차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내려치며 말했다.


“족보에 줄 하나만 그으면 죽은 놈이나 매한가지야! 어릴 적 두창(痘瘡)에 걸려 죽은 놈이라 여기면 될 일이지! 둘째가 첫째되는 일이 어디 별난 집안의 일이던가!”

“그래도 천륜이 아닙니까? 산사(山寺)에 쫓아 보내는 일만큼은 재고하심이··· 도련님께서 지난밤에 호되게 혼나셨으니 충분히 반성하지 않으셨을까...”

“가당찮은 소리를!”


여지없이 정성백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유정의 어깨가 크게 움츠러들었다.


‘하아, 마님이 어떻게든 해보라 하셨는데 이 일을 어찌한다.’


유정이 전일의 일을 떠올렸다.

장자의 비행을 알게 된 정성백이 크게 화가 난 나머지 사랑채 마당에서 검집을 들고 정치수의 온몸을 반시진 동안이나 한참 후드려 팬 바 있었다.


“아, 아버지! 자,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정실 부인, 둘째 아들 심지어 가노들조차 뛰쳐나와 정성백의 구타를 만류했었지만 감히 가장(家長)의 화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평생 귀하게만 자라온 정치수가 그날은 정말 복날 개 맞듯이 후드려 맞은 바 있었다.


“아, 아버지! 이러다 소자 맞아죽겠습니다! 제발 용서를···”


어쩌면 그가 오늘 가내를 떠나가지 못한 이유라 한다면 심한 구타를 당한 덕에 장독이 올라 크게 골병 든 탓도 없지 않다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달을 직접 목격한 유정이 마님의 당부 탓인지, 도련님에 대한 연민 탓인지 나름대로 최후의 변론을 해주었다.


“솔직히 소인 놈은 지난밤 갑자기 날아든 투서의 저의가 많이 의심스럽습니다. 대체 누가 왜 그런 투서를···”

“저의 따위가 중요한가?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지.”

“익명의 투서를 증거로 채택하여 도련님을 크게 핍박하시면 자칫 아랫것들이 그것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혹여 무분별하게 상전을 고발하는 일이 중구난방 벌어져서 차마 상하의 질서가 무너질까···”


정성백이 책상에 놓인 책과 문서들을 양손에 한 움큼씩 움켜쥐고 이리저리 격하게 흔들었다.


“악용이라 했나, 지금? 그 개종자 놈이 벌여 놓은 헛짓거리 좀 보게나! 과연 누구인들 원한을 갖지 않을까!”

“그것은 도련님의 연치가 어린 탓에 악한 무리의 꾀임에···”


정성백이 양손에 움켜쥔 책과 문서들을 신경질적으로 허공에 집어 던졌다.

겨우 일부 죄목에 불과할 테지만 무려 수백장에 달하는 책과 문서들이 집무실 내에 낙엽처럼 흩날렸다.


“아이구!”


유정이 얼른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흩어진 책과 문서들을 하나하나 다시금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성백이 홀로 독백하듯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국록(國祿)을 먹은 관리는 부정에서 눈 돌릴 수 없는 법이네. 앞서 말했듯 서림의 일은 국법에 따라 죄를 물어 엄정히 처벌할 것인즉.”

“그 일은 응당 그리하십시오.”


바닥에 널브러진 책과 문서들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유정은 대답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정성백이 잠시 뜸을 들이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자식 놈의 일 또한 예외가 아닐 것이야.”

“서림의 죄가 훨씬 더 중합니다. 필시 그자가 원흉일 겁니다. 그 자가 순진한 도련님을 꼬드겨 일을 크게 벌인 게...”

“아비의 이름을 등에 업고 쥐꼬리 만한 세를 내세워 유용(流用)한 죄. 축성장과 각축장을 사용(私用)한 죄. 관노비들을 함부로 죽음으로 내몰아 국가의 재산을 소모(消耗)한 죄··· 더 얘기해야 할까?”

“······”


유정이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정성백이 파르르 떨리는 두 눈을 지긋이 감으며 말했다.


“하나 본관 역시 어쩔 수 없는 한 집안의 가장(家長). 자식의 일은 천륜인지라 차마 국법(國法)이 아닌 가법(家法)을 적용한 것인즉. 그것이 부모가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온정이라 할 것일세, 이의 있나?”


당장은 크게 진노하여 자식을 산사(山寺)로 쫓아 보내는 비정한 아버지 같았지만 결국 피는 물보다 진한 법, 가족은 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국법이 아닌 가법(家法)을 적용함은 훗날 언젠가 다시 불러 환속시키고 용서해줄 여지가 있음을 은근히 시사하는 것일 수 있었다.

그제야 유정이 무언가 깨달은 듯 옳다구나하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가법(家法)을 적용함이 참으로 합당한 처분이라 할 것입니다.”

“그 망할 개종자, 금일 말 등에 묶어서라도 산사(山寺)에 쫓아 보내게. 앞으로 자식 놈 하나 없는 셈 칠 테니까.”


정성백의 마지막 말과 표정이 무척 씁쓸해 보였다.

아무래도 부모로서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게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작가의말

Part 1 살인 편은 여기서 끝

Part 2 탐욕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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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7화 논악 23.07.16 99 1 16쪽
40 16화 살인자(4) 23.07.14 90 1 13쪽
39 16화 살인자(3) 23.07.14 89 1 12쪽
38 16화 살인자(2) 23.07.12 89 1 14쪽
37 16화 살인자(1) 23.07.09 95 1 14쪽
36 15화 초하루(3) 23.07.07 96 1 16쪽
35 15화 초하루(2) 23.07.05 95 1 16쪽
34 15화 초하루(1) 23.07.02 103 1 18쪽
33 14화 사전답사(4) 23.06.26 103 0 15쪽
32 14화 사전답사(3) +2 23.06.25 108 0 14쪽
31 14화 사전답사(2) 23.06.19 105 0 16쪽
30 14화 사전답사(1) 23.06.18 110 1 14쪽
29 13화 청록회(2) 23.06.18 113 1 12쪽
28 13화 청록회(1) 23.06.16 119 2 13쪽
27 12화 비구니 +2 23.06.15 123 2 15쪽
26 11화 박투대전(4) +1 23.06.14 128 2 14쪽
25 11화 박투대전(3) 23.06.13 125 2 14쪽
24 11화 박투대전(2) 23.06.12 119 2 13쪽
23 11화 박투대전(1) 23.06.11 122 1 14쪽
22 10화 임오준(2) 23.06.11 127 1 17쪽
21 10화 임오준(1) 23.06.10 123 3 13쪽
20 09화 복수자(2) 23.06.09 129 3 14쪽
19 09화 복수자(1) 23.06.09 152 3 13쪽
18 08화 견여금석(2) 23.06.08 135 4 13쪽
17 08화 견여금석(1) 23.06.08 134 4 13쪽
16 07화 갑절복수 +1 23.06.07 136 4 14쪽
15 06화 일책 불사핵(4) +1 23.06.07 136 4 17쪽
14 06화 일책 불사핵(3) 23.06.06 139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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