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선물膳物
그래서 무린은 섭섭해 하지 않았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일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춥지만 무린은 먼저 개울로 가 씻고 방으로 들어갔다.
무린이 들어가자 바로 무혜가 상을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저녁식사는.
역시 조용했다.
식사가 끝난 무린은 두 동생을 살펴봤다. 상복을 벗은 엊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동생들의 옷은 똑같았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옷을 보니 무린은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그건 위생 때문이 아닌, 저렇게 옷을 입어야 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갈아입기 싫어서가 아닌, 없는 것이다. 갈아입을 옷이. 더욱이 지금은 춥다. 이제 앞으로 더욱 추워질 것이다.
추운 곳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무린과는 달리 두 동생들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가 여인의 몸. 한기는 결코 좋지 못했다.
고뿔이라도 걸리는 순간, 무린의 마음은 훨씬 불편해질 것이다.
무린은 남은 은전조각이 있는 걸 생각했다.
‘살 수 있을까.’
그 은전조각으로 무린은 동생들의 옷을 사주고 싶었다. 간단한 평복과, 겨울을 날 두툼한 외투까지 말이다.
‘오면서 본 마을이 있었지. 말이 있으면 하루면 족하겠지만…… 이틀을 생각하고 갔다 와야 겠구나.’
부지런히 가면 여기서 하루 좀 더 되는 거리에 조금 큰 규모에 마을이 있었다. 가족을 찾는다는 생각에 하루 묶지는 않았지만 시장기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들르기는 했다.
분명 작은 규모지만 시전市廛거리가 있었던 것 같았다.
‘가자.’
무린은 마음을 정했다.
오라비로서 결코, 이번 겨울을 동생들이 저런 옷을 입고 보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무린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어김없이 묘시에 들어서자 눈을 뜬 무린은 바로 행장을 꾸렸다. 소리는 작았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무혜가 몸을 일으키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시는지요.”
“갔다 올 데가 있다. 늦어도 내일 오후에는 올 테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아…….”
무린의 대답에 무혜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간단히 요기 거리를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래, 고맙구나.”
무린은 무혜의 말을 막지 않았다.
거절하는 것은 오히려 거리를 줄이기는커녕 더욱 늘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침 수련을 거스르고 잠시 기다리자 해가 뜰 무렵이 되어 무혜가 조만한 보자기를 가지고 왔다.
“잘 먹으마.”
“아닙니다. 오라버니가 건강히 다녀오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꼭 그러도록 하마.”
무혜의 대답에 무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몸성히.
당연한 말씀이다.
이제야 동생들을 만났는데 다쳐서 돌아와 동생들에게 걱정이나 슬픔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잠시 뒤, 오늘은 조금 늦게 일어난 무월까지 동반한 배웅을 받으면서 무린은 집을 나섰다. 무린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배웅해주는 무혜와 무월의 모습에 무린은 한시 빨리 갔다 와야겠다는 마음에 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그 걸음은 마을을 나와 저번에 토끼를 사냥했던 이름 없는 산에 도착했을 때 결국 멈추고 말았다.
“나와라.”
우뚝 걸음을 멈춘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하는 무린.
“…….”
그러나 뒤편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무린의 착각인가? 설마.
그럴 리가.
군문을 나선지 얼마나 됐다고 무린의 감이 녹 쓸었을 리가 없었다.
“지금 나서지 않는다면 이유 불문, 치겠다.”
무린의 나직하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그 목소리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역시, 누군가 있었다.
아니, 누군가 무린을 쫓아왔었다.
마을에서부터 말이다.
무린이 신형을 돌려 상대를 확인한 후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왜 나를 따라왔느냐.”
무린의 목소리엔 호의라곤 없었다.
왜?
상대가 엊그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사내였기 때문이다. 동생의 머리채를 잡고, 저속한 말까지 했던 사내다.
아무리 자신의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도, 결코 좋은 기분으로 받아 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지금 보니 사내는 자신의 뒤를 마을에서부터 미행한 상태. 좋은 의도라기 보단, 나쁜 의도로 자신을 쫓은 것 같았다.
그런 경험을 무린은 전장에서 많이 겪기도 했었다. 무린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묵사발이 나고 앙갚음을 하려고 했던 옹졸한 자들.
물론 아직 말을 듣기 전이나 상황을 보아 후자에 더욱 힘을 주고 생각한 무린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엉기적거리며 무린에게 다가왔다.
스윽.
그런 사내의 행동에 무린은 나무창의 끝을 잡고 전방으로 겨눴다. 창이 향하는 목표는…… 가슴이다.
뚫리면 반은 죽어나가는 신체부위.
“멈춰라. 더 이상 다가오면…….”
넓고 커서 찌르기도 용이한 곳에 창을 겨눈 무린이지만 이어진 사내의 행동은 무린의 창이 강제로 멈추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음?”
넓죽 엎드리며 절을 한 것이다.
무린은 그 행동에 얼굴이 모로 기울어졌다.
“엊그제 제가 정말 몹쓸 짓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음…….”
그제야 사내의 행동이 이해가 간 무린이었다.
사내는 용서를 구하려고 자신을 마을에서부터 미행한 것이다. 지금 현실만 보면 그런 답이 나온다.
“제가 그 날 술에 너무 취해 그만…… 정말 혜 소저와 월 소저에게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땐 정말 술에 취해서…….”
“…….”
그 말에 무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진심인가? 아님 자신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틈을 노리려는 술수인가.
순간적으로 무린의 머릿속에서 빠른 계산이 이루어졌다.
오냐.
들어보자.
“진심이냐.”
“네! 정말 진심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일어나라.”
무린은 그렇게 말하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만약을 위해 거리를 둔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그 말에 일어나지 않았다.
“용서해주시기전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일어나라 했다.”
그 말에 살짝 가라앉는 무린의 목소리.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쿵!
“어서!”
“히익!”
사내가 거듭 그러자 무린의 목소리에 노기가 찼고, 발은 쿵 소리를 낼 정도로 강한 진각을 굴렀다.
그러자 사내는 그 소리에 놀랐는지 엎드려있던 자세에서 뒤로 벌러덩 넘어가며 깜짝 놀란 신음을 냈다.
이 남자.
생각보다 순진한 것 같았다.
“일어나라 했다. 말이 말 같지 않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눈치가 없는 것이냐! 아니면 무시 하는 것이냐! 일어나라 했으면 용서한다는 뜻이 아니고 뭐 겠느냐!”
“죄, 죄송합니다!”
“일어나라!”
“네!”
무린의 이번 말에 사내는 바로 일어났다.
“이름이 무엇이냐.”
사내가 일어나자 그제야 가라앉는 무린의 목소리.
“이 장백이라 합니다!”
“장백이라…… 길 장長자에 나무 백柏자를 쓰느냐?”
“네? 네! 그렇습니다!”
“긴 나무라…… 녀석, 길긴 하구나.”
육척이 넘어 보이는 장백은 확실히 긴 나무처럼 크기도 했다. 거기다 다부진 체구까지 가졌으니 더욱 커보였다.
“헤헤, 제가 좀 크긴 합니다.”
순한 녀석이다.
무린은 작게 웃었다.
의심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순한 녀석이 자신의 방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술수라?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무린으로서는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사기꾼일 것이다.
믿기로 했다.
“나는 진 무린이다. 진격 진鎭자에 굳셀 무武, 짓밟을 린躪자를 쓴다. 나이는 올해 이립而立이 되었다.”
“와아…… 뭔가 험하지만, 정말 멋진 이름입니다…….”
한자 한자 뜻이 전부…… 험했다.
저걸 다 이어붙이면…… 진격해서, 굳센 무력으로, 짓밟고 유린하다. 그런 뜻일 것이다. 보통 이런 이름은 불길해서 쓰지 않는 게 정석이다.
허나 왜인지 무린의 이름은 이랬다.
알기로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들었다. 보통 이름은 어미가 아닌 아비가 짓는데 어쩐 일이신지 어머니는 무린의 이름만큼은 꼭 자신이 짓겠다고 우기셨다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타협했고, 둘째 무혜와, 셋째 무월은 아버지가 지으셨다 들었다. 이건 무린이 전쟁터에 팔려가기 전 어머니에게 직접 들은 것이니 분명 사실이리라.
무린은 어쩌면 북방에서 살아남은 게 이런 이름 때문이 아닌 가 싶었다. 물론, 이름처럼 휘젓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몸성히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해도 무린에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되었다. 아버님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건 진심이다.”
어쩌면 무뚝뚝한 말이지만, 장백은 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받아들였다. 생각과는 다른 그 순수한 성격.
무린은 장백이 조금씩 마음에 들었다.
“후우,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쩌면 원수나 다름없는 무린이다.
그런데도 장백은 이렇게 순순히 무린을 용서했다. 얼굴로 보아 아직 슬픔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도 무린의 사과를 받아 들였다.
정상인가?
아닐 수도, 혹은 정상일 수도 있겠지만 장백은 그랬다.
무린은 장백을 더욱 다시 보게 됐다.
“그 얘기는…… 시간이 나며 다시 하자.”
무린이 대화를 끝내려고 하자, 이번에는 장백이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이웃 마을에 갈 일이 생겼다.”
“아…….”
무린의 말에 장백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주춤주춤 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무린은 피식 웃은 후 넌지시 얘기했다.
“왜, 같이 가고 싶으냐?”
“그래도 되겠습니까?”
“너만 괜찮다면 그래도 좋다. 허나, 집에 일은 없느냐? 만약 할 일이 있는데도 따라 나서는 거라면 나는 동행을 허락할 수 없다.”
“없습니다! 오늘은 형님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어머니에게 하루 시간을 얻어 왔습니다! 하하!”
“녀석, 그렇다면 좋다. 따라 오거라.”
“네!”
무린의 말에 장백은 흰 웃음을 지으며 크게 대답했다. 그런 장백의 모습에 무린은 속으로 다시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인연인가. 돌아온 나를 못 보고 가서 미안해서 보내는? 후후. 아니라 부정할 수는 없겠구나.’
앞서 걷는 무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나 아직은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장백과의 인연이 정말 앞길을 같이하는 좋은 인연일지, 아니면 모든 것을 속인 거짓되고 삿된 인연일지.
만약 전자라는 확신이 생기면 가족처럼 챙기되, 후자라 생각되면 서슴없이 잘라 버리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무린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골 때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어째, 서로의 입장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는 걸 둘은 모르고 있었다.
잔잔하나, 격동을 그리고 싶습니다.
- 작가의말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길이 맞는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저는 그저 제가 생각한 길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고 걷고 있습니다.
오늘 계약을 했습니다.
좋은 조건으로 계약한만큼 저는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허나, 연재는 계속됩니다.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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