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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늑삼

1894 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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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22 18:26
최근연재일 :
2019.09.26 14:17
연재수 :
78 회
조회수 :
15,171
추천수 :
333
글자수 :
667,027

작성
19.04.01 17:25
조회
268
추천
7
글자
11쪽

제 2장 : 민간질고(民間疾苦。정치의 변동이나 부패로 백성이 괴로움을 받는다) (3)

DUMMY

* * *


행정 구역상 비록 군이 아닌 현이었지만 정읍현은 꽤나 큰 고을이었다. 그래서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도 종육품 현감이 아닌 종오품 현령이었는데, 하지만 그 정도로 큰 고을임에도 정읍현은 관아 주변과 대로 변에만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뿐, 그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현 내는 온통 초가집 천지였다.


"귀동 아범, 그동안 귀동이가 약초를 제법 캐 모아 돈푼깨나 만졌을 텐데 술 한잔 사야 하지 않겠소?"


"아이구, 나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열 번이라도 사야 하고말고요."


"으음? 진짜요?"


"예, 나리. 그동안 나리께서 우리 귀동이를 어여쁘게 봐 주신 덕분에 이리되었으니 응당 소인이 사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정읍현의 어느 대로를 두 사내가 걷고 있었는데, 그들 옆으로는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작은 초가집들이 지붕과 지붕이 맞닿은 채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허, 내가 귀동 아범에게 농 한번 치려다 도리어 내 얼굴에 금칠하는 꼴이 되었구려. 허허허."


"예? 금, 금칠이요?"


"아, 아니요. 여하튼 그 먼길을 짐승 가죽 나눠 지고 오느라 귀동 아범 수고가 많았으니 술을 사도 이 몸이 사야 하지 않겠소? 자, 저기 가서 목이나 축이고 갑시다."


두 사내 중 연장자로 보이는 사내가 어느 한 골목을 가리키며 앞장을 섰다.


"아닙니다요, 나리. 별로 무겁지도 않았는데 그깟 게 수고라뇨? 그러니 이 소인이 사겠습니다요."


"음, 귀동이가 누구를 닮아서 그리 쇠고집인가 했더니··· 이제야 비로소 그 원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구려."


"예? 아이구, 그놈이 어찌 은혜도 모르고 나리께 그런 불경을··· 나리, 소인이 대신 죄를 받겠으니 이 소인한테 죄를 물어 주십시요."


"어이쿠, 귀동 아범한텐 농도 함부로 못하겠구려. 허허허."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진혁의 아버지 이경륭과 귀동의 아버지 임경달이었다. 이들은 이른 아침 칠보 산중과 산내골의 중간인 구절재 아래에서 만나 반나절을 꼬박 걸어 이곳 정읍현까지 나온 것인데, 앞서 이경륭이 언뜻 언급했듯 정읍현까지 나와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실 정읍현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기에 큰 볼일이 아니면 선뜻 나설 수 없는 길이었다. 그런 만큼 정읍현까지 한번 오가려면 꽤 큰맘을 먹어야만 했는데, 하지만 오늘은 나들이해야 할 목적이 분명했기에 이렇게 힘든 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굳이 얘기 안 해도 짐꾼을 방불케 하는 두 사람의 행색이 그 나들이 목적이 뭔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일언이폐지하고 이경륭은 토끼 가죽부터 담비, 여우 가죽까지 겨울 동안 모아 두었던 짐승 가죽을 팔기 위해서였고, 임경달은 임경달대로 작년 늦가을에 귀동이 채취한 약초를 겨우내 말려 뒀다 그것을 팔기 위해 모처럼 큰 걸음을 하게 된 거였다.


"자, 귀동 아범. 이쪽 골목에서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이리 한번 들어가 봅시다."


이경륭과 임경달이 골목 쪽으로 몇 걸음 옮기자 길거리 노상인 목로술집부터 색줏집까지 크고 작은 술집들이 쭉 눌어서 있는 골목이 나왔다. 그리고 골목 안으로 좀 더 들어가자 탁자가 달랑 하나뿐인 자그만 음식점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내외술집도 더러 눈에 띄었다.


내외술집은 조선 말기부터 생겨났는데 생계 유지를 위해 어염집 아낙이 건넛방과 사랑방에 술 손님을 받는 술집이었다. 비록 생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술집을 운영했지만 당시엔 남녀가 내외하는 법도가 있었고, 또한 그 법도를 지켜야 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게 하고 술상만 방 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두 손으로 술상만 들이민다고 해서 일명 '팔뚝집'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런 술집이었다.


이경륭이 골목 안으로 몇 걸음을 더 들어가 달랑 탁자 하나뿐인 어느 선술집으로 들어서자 임경달도 그 뒤를 다라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주모, 여기 손님 받으시게."


"예, 나리. 어서 오세요."


이경륭과 임경달이 들어선 선술집은 작고 허름했는데 오랜 세월 막걸리 냄새가 배어서인지 선술집 안은 시금털털한 냄새가 그야말로 진동을 했다.


"주모, 우리 막걸리 한 되만 내주시게."


"나리, 술 안줏거리는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이경륭이 탁자에 앉기 바쁘게 막걸리를 주문하자 수더분해 보이는 주모가 쪼르르 다가와 안줏거리까지 마저 주문을 받았다.


"도토리묵이야 자다가도 먹는 산중 사람들이니··· 음, 옳거니 녹두전이나 큼지막하게 하나 부쳐 주시게."


"예, 나리. 쇤네가 크고 두툼하게 부쳐 올리겠습니다."


"거, 두툼하게까지 부쳐 준다니 고맙네그려. 그건 그렇고 막걸리부터 후딱 내주시게. 우리 귀동 아범 목젖이 지금 떨어질 판이라 조금 더 지체하다간 큰일날 것 같네그려. 허허허."


잠시 후 주모가 후다닥 내온 막걸리를 이경륭이 임경달의 잔에 넘칠 만큼 한가득 따라 준 다음 자신의 잔에도 가득 채웠다. 그 모습을 임경달이 눈빛을 번뜩이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런 임경달의 목젖은 연신 꿈틀대고 있었다.


"자, 귀동 아범. 먼저 한잔 듭시다."


임경달에게 같이 한잔 마시자는 말을 건네며 이경륭이 자신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임경달도 곧바로 자신의 술잔을 들더니 순식간에 들이키며 술잔을 비워 버렸다.


* * *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대지 위를 떠도는 바람에 차가움이 다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훌쩍 다가온 봄에 그 차가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요즘은 몸에 닿는 바람마다 제법 따스하고 포근한 봄기운이 실려 있었다. 그 바람을 애타게 기다려 온 매화나무들이 이윽고 하얀 꽃잎을 피우며 그 고운 자태를 뽐내자 도회지를 빙 두르고 있는 정읍 천변은 부유하고 있는 꽃잎으로 인해 온통 새하얀 물결이었다.


"아버지, 저 저잣거리 좌판에 좀 들려야 할 것 같아요."


"왜, 저 상인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게냐?"


새하얀 꽃잎이 너울대는 천변 옆 대로에 저잣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양옆으로 크고 작은 저자와 좌판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곳을 바라보며 서진이 말을 꺼내자 송유석이 그러그러하려니 하는 표정으로 무덤덤히 말을 받았다.


"예, 그게 볼일이라기 보다··· 작년에 담근 김장이 벌써 바닥나서 봄김치라도 좀 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응? 예년과 똑같은 양을 담갔을 텐데, 금년엔 왜 그리되었느냐?"


"글쎄,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분명히 해마다 하던 대로 똑같이 했는데 올해는 좀 이상하게······."


"음,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예? 아버지는 혹시 그 이유를 알고 계세요?"


서진이 저잣거리를 들려야 한다며 김장 얘기를 꺼낼 때만 해도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송유석이 뭔가를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웃기까지 했다. 서진이 그 모습을 보고 궁금한 표정을 보이며 넌지시 묻자 송유석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고 새치미를 보였다.


"암, 알다마다."


"뭐, 뭔데요?"


"뭐긴 뭐야. 바로 저 녀석 때문이지. 코흘리개 꼬맹이에서 시집가도 될 만큼 저리 훌쩍 커 버렸으니··· 생각을 해 보거라. 뭐 먹고 저리 컸겠느냐."


송유석이 가리키는 곳엔 서연이 있었는데, 서연은 허공을 부양하는 새하얀 꽃잎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 설마하니··· 아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호호호."


"허허허, 저만큼 크려면 당연히 밥을 많이 먹지 않았겠느냐. 그럼 어디 밥만 먹었겠느냐?"


송유석이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며 가벼운 말투로 한마디를 건넸는데, 하지만 가벼운 말투와 달리 말속은 꽤 의미심장했기에 서진도 그 말에 동조하는 뜻으로 새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뇨, 호호호. 반찬거리인 김치도 많이 먹어야겠죠."


"그래, 맞다. 이제 알겠느냐? 허허허."


"예, 아버지. 호호호."


송유석과 그의 맏딸 서진은 따뜻한 봄기운을 만끽하며 그렇게 웃음 섞인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유석은 며칠 전에 입고 있던 얇은 솜옷 대신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고, 서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장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모습이 매우 그럴싸하게 보이면서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 이색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망건을 두른 이마 위에 양태가 좁은 갓을 쓰고 중치막 위에 소창옷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사내 체구치곤 워낙 작다 보니 얼핏 조혼한 소동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봄이라는 계절과 딱 어울리는 이팔청춘의 서연은 그 나이답게 휘날리는 꽃잎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허공에 휘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버린 탓에 발그레한 얼굴로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서연의 눈빛에 슬픈 기색이 감돌며 점차 그윽해졌는데 아마도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이 애처롭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대체로 그런 양면성은 다채로운 감성에서 빚어지는 흔한 현상인데, 역시 감수성이 예민하고 풍부한 나이라서 그런지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인 감정 표현까지 실로 유감없이 펼쳐 보이는 서연이었다.


한동안 서연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피우던 송유석이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그래, 살 게 있으면 가 보자꾸나. 그리고 이제 그만 저 녀석도 부르거라. 저러다 제 녀석이 벌이나 나비인 줄 알고 날갯짓할까 겁나는구나."


"예? 설마하니요. 호호호."


송유석이 뜻밖에 우스갯소리를 건네자 서진이 다소 어이없어 하면서도 낭랑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그건 모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개구리 같은 녀석이라······."


"호호, 만일 정말로 그런다면··· 우세도 그만한 우세도 없겠는데요, 아버지."


"어이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구나. 어서 한시바삐 부르거라."


서진의 대꾸에 마치 진짜로 우세를 당한 것처럼 송유석이 다급히 손사래를 쳐 댔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행위가 결코 싫지 않다는 듯 송유석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예··· 아뇨, 아버지. 부르는 것보다 제가 직접 가서 데려올게요. 저렇게 얼빠져 있는데 혹여 제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 진짜로 날갯짓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서진 또한 송유석 못지않게 환한 미소를 머금고 서연에게 다가갔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정감 있어 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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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 3장 : 유위전변(有爲轉變。인연에 의해 세상일이 변한다) (5) 19.04.11 179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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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 3장 : 유위전변(有爲轉變。인연에 의해 세상일이 변한다) (1) 19.04.05 229 7 13쪽
12 제 2장 : 민간질고(民間疾苦。정치의 변동이나 부패로 백성이 괴로움을 받는다) (6) 19.04.04 216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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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 1장 : 춘치자명(春雉自鳴。봄이 되면 꿩이 스스로 운다) (4) +1 19.03.26 479 8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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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 1장 : 춘치자명(春雉自鳴。봄이 되면 꿩이 스스로 운다) (1) 19.03.23 1,481 1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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