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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늑삼

1894 노령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대체역사

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22 18:26
최근연재일 :
2019.09.2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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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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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서장 : 탈신도주 (脫身逃走。몸을 빼내어 달아나다)

DUMMY

계해년(1863년) 겨울 조선의 스물여섯 번째 왕인 고종이 철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당시 고종의 연치가 열두 살밖에 안 되다 보니 한 나라를 다스리기엔 다소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고 냉정히 말하면 역불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희세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선 불가부득 수렴청정이나 섭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당시 궁궐 내 사정으론 수렴청정이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그런 까닭에 왕족 신분이면서도 한때 상갓집의 개라고 놀림이 자자했던 흥선군 이하응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 이른바 대리 정치라는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되고 삼 년이 지난 병인년(1866년)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외동딸인 민자영이 왕비로 간택되어 궁궐로 들어오게 되었다. 왕비는 고종보다 한 살이 더 많았는데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어 박식한 데다 성격 또한 활발하고 적극적이어서 은연히 여걸중에 여걸로 평가되는 그런 인물이었다.


미상불 왕비는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시점부터 노련한 정치 감각을 발휘하더니 곧 궁궐 안의 모든 상황을 꿰뚫어보았다. 그렇게 궁궐 안의 실정을 모두 파악한 왕비는 섭정이라는 명분으로 나라 살림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서서히 반기를 들며 사사건건 대립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립하는 두 사람 사이엔 뺏고자 하는 권력과 지키고자 하는 권력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처럼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세상천지 창피한 줄도 모르고 허구한 날 권력 쟁탈전을 벌이자 그 틈바구니를 기웃거리며 오로지 이로운 편만 붙좇는 박쥐족들이 특정 집단을 이루며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쪽저쪽을 능란히 오가는 줄타기의 명수들로 편복들의 전유물인 박쥐구실을 앞세워 점차 정치 전면에 등장했는데, 그렇잖아도 권문귀족들에 의해 온갖 비리와 폐단이 난무하던 조선은 그들의 정치 참여로 인해 결국 망징패조의 길로 질주하게 되었다. 그리될 수밖에 없는 게 이들은 차후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 친왜파가 되어 왜인들과 더불어 조선의 국정을 농단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렇게 망조가 들며 혼탁하고 어지러이 변해 가자 마침내 도성의 중앙 관리들부터 지방 관아의 아전들까지 너도 나도 앞 다투어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구국이 아닌 오로지 제 뱃속을 채우기 위해 나선 것인데, 그들은 그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세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정부패를 저질러 댔다. 그야말로 기가 차고 기가 막힐 노릇으로 그들이 과연 조선 사람들이 맞는지 그 정체성에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여하튼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썩을 대로 썩어 가며 잔뜩 곪아 갔다. 그러다 결국 그 곪음이 터진 게 임오년(1882년) 유월에 있었던 군란이었다. 그 군란은 왕비 일족의 중심 인물인 민겸호로부터 촉발되었는데, 민겸호는 군인들의 녹봉을 담당하는 선혜청의 당상관으로 유독 구식 군인들에게만 차별 대우를 일삼았다. 그 차별은 비단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그 차별 정도도 매우 심했다. 굳이 사례를 들자면 녹봉으로 주는 쌀을 몇 개월씩 밀려서 지급한다든가, 아니면 주더라도 정상적인 쌀이 아닌 모래나 겨가 잔뜩 섞인 쌀을 군료로 지급하는 등 그 누구라도 공분할 만한 그런 비인도적인 만행을 저질러 댔다.


결국 그에 격분한 구식 군인들이 민겸호를 찾아가 그를 죽이고,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궁궐까지 쳐들어간 게 그만 무리수가 되었고, 필경엔 그게 시발점이 되어 커다란 화난으로 번지고 말았다.


한편 구식 군인들이 궁궐로 쳐들어오자 화들짝 놀란 왕비는 이내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감지하고 그 즉시 궁녀로 변장하였다. 궁녀 옷으로 갈아입기까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던 왕비는 황급히 궁궐을 빠져나가 그길로 광주, 여주를 거쳐 장호원에 있는 충주 목사 민응식의 집까지 내달렸다.


그렇게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한 왕비는 곧바로 전권 대사를 청국에 특파해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달포 후 청국의 군사를 지원 받은 왕비는 압도적인 무력을 내세워 군란을 진압했는데, 우리 역사상 내란 진압 목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인 첫 번째 사례였다.


* * *


한양 북촌의 한 저택 사랑채에 선비 책상을 가운데 두고 세 사람이 디귿자 형태로 마주 앉아 있었다. 마주 앉은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나이 지긋한 노인으로 만면에 안타까운 기색이 가득했고, 반면에 중년인으로 보이는 나머지 한 사람은 두 노인과 달리 비교적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상방 상석의 노인이 짓누르고 있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 노인은 맞은편의 중년인을 향해 다짜고짜 미안하다는 말부터 건넸는데, 그 말투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말을 건네는 태도 또한 몹시 곤혹스러워 했는데, 그런 걸로 미루어 보아 무척이나 어렵게 꺼낸 말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후우, 이 판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안 되어 참으로 미안하네."


"아닙니다, 영감. 소장은 그저 황송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요즘같은 시국이 어수선한 데다 가뜩이나 시간도 촉박했을 터인데 이리 빨리 조처해 주실 줄은 땅띔도 못했습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상석 노인이 건넨 말에 중년인은 당치 않다는 듯 다급히 황망함을 내비치며 도리어 말을 건넨 노인에게 예를 다해 고마움을 전했다. 그런 다음 잠시 한 호흡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어 또 다른 노인에게도 고마움에 대한 느꺼움을 허심 없이 나타냈다.


"도제조 영감의 은혜 또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중년인이 도제조 영감이란 노인에게 예를 다해 고마음을 건네자 그 노인은 감당하기 버겁다는 듯 다소 과한 동작으로 손사래부터 치며 황급히 만류했다.


"허어, 당치 않은 말이네. 그러니 어서 거두게나. 사실을 따지자면 나 또한 이 판관 자네한테 면목이 없고 미안한 건 매일반이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네만 자네가 우리 훈련도감을 위해 그동안 불철주야 애써 준 건 누구나 다 아는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그런 만큼 우리가 도리어 자네를 잊으면 안 될 일이네."


"암, 그렇고 말고. 그건 두말하면 잔소리지. 이 판관, 방금 도제조 영감이 한 말에 나 또한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애석하기만 하다네."


도제조 영감이란 노인의 말에 상방 상석의 노인이 그 즉시 나서 맞장구를 쳤다.


"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영감. 부족하기 그지없는 소장입니다. 한데 어찌하여 그리 과분한 평을······."


자신을 높이 사는 듯한 두 노인의 말에 중년인은 겸연쩍은 표정을 보이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겸양의 말을 건네며 예를 잊지 않는 중년인이었다.


"허, 자네가 부족하다니 당치 않을 소리네."


중년인이 겸손을 보이자 꼿꼿한 자세로 상방 상석에 앉아 있던 노인에게서 점잖은 호통이 터져 나왔는데, 그는 얼마 전까지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맡고 있었던 한상현이었다. 지난 유월 초아흐렛날 군란 발발 직후 흥선대원군의 맏아들 이재면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자로 한 품계만 더 승품하면 정이품이 되어 영감이란 호칭에서 대감이란 호칭으로 바뀌어 불릴 수도 있는 자였다. 하지만 그간 때가 무르익지 않았는지 몇 년째 종이품 벼슬만 전전하더니 이젠 그마저도 파직된 상태였다.


그 한상현 옆엔 현 훈련대장인 조진학이 상방 봉창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왕비의 측근 인물로 칠월 열사흗날 청군에 의해 군란이 진압된 다음 이재면이 삭탈관직 당하자 곧바로 그 뒤를 이어 훈련대장에 오른 자였다.


그리고 선비 책상을 사이에 두고 한상현과 정면으로 마주 앉아 있는 중년인은 한때 두만강 인근의 북방 군영을 호령했던 만호 이경륭이었다. 하지만 북방 군영에서 명망을 떨친 건 말 그대로 한때였고, 지금은 종사품 만호가 아닌 종오품 판관으로 강등되어 훈련도감에서 훈련 교감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가해한 것은 만호보다 두 품계나 낮은 판관 관직을 이경륭이 자처해 낙등 받았다는 사실인데, 물론 그 내막엔 이경륭의 피치 못할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출사한 후로 줄곧 북방 군영에 몸담고 있던 이경륭은 다소 늦은 나이에 혼인해 슬하에 외아들만 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인 기묘년(1879년) 여름의 어느 날 자신의 임지인 함경도 무산 군영에서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다. 그 느닷없는 소식은 말 그대로 청천벽력 같은 내용으로 자신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보, 즉 비보였다.


부지불각에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이경륭은 너무 큰 충격에 한동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놀랍고 두려운 경황망조도 잠시 잠깐, 부랴부랴 도성으로 귀경한 이경륭은 황망한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통한의 장례를 치르며 부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부인의 초상을 치른 이경륭은 그 애통함에 그만 넋을 잃고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한 채 마치 반편이처럼 재닜다. 그러다 끝내는 북방 군영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도성에 눌러앉았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다름 아닌 어린 외아들 때문인데, 그 당시 이경륭의 아들은 불과 다섯 살로 아직은 부모 품안에서 한창 재롱이나 떨 나이였다. 그런 만큼 그 어리디어린 아들을 홀로 남겨 둔 채 이경륭은 차마 그 머나먼 북방으로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 판관······."


한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고 조진학이 말문을 열었다.


"··· 어디로 떠날 생각인가? 혹여 그 개마처럼 험하디험한 자네의 전임지로 떠날 생각인가?"


이경륭을 바라보던 조진학이 떠나보내기 못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의 행로를 조심스레 물었는데, 그의 눈빛엔 측은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도제조 영감. 전라도 노령 산줄기 아래에 조부의 고향이 있는데 그쪽으로 내려갈까 생각 중입니다."


민감하다 못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조진학의 질문에 이경륭은 개의치 않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정처를 선뜻 밝혔다. 하지만 이는 이경륭이 내심 의도한 바로 고소원이나 불감청이라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향후 거처를 눈앞의 두 사람에게 통지해야 하는 이경륭으로서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그 기회가 저절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음, 그런가? 여하튼 어디를 가든지 항시 몸 보중하고, 설령 울분이 쌓이더라도 스스로 다스리며 조금만 참도록 하게. 자네의 복권을 위해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할 테니 말일세. 그리고 혹여 노파심에 하는 말이네만··· 혹시라도 중전마마는 탓하지 말게. 자네를 이리 아무 제재 없이 보내 줄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은 중전마마의 배려가 크게 한몫 기여보비한 결과이니 말일세."


조진학이 에두르는 말로 이경륭을 다독이며 은연중 중전을 두둔했는데, 이야말로 중전의 심복지인이라는 게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당금의 정계 상황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으로 혼탁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만큼 여리박빙이나 다름없는 정치판에서 살아남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속된 말로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며 악착같이 버텨야 했는데, 그럴려면 그에 맞는 한 가지를 필히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건 다름 아닌 처세술로 살얼음판을 걷지 않으면 벼슬길에 오를 수 없는 당금의 현실인 만큼 그런 아슬아슬함과 간당간당함으로부터 무사하려면 방금 전 조진학이 보인 어르고 달래는 능수능란한 처세가 꼭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소장 또한 연대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인데 그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이기적이고 고루한 주관에 지배당해 그저 회피하고 관망만 했다는 게··· 그래서 제가 가르친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게 이제 와서 후회가 될 뿐입니다."


회한이 가득 담긴 말이 이경륭의 입에서 꽤 장황하게 흘러나왔다.


"후우··· 아무튼 자네의 파직 상소는 군란 전에 올린 걸로 살짝 조작해 놓았기에 지금 당장은 그 책임에서 비껴갈 수 있지만 차후 대원위 대감이 돌아와 혹여 실권을 잡게 되면 그땐 안심할 수가 없네. 그러니 그 점은 자네도 유념하고 있도록 하게."


훈련대장 조진학이 착잡한 표정을 떨치지 못하고 작은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리곤 이내 말문을 열었는데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말속은 걱정이 가득 담긴 내용이었다.


사실 군란 발발과 동시에 그 영향력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군란이 달포 만에 진압되는 바람에 현재는 그 군란의 책임을 물어 청국으로 압송된 상태였다.


"맞네, 도제조 영감의 말마따나 그 부분은 꼭 유념하도록 하게."


상방 상석의 한상현이 그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자 조진학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전망하건대 그가 돌아오면 이번 군란을 다시 쟁점화시킬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네. 실권을 쥔 왕비 일족들을 제거하려면 만만한 꼬투리가 필요할 텐데··· 그보다 더 좋은 구실은 없을 테니 말일세."


"······."


"후우, 만에 하나 그리되면 거짓으로 꾸민 자네의 파직 상소도 자칫 발각될 수도 있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모르는 일이니 답답하더라도 당분간만 세상을 등지고 있게. 아까도 우리가 약속을 했네만 자네의 복권을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말일세."


"예, 영감. 어찌 되었든 영감이나 도제조 영감께 이래저래 심려만 끼쳐 드린 것 같아 송구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토록 마음 써 주어 고맙습니다."


조진학의 염려가 연이어 전해지자 이경륭은 그 고마움과 미안함에 자세를 바르게 하며 진중한 어조로 답례를 했다. 그러자 이제껏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한상현이 언제까지 마냥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듯 마무리를 짓는 한마디를 꺼냈다.


"자, 언제까지 이렇게 앉아 있기도 그렇고··· 더욱이 전라도까지 내려가려면 갈 길이 보통 멀지 않을 텐데 이제 그만 일어나게나."


"영감, 도제조 영감. 소장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분 모두 부디 보중하시고···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경륭은 한상현의 끝단속에 그 즉시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예를 다해 절을 올린 다음 뒤돌아섰다. 그런 이경륭의 뒷모습을 한상혁과 조진학이 측은지심 가득한 눈빛으로 배웅을 했다. 물론 불나방을 가엾게 여겨 불을 켜지 않는다거나, 쥐를 위해 밥을 남겨 둘 만큼 그 정도의 측은지심은 결코 아니었다.


잠시 후 한양 어느 한 저택의 솟을대문을 나선 이경륭은 담담한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혼탁한 세상과는 달리 더없이 맑고 깨끗하기만 했는데, 그렇게 맑고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경륭의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던 양심의 가책이 또다시 스멀거리며 전신을 휘돌기 시작했다.


사실 이경륭은 총포를 든 신식 군인들이 아닌 아직도 활과 창으로 무장한 구식 군인들을 가르치는 훈련 교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장선에서 보면 이경륭도 이번 군란에 참예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경륭은 군란이 발발하자 그 즉시 갈등에 직면했고, 그 갈등으로 인한 결과 때문에 앞으로 나서질 못했다. 그렇게 뒤로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집에 홀로 있는 어린 아들이 바로 그 이유였다. 결국 이경륭을 비겁하게 만든 것은 부모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애자지정과 아버지로서 가지고 있는 부성애가 그 원유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경륭은 그런 이유 때문에 도의까지 저버렸고, 그렇게 양심을 팔아 목숨을 구걸했기에 지금 이렇게 반 목숨이라도 건져 도망 아닌 도망 길에 오를 수가 있었다.


이때가 임오년(1882년)으로 이경륭의 아들 진혁이 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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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총장 : 앙천부지(仰天俯地。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본다) 19.09.26 263 3 11쪽
77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3) 19.09.25 92 2 31쪽
76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2) 19.09.24 60 2 26쪽
75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1) 19.09.23 64 2 32쪽
74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4) 19.09.20 65 2 18쪽
73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3) 19.09.19 65 2 24쪽
72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2) 19.09.18 65 2 25쪽
71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1) 19.09.17 92 2 23쪽
70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3) 19.09.13 80 3 20쪽
69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2) 19.09.12 66 2 24쪽
68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1) 19.09.11 78 2 32쪽
67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4) 19.09.10 77 2 16쪽
66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3) 19.09.09 64 2 23쪽
65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2) 19.09.05 66 3 21쪽
64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1) 19.09.04 71 3 24쪽
63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3) 19.09.03 73 2 29쪽
62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2) 19.09.02 62 3 22쪽
61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1) 19.08.30 92 3 32쪽
60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3) 19.08.29 96 2 30쪽
59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2) 19.08.28 88 2 29쪽
58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1) 19.08.27 92 3 27쪽
57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4) 19.08.26 79 2 20쪽
56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3) 19.08.23 71 2 15쪽
55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2) 19.08.22 73 2 26쪽
54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1) 19.08.21 78 3 25쪽
53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3) 19.08.20 99 3 26쪽
52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2) 19.08.19 80 3 28쪽
51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1) 19.08.16 95 3 25쪽
50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4) 19.08.15 84 3 18쪽
49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3) 19.08.14 94 3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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