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선물膳物
갑자기 울리는 박수소리에 무린은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그리 밝은 상황이 아니지만 대충 누구인지는 파악했다.
일남일녀.
아니, 정확히 설명하면 한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소녀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일노일소의 등장. 그 등장은 무린을 긴장하게 했다.
‘아무리 수련중이라지만, 기척도 없이?’
전장에서 갈고 닦은 기감은 무린의 주특기이자, 주 무기 중에 하나다. 그런데 무린이 눈치 채지도 못하게 등 뒤를 잡았다.
무린이 언제나 집단전만 참여한 건 아니었다.
척후전도 무린은 수도 없이 겪었다.
만약 지금 이 상황이 척후전이었으면? 무린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을 베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경각심이 곧바로 무린의 심신을 장악했다.
“누구십니까.”
날이 사르르 오른 목소리.
그런 목소리에 노인은 현재 무린의 상태를 짐작했는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허허, 미안하네. 훔쳐볼 생각은 아니었으나 자네가 너무 무아경에 빠져 대단한 무예를 보여주는 바람에 그만 구경하고 말았네. 정말 미안하네.”
“…….”
무아경?
그런 건 모른다.
단지, 무린은 저 늙은이와, 조용하지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궁장소녀의 정체가 궁금할 뿐이었다.
“누구시냐 물었습니다.”
창이 올라갔다.
그런 말에 무린의 경각심이 사라질리 만무했다. 아니, 오히려 더 커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리 경계하지 마시게. 지나가는 일행일 뿐이네.”
“…….”
무린의 눈이 좁아졌다. 그리고 노인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들어갔고, 동시에 눈으로는 노인과 궁장소녀를 살폈다.
하얀 장포를 걸친 노인은 평범한 체형이었다. 이렇다 할 큰 특징은 없었다. 그저 노인,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비춰지는 궁장은 비취색. 그리고 그 위에 하얀 털로 만들어진 목도리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
소녀도 특별한 건 없었다.
허나 무린은 그래도 경각심을 놓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겨눴던 창만 내려 바닥에 찍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저렇게 나오는데, 더 이상 창을 겨누고 있는 것은 확실히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이걸 보면 무린은 아직 전장의 물이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허허, 그래도 경계를 풀지 않는구먼. 이 보잘 것 없는 늙은이와 이 어린 아이가 그리도 무섭나? 허허허.”
노인은 무린의 눈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경계심을 읽었는지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에 무린의 대답은.
‘내 기척을 속여 놓고 보잘 것 없는 늙은이?’
“죄송합니다.”
속과 다른 대답을 내놓는 무린이었다.
“괜찮으이. 이해할 만 해. 아, 본인의 소개를 안했구먼. 이 늙은이는 태산아래에서 온 제갈 문인이라는 늙은이 일세. 그리고 이 아인 내 손녀인 제갈 려일세.”
제갈諸葛.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족一族.
중원천지, 만백성이 다 아는 성씨가 바로 태산 아래 제갈 성씨이다. 구구절절한 설명 따위 결코 필요 없는, 그런 성씨이다.
무린도 안다.
북방의 전쟁터를 전전했지만 아예 중원에 귀를 닫고 살았던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귀를 열고 주워 담았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한 게 아닌, 혹여 중원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세상 돌아가는 건 기본적으로 알아 둬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산동지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더욱 자세히 담아 들었다.
아니, 산동성에 대한 정보는 결코 빼먹지 않고 오히려 찾아 들었다. 그래서 무린도 잘 알고 있었다.
태산아래 제갈세가諸葛世家.
그 위명을 말이다.
군부에 힘을 합쳐 산동 반도에 가끔 나타나는 해적퇴치에도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니, 그냥 산동성 자체를 군부와 같이 지키고 있었다.
즉, 성城 자체의 수호자인 셈이다.
그래서 제갈세가는 산동성에 사는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만약 보통 일반인이었다면 아이고! 하면서 넙죽 엎드렸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린은 아니다.
“진 무린입니다.”
그저 담담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나 그런 무린도 변한 게 있었으니 바로 대놓고 보이던 경계심은 물론, 목소리도 많이 풀려 있었다.
무린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반응이었고, 그만큼 제갈세가가 존경받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진 무린이라…… 이름 하나 멋지구먼. 허허. 무슨 진자를 쓰나? 참 진자인가?”
“아닙니다. 진격할 진자입니다.”
“진격할 진이라…… 그럼 이름은?”
“무예 무자에, 짓밟을 린자입니다.”
“허, 허허. 그거 참 멋있지만 흉흉하구나. 허허허.”
“…….”
오늘만 두 번째 자기소개를 했고, 비슷한 대답을 들은 무린이지만 그저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름에 대한 큰 의미를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왜 이런 이름인지는 궁금할 따름이지만 그걸 알려줄 어머니는 이미 행방은 물론 생사도 불분명하기 때문에 알 길이 없었다.
“나는 글월 문文자에 어질 인仁자를 쓴다네. 이 아이는 고울 려麗자를 쓰고.”
“어질고, 고운 이름입니다.”
“허? 허허! 허허허!”
무린의 대답에 제갈문인은 웃었다.
무린이 이름에 빗대어 한 칭찬이 예상 밖이었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갈문인은 무린이 그다지 똑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보여준 무예는 출중하고, 말투도 격식이 있지만 그저 그뿐일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아닌 것 같다고 다시 생각을 수정하는 문인이었다.
재치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특히 학문에 대한 재치는 말이다.
그건 곧 무린이 어느 정도 학식을 쌓았다는 말.
저런 과격한 무술을 수련하는 무린이 학문까지 쌓았다는 걸 알아차리자 곧 마음이 기꺼워졌다.
학문이란, 배우고 배워도 결코 나쁘지 않은 것.
한 사람의 문사로서 무린의 존재가 기꺼워진 문인이었다.
문인은 무린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주제가 없어 잠시 고민하다, 현 상황을 만들어준 무린의 수련이 떠올라 바로 입을 열었다.
“내 학문에 힘 쏟는 자이네만, 무예도 결코 허투루 익히지 않았지. 물론 소질이 없는지 실력은 그저 그렇다네. 하지만 자네의 수련을 보자니 굉장히 실용적인 면이 강하던데…… 군부의 무예인가?”
역시.
제갈세가는 문文으로 더 유명하긴 하지만 무武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무는 소질이 없다더니 보는 것만으로도 그 특성을 잡아 낸다.
어지간한 안목이 아니라면 힘든 일이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제갈가라면…….’
무린은 그래서 결코 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자신의 수련을 보고, 군부라는 점까지 파악했다.
무린의 창술은 군부에서 배운 건 아니지만 터가 군부였으니 크게 어긋나는 건 아니었다. 거기다가 군부에서 양성한 무사들도 자신과 비슷한, 굉장히 실용적인 검, 창술을 배웠다는 걸 알기에 역시 제갈가구나 한 무린이다.
“맞습니다.”
“북방에 있었나?”
“네.”
“허어……. 힘든 세월을 겪어 온 젊은이구만. 내 오늘 자내를 처음만나내만 자내의 무사생환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진심이 담긴 목소리다.
표정, 말투.
그 두 가지를 구별 잘하는 무린에게는 분명 진심으로 들렸다.
“감…….”
그에 감사인사로 대답하려고 했는데, 그걸 끊는 존재가 있었다.
“소녀 려도 무린 공자님의 무사생환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문인의 손녀라던, 려였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떨림이 느껴지기는 허나, 그건 초면인 상대에게 인사를 건네는 상황 때문이라 생각한 무린.
‘월이와 비슷하구나.’
전체적인 느낌과 목소리의 울림.
그건 혜보다는 월과 비슷했다.
혜는 차분하다.
일견 느끼면 차갑다 생각할지도 모를 정도로 혜는 차분했다. 그건 혜의 천성과 어머니의 교육이 만나 이루어진 결과였다.
반대로 월은 혜보다는 덜 하다.
비슷하긴 하나, 월은 좀 더 자유분방인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그걸 엄한 어머니의 교육 탓에 자제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더욱이 그래서 마음먹으면 행동도 빨랐다.
어제 무린의 말에, 바로 격식의 거리를 줄인 말을 해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두 분 축하.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무린은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축하를 받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수긍만 하면 그거 멍청한 짓이다. 축하를 받았다면 응당 그에 인사를 해야 하는 것.
무린은 그렇게 배웠다.
“허허, 아니네. 당연한 축하를 하는데 감사를 받을 일이 있나. 아, 시간이 늦었구먼. 허허허! 자네랑 대화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 려 아가 이제 피곤하겠어. 아쉽지만 대화는 내일로 미룸세.”
“네, 내일 뵙겠습니다.”
“그러세. 허허.”
문인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고, 려도 무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다시 객잔 안으로 돌아섰다.
무린은 들어가는 둘을 잠시 바라보다 좀 기다린 다음 객실로 향했다. 객실로 들어오자 이미 장백은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런 장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소리를 죽여 가지고 온 짐` 속에서 지금 입고 있는 의복과 비슷한 걸 한 벌 꺼낸 무린은 공터로 다시 나갔다.
흘린 땀이 만만치 않아 가볍게 씻고 잘 생각인 것이다.
깨끗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무린은 그제야 침상에 누웠다. 침상에 눕자 오늘 있었던 일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무린.
첫 만남이 안 좋았던 장백을 만나고, 밤엔 다시 산동서의 수호자라는 제갈가의 사람들을 만났다.
‘살아 돌아오니 이리 인연이 늘어나는구나.’
장백은 몰라도, 제갈가의 인연은 실 보다 가는 인연일 수도 있겠지만 무린은 상관없었다. 얼굴을 맞대고 통성명을 나눴다는 게 중요한 거라 무린은 생각했다.
이름자를 나눴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면 분명 좀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무린은 웃었다.
살아 돌아온 보람.
두 동생과 해후한 것과 달리 다른 것으로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보람을 느끼며 무린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잔잔하나, 격동을 그리고 싶습니다.
- 작가의말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흐름을 읽는 분들은 왜 저들이 제갈가인지 아시겠군요.
보통 제갈가는 산동이 아닌 호북성에 있다고 하지만 제가 참고하는 지도에는 둘 다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토리에 맞춰 산동, 태산 아래 제갈세가로 결정했습니다.
화끈화끈, 의무적으로(?) 불타올라야 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폭풍 댓글도 덤으로 기대하면서... 저도 화끈하게 불 태우러 나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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