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피아에서 활동한지 몇 개월 안되기 때문인지 던전물이나 레이드물, 회귀물 같은 용어조차 여전히 확 잡혀오지 않습니다. 베스트 작품 몇 개의 무료연재분을 읽은 느낌은, 참...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장르문학이란 문학에 방점이 있는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알던 김용이나 풍종호, 드래곤라자 같은 장르문학의 세계는 그냥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문학이었습니다. 문피아라는 바뀐 현실에서 느낀 엄청난 괴리감은 사실 충격이었고 당연히 뒤따르는 생각, 내 글은 시장성이 없겠구나,같은 절망감 또한 예정된 수순.
그러나 제 글을 천천히 정독하며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맛을 지향하되 음식이어야 하듯, 대중주의를 지향하되 결국은 다시 문학이라는 겁니다. 한 시간도 못 지나 결국 허무해지고 마는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섹스가, 아내와의 섹스가 주는 잔잔하면서도 깊은 만족감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기무치에 핫 소스 비벼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정하면 그만이고, 나는 좋은 젓국을 찾아다니며 내 김치를 담그면 됩니다.
출력해서 아이들에거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성화이기 일쑤고, 형님과 형수님들, 동생, 조카들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다시 글을 쓴다는 걸. 얼마전 조카 결혼식 때 만나 천억 짜리 소설을 쓰고 있는데, 지금 한 이백 억 언저리를 지나고 있다고 했더니 모두 깔깔 웃고 좋아하시더군요.
부끄럽지 않으면 됩니다. 문학이 언제 시장에 딱 맞게 부합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부끄럼 없이 쓰다보면 언젠가는 작가의 마음과 세상의 마음이 공명하며 독자도 작가도 행복한 날이 오겠지요.
소설 신안주(神安州)는 현대무협을 장르로 선택해 쓰고 있지만, 내가 무당 면장을 익혀봐야 비무할 사람도 없고 적들이 천붕권을 쓰는 것도 아니기에 현대의 무협이라는 게 결국은 재미를 위해 무학을 소품으로 쓰는 현대 소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왜 무학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 현대에도 무협은 여전히 의미를 갖습니다. 낮은 곳의 지친 목소리에 공명하는 것이 무학이기에 그렇습니다. 꽉 막힌 오지 대상골 신안주에서 그처럼 행복했던 그들이 세상으로 나와야 했던 것도 그것이 무학이기에 그렇습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움직이려고 마음먹을 때부터 조금 이상했어요.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시야가 확 열리는 것 같았고, 물속에 잠수했을 때처럼 세상이 조용해지면서도 모든 것이 들렸고, 그 차동차를 막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리고 발끝으로 몽선보를 찍을 때는 땅이 저를 엄청난 힘으로 밀어주는 느낌이 있었어요.”
“살려둘 가치가 없는 자들이잖아. 일곱 살 여자아이를 잔인하게 죽였어. 피흘리며 울부짖는 아이를 죽어가는 순간까지, 어쩌면 죽고 나서도 강간했다고. 죽어 마땅한 자들이잖아. 그들이 살면 생명의 존엄한 가치가 훼손돼. 모든 생명은 존엄한 가치를 갖는 것이 또한 진리라면, 존엄한 가치를 갖지 못하는 생명이 함께 존재해서는 안 되어야 해, 예외를 두면 안돼 아빠.”
“몽이, 이놈! 네 아들을 저렇게 만든 자들과 정녕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셈이더냐!”
“어머님은 정녕 찬이를 복수의 괴물로 만들 셈이십니까!”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난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버스가 굴러 열 명만 죽어도 대참사로 기록되는 작은 나라에서 하루에 사오십 명씩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이 저주의 흐름을 끊을 수 있으면 족하다.”
“나는 천륜을 생각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너를 골라서 낳지 않았고, 너 또한 부모님을 골라서 태어나지 못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 그것이 천륜이다. 천륜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제한다. 부모님은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버리고 하늘이 맺어준 너를 위해, 네가 스스로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것을 베풀고 희생한다. 그게 우리가 천륜이라 부르는 것의 진실이다. 국가는 국민을 골라서 받지 못하고, 국민 또한 국가를 골라서 태어나지 못한다. 이 또한 천륜 아니냐. 지 자식이 스스로 목숨 긋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가 어디 있더냐. 무능하다고,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지 자식 죽어 마땅하다는 부모가 있더냐. 진실로 부모가 되어야할 국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국민의 고통이 국가에 감각되지 못하고 정부의 행정이 시민에 대한 고려 없이 집행된다면, 국가와 국민 간의 프로토콜은 이미 끊어진 것이다. 죽은 나라인 것이다. 나는 국가와 국민간의 재계약을 원한다. 정권을 잡고 국민에게 묻겠다. 국가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집을 짓고 싶어요>
-도지몽이 아내에게
집을 짓고 싶어요
이른 봄이 오면
바삐 올라가는 북쪽 바람을 배웅하며
야트막한 산자락의 허락을 얻고
응큼한 향내로 유혹하는
흙에 빌어 다독이고
구름님, 나무님, 풀님, 벌레님들께 고한 뒤
하늘을 열어 숨을 들이고
그대 향해 씩씩하게 웃으며
집을 짓고 싶어요
아지랑이 깔깔대어도
소리 없는 웃음으로 덮고
잔 바람 일렁여도
콧김 한 번 씨잉 뿜고
맨발로 마당을 다지며
그대를 보겠어요
창가에 어리는 그대, 안에서
밥 짓는 냄새 퍼지고
해 떨어져 어둑해지면
전설 같은 사랑을 나눌
집을 짓고 싶어요
꿈결로도 무엇으로도 변치않을
집을 짓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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