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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사실주의란 무엇인가

광주국립박물관 특별전 공재 윤두서

윤두서는 조선의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자화상으로 널리 알려진 양반이다.

그의 그림은 머리만 허공에 떠 있는 탓에 적잖이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그의 강렬한 인상과 안광은 성리학의 이상인 성인이나 군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가 그린 상체와 귀 등이 지워진 탓에(육인으로 식별하기 힘들 정도로) 그의 본의와는 다르게 더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에 관한 진실을 모르고 보면 마치 시대를 초월한 그림처럼 보이니 말이다.

윤두서는 항상 조선 미술사에서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소개된다. 사실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19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쓰인 말이기 때문에 과연 서양과는 다른 길을 걸어 온 조선이란 나라에서 쓰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서양의 사실주의란 무엇인가?

사실주의라는 말만 듣고 보면 사실주의를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림에 옮겨 놓는 화풍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유럽의 사실주의와는 시대적 배경이 전혀 다른 고대 그리스에서도 인간의 미에 대한 탐구와 수학 연구를 통해 사실적인 그림을 그린 바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오히려 중세의 그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때때로 19세기의 사실주의 작품보다도 그리스의 미술이 훨씬 뛰어난 묘사를 보여주지 않는가.

사실주의란 그 묘사의 정밀함, 즉 기법보다도 오히려 주제 의식에 무게가 실리는 개념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을 일상의 존재들로 보여주는 것, 그 담담하면서도 마음을 건드는 무언가가 있는 양식이 사실주의인 것이다.

이념이란 한 인간에 의해서 탄생하지도 시대를 초월하지도 않기 때문에 역사적 맥락 속에서 연속성을 가진 개념으로 인식하고 파악해야 한다. 내가 내린 정의는 사실주의의 대세, 그리고 지나고 보니 그랬다는 식의 정리에 불과할지 모르므로 엄밀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공부해야 할 것이다.

미술이라는 좁은 영역에서 벗어나 이념으로서의 사실주의가 태동한 역사적 필연의 증거를 간추려 보면 과학의 귀납법(그리스 자연 철학 이후 프랜시스 베이컨 등)과 수학의 공리적 방법론(유클리드 원론 이후 수학자들) 그리고 그 둘의 결합(갈릴레이의 실험 및 이론화의 과학적 모범, 데카르트 방법 서설-사유 존재가 수학 공리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철학적 기반의 창조와 폐기되었으나 훌륭한 모델이었던 소용돌이 이론, 뉴턴의 프린키피아 이후 물리라 불리는 학문 전반)이 있으며 과학 기술의 발달(활자 인쇄술)과 역사의 큰 흐름(아랍 문명의 그리스 문명 보전, 몽골 제국의 문화 충돌)이 불러 온 르네상스를 통한 세계관의 변천(신이 물러나고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놓인 점, 이후 이성을 강조하는 철학)은 평범한 인간을 주제로 삼는 사실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헤겔의 철학은 곧 허물어질 것이었으나 훌륭했으며 마르크스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갔으나 인간 역사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고, 다윈은 현재까지 유효한 인간 문명의 커다란 숙제(지구상에서 인류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를 남겼다.

사실주의는 현대에도 유효하며 어쩌면 이 시대에야말로 가장 필요한 덕목일지도 모른다. 이념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인간 이성의 냉철함과 동시에 인간을 가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적 사고를 결합한 21세기의 사실주의 철학은 훌륭한 해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걸 시행할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뭐, 이론 상으로는 말이다.

사실 책 한 권 분량으로도 해결 안 되는 이야길 지껄이고 있는 중이니 양해바라며.. 먼 길 돌아오긴 했으나 동양의 사실주의를 살펴보자.

동양의 사실주의는 동양의 대국이자 조선 문화의 원류인 청나라로부터 찾아보는 것이 합당한 접근이라 생각한다. 청나라는 한족들에겐 오랑캐라 불리던 만주족이 건설한 국가였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한족의 상징인 유교 질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유학이 통치 철학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자 그 반동으로 발전한 것이 청조의 고증학이라는 유학의 한 갈래인데, 이것이 표방하는 정신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이다. 객관과 실증. 그렇다. 사실주의를 이루고 있는 한 요소와 너무나 흡사한 태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청조의 고증학은 비정치적인 색채가 있어 사실주의 이념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고증학과 청조의 사상이 조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 윤두서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윤두서는 그림을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닌 책을 보고 배웠다고 하는데 그가 본 책은 당연히 청조의 것이었고 그는 이로부터 실재의 관찰에 의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 후, 그가 그리는 대상이 일상의 것으로 옮겨지며 윤두서는 조선 미술 사실주의의 선구자라 불리게 된다. 윤두서 개인의 정신은 그 시대를 초월하지 못했으나 그는 당대의 깨어 있는 선비로서 구휼, 문화 사업에 힘썼고 노비를 재물로 보는 것을 비판하는 등 유학자 중에서도 상질의 인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그림은 풍속화를 제외하면 내면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 그의 예술 세계를 사실주의 화풍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문제 제기를 하기보다 세상에서 물러나 예를 닦은 선비였기에 사실주의 이념에도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동시대의 인물 중 연암 박지원은 충분히 사실주의 이념을 가졌다고 할 만 하지만 말이다.

윤두서는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 격이지만 사실주의 미술가는라고는 할 수 없는 상당히 정의하기 까다로운 존재인 셈이다.

조선 미술에 사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서양의 사실주의 화가들에겐 모욕이 될 수도 있다. 조선의 화가들은 서양의 화가들만큼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도 그만큼의 사상적 토대를 갖추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실학이라는 이름의, 수리 과학적 방법론이 빠진 사실주의 이념이 등장하는 만큼 시대적 필요에 의한 작명은 허용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고 필연을 물리칠 수 없어서 쓰러지고 만 실학자들의 뜻. 그 뜻만큼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거대한 중국도 청조가 멸망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설된 후에야 유학 정책을 써서 서양 과학의 본체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조선이야 어찌 가능했겠는가. 과학의 찌꺼기 혹은 부산물에 눈이 휘둥그레져 부강을 위해 청조 오랑캐에게서라도 배워야 한다는 현실을 바로 본 주장마저 수많은 반대에 부딪히는 상황에 말이다.

흠... 결론은 무엇인가?

조선의 사실주의, 동양의 사실주의는 서양의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형성된 개념인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양의 사실주의와 대응시켜 조선의 사실주의를 정의한 것으로 봤을 때, 제대로 이해만 한다면 문제 될 건 없어 보인다.

사실주의란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할지언정 그 시대의 한계 속에서도 인간 이성을 갈고 닦아 현실에 대처하려는 태도이자 정신이라고 내 마음대로 다시 정의를 내리며 끝맺도록 하겠다.






댓글 2

  • 001. Lv.85 큐비트30

    15.10.26 06:44

    많은 공감이 됩니다.
    사실과 현실... 요즘은 같은 의미로 받아들입니다.사실적 현실,현실적 사실.
    말장난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입니다.여기서 철학적 사고가 필요합니다.자까님의 글중에 설명이 녹아들어 있습니다.ㅎㅎㅎ

  • 002. Lv.32 rupin

    15.11.01 08:27

    철학...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즐거우면서도 무거운 단어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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