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006. 적응하면 안돼!
후욱- 허파에 담긴 바람을 빼내고 몸을 일으켰다.
선선한 바람이 몸을 스쳐 가자 아랫도리의 허전함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벼랑 끝에서 걷어 차이듯 접속했지만, 앞의 두 번처럼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진 않았다.
목을 한 바퀴 돌리고 하늘을 올려 봤다.
건물과 건물 사이, 강물처럼 길게 늘어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각조각 동그랗게 나눠진 구름이 높고 푸른 하늘에 점점이 박혀있다.
“그림은 좋네.”
게임 속 세상은 그림책에서나 보던 그런 풍경이다.
얼떨결에 쫓기듯 들어와 덜컥 죽어버렸던 앞의 두 번과 달리 이번엔 몇 초나마 여유를 부려봤다.
딸각. 쪽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휴, 다시 시작인가.”
고개를 돌려 쪽문을 바라봤다.
그 골목, 그 위치에서 그 여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변태 어쩌고 하면서 비명을 지르겠지.
“꺄아아아아아아! 변···. 변태다!”
잠시간, 앞서 부려본 여유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넓어지고 촘촘해진 느낌이다.
“꺄아아악!”
비명을 지르고 호들갑을 떨며 날 변태 취급하면서도 그녀는 내 얼굴과 소중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훗-.
여자의 이중적인 태도에 웃음이 났다.
그렇게 기겁할 정도로 깜놀했으면 고개라도 돌리던지. 그렇게 빤히 뚫어지게 보면서.... 누가 누굴 변태라는 거냐.
휘이익-.
오물이 담긴 쓰레기 봉투가 허공을 난다.
탁!
날아드는 봉투를 거칠게 잡아채서 원주인에게 돌려줬다.
퍽~!
쓰레기봉투가 괴성 변태녀의 얼굴을 강타하며 골목에 오물을 흩뿌렸다.
“어머, 어머!”
쓰레기를 뒤집어쓴 괴성녀가 오리처럼 꽥! 꽥! 거리면서 황당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황당하냐? 그래. 나도 황당했다.
알몸으로 깨어난 것도 어이없는데, 변태 소리 듣고 오물 뒤집어쓰고.
기분이 아주 엿같았지.
조금 전 일인데, 오래된 일처럼 나도 모르게 되새김 길을 하게 되네.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미친 노인네들은 나를 풀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할 때까지 계속 입금, 접속을 무한 반복하거나, 입금도 초반에만 그렇게 하고 나중엔 무임금 고노동 원칙을 고수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채업자, 집주인 피해서 도망쳤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에게 생체 실험 자신 납세를 한 꼴이라니!
군 제대와 함께 배배 꼬여 버린 인생을 한탄하는데, 괴성 변태녀가 나온 쪽문 옆에 쪽문이 벌컥 열렸다.
그래, 이제 앞치마 두른 밀대남 차례지.
생각은 잠시 그만, 일단 시간부터 벌자.
이번에도 3분 컷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노인네들 게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존심 문제니까.
골목 밖,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도로를 확인하곤 밀대남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야! 어떤 놈이! 이런 미친! 벌건 대낮에 발가벗고 뭐 하는 짓이야!”
앞치마 밀대남은 위협적으로 밀대를 휘둘렀다.
자동차에 치이고 트럭에 치이고 버스에 밟혀도 봤는데, 그깟 밀대가 무섭겠냐?
붕붕! 밀대가 공기를 가르며 매섭게 날아든다.
기분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접속했을 때보다 집중력이 많이 올라간 느낌이다.
정신 없이 도망치며 밀대를 피하는 것만 생각할 때는 몰랐는데, 날아드는 밀대 끝이 눈에 밟힐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부웅!
휙.
부우웅!
휙.
연달아 날아든 밀대를 휙휙 피해버리자, 밀대남은 ‘어?’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밀대와 나를 번갈아 봤다.
표정을 보니, ‘이게 뭐지? 왜 안맞아?’하는 느낌이다.
뒤에서 변태 괴성녀가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장님. 무서워요...’ 이러고 있다.
여자의 내숭 버프를 받은 것인지, 앞치마 밀대남 팔뚝에 힘줄이 불끈거렸다.
부아아아아아앙!
앞서 두 번과 달리 밀대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게 치솟았다.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밀대 끝 갈라진 틈에 머리카락이 걸렸다.
투둑!
대여섯 가닥의 머리카락이 뜯겨 나갔다.
현실 반영, 현실 감각 백 퍼센트.
머리 가죽이 따끔거린다.
미친 영감탱이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디테일하게 현실 반영을 했을까.
디테일에 흥분하고 학학-대는 디테일 변태들이라서?
밀대에 머리가 깨질 뻔했는데, 미세한 통증까지 구현한 게임 환경에 오히려 헛웃음이 났다.
부아아앙!
휙휙!
요리조리 쥐새끼처럼 도망을 다니자, 앞치마 밀대남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내가 뒤로 물러서자, 밀대남이 쫓아 움직이려는데, 변태 괴성녀가 ‘무..무서워요. 가지 마세요.’ 하면서 밀대남 옷고름을 잡았다.
밀대남이 ‘어흠. 어흠’ 하면서 잠시 여자를 위로했다. 밀대남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스멀거렸다.
거참, 이 와중에 가지가지 한다.
앞치마 밀대남은 초선에 푹 빠진 여포마냥, 헤벌쭉거리더니 골목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동네 사람들! 빨리 좀 나봐 보쇼! 여기 변태 새끼 좀 때려잡읍시다!”
혼자선 안되니까, 지원병 요청이냐?
앞치마의 외침에 골목 곳곳 쪽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라?
이 골목 정체가 뭐야?
왜 이렇게 쪽문이 많아?
망작 스멜 백만 퍼센트 게임 같으니라고.
스타팅 포인트부터 엔지야. 엔지!
조용하고 안전한 곳도 많고 많을 텐데, 알몸 변태로 뒷골목 스타팅이라니.
덜렁덜렁 골목을 뛰어다니면서도 바깥 상황 살피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트럭이 지나가고···. 1, 2회차 킬링 포인트가 멀리 사라져 갔다.
대머리 노인네가 3분 어쩌고저쩌고했는데, 체감상 5분은 훌쩍 넘은 느낌이다.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있는데, 바보같이 또 그렇게 죽을 수는 없는 일이지.”
“변태 새끼가 뭐라는 거야!”
“내가 알몸이 되고 싶어서 알몸인 것 같냐?”
“뭐?”
“앞치마라도 벗어주면서 변태 변태 하던가!”
앞치마 밀대남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변태 새끼라도 사람 새끼라서. 내가 어지간하면 안 다치게 하려고 그랬는데.”
웃기고 있네.
변태 괴성녀에게 잘 보이려고 노오력! 하는 거 내가 다 봤는데. 이제 와서 무슨.
그런데, 농담이 아니었는지 밀대 휘두르는 소리나 각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부아아아아앙!
미친놈이, 진짜 때려죽일 생각이냐?
현실구현 백퍼센트면, 여기도 법이 존재하는 세상일텐데, 그렇게 죽자고 달려들면 안되는 거 아냐?
엇! 하며 몸을 피하는데, 미끈한 뭔가가 발끝에 걸렸다.
“잉?”
마찰지수를 확보하지 못해 벌러덩 넘어지는데, 붕붕거리던 밀대가 절묘하게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쩍!
“캑!”
숨골이 콱 막히고 동공이 좌우로 흔들렸다.
눈앞에 캄캄해지고 의식이 희미해지는데, 내가 밟고 넘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변태 괴성녀에게 반사 투척했던 쓰레기 봉투.
그 안에서 터져 나온 바나나 껍질....이었다.
털푸덕 쓰러지며 바닥에 피를 흩뿌리자, 변태 괴성녀의 비명이 골목길을 메아리쳤다.
“꺄아아악! 어또케, 오또케! 저 사람 죽었나 봐!”
괴성녀의 호들갑에 밀대남의 당황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119! 누가 119 좀 불러!”
변태 잡겠다고 나왔던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좋냐며 우왕좌왕했다.
'그래도 이번엔 뼈마디 작살나서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죽는 꼴은 면했네.'
잠깐만.
나 지금. 자동차에 치여 죽는 것보다는···. 덜 아프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야?
한성진.
너 인마. 정신 차려!
사이코패스 노인네들 손에서 죽을 때까지 갈려 나갈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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