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달(2)
엘은 다시 도적들을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방금 전 엘의 압도적인 능력을 본지라 도망은 생각도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엘은 다시 물었다.
“누가 대장이지?”
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독특한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모두 짧은 순간 아득함 같은 것을 느겻다가 회복했다. 도적들 사이에서 상당히 늙은 것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엘 앞으로 걸어 나와서는 무릎을 꿇었다. 엘은 이번에도 독특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정말 아무도 해친 적이 없나?”
“어, 없습니다.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애초에 사람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억눌린 듯 어눌한 답변이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그의 말이 맞다고 동조했다. 기사는 뒤에서 냉소했다. 그런 말이 나온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죽어야 할 뿐이다. 엘은 몸을 돌리고는 말했다.
“이들의 신병을 제게 맡길 수 없습니까?”
“무슨?!”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럴만도 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나타나 갑자기 무슨 뻘소리란 말인가? 엘은 그들의 경악을 진정시키기 위해 계속 말했다.
“저들을 용서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 값을 치러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들은 아직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죽이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그건... 가혹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 도와주신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이 국법을 어기는 게 되리란건 사실이지만, 국법의 엄격함을 말하기에, 이들 백 명이 넘는, 가족까지 생각하면 수백명이 넘는 이들의 목숨이 너무 안타깝군요. 여러분에게 자비의 정신을 부탁드립니다.”
방금 엘은 간단한 최면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대장이라는 이로부터 얻어낸 정보는 거의 확실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엘에게 확실하다고 다른 사람들이 그걸 쉽게 받아들일 리는 없는 일이다. 자연, 반박이 튀어나왔다.
“저들이 이미 누군가를 죽이고 발뺌을 하는 것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제게는 몇 가지 사소한 재주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하도록 강제하는 힘입니다. 이들이 처음 이 일을 했고, 계획을 세우길 누구도 해치지 않고자 했던 것은 거의 확실할 겁니다.”
“그 따위 말을 어떻게 믿고...!”
“행정국에 간다면 사건 기록이 남아있을 겁니다. 이들이 무언가 저질럿다면 기록이 남아 있겠지요. 가서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기록조차 되지 못한 채 희생되는 이들 또한 부지기수지!”
“그렇게 의심이 되신다면... 해볼까요?”
엘은 다소 서늘하게 웃으며 기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예리하고 자신만만했다. 최면 기술의 출처는 삼좌였고, 소드 마스터라도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 기술 숙련도가 낮은 엘로서는 걸 수 있는 상대에 한계가 있지만,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기사는 자신이 위축됨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음.”
그때였다.
“특이한 분이군요. 하지만 당신이 그런 힘이 있다고 해도 그걸 정말로 저들에게 사용했는지 어떤지 우리는 어떻게 알까요?”
화려한 마차 안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마 마차의 주인쯤 되는 모양이었다.
“제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야 모를 일이지요.”
엘의 말은 간단하게 반박 당했다. 그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따지고자 한다면 되돌릴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심 여기서 가장 권력이 있는 것은 틀림없이 이 여자인 것 같은데, 그녀를 최면으로 조종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뻔한 걸로 따지고 드는 것을 볼 때, 그녀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안의 해결보다 엘 자신에 대한 것인 것 같았고, 거기 놀아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제게는 적지 않은 금괴가 있습니다. 그걸 나눠 드릴테니 침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엘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고 해도 이들의 주장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그 의견 차이를 설득하지 못해 최면과 같은 수단에 기대어서는 안 됐다. 엘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틀린 게 아니라면, 그들의 자유의사는 가능한 존중받아야 했다. 뇌물은 비루한 수단이지만 자유의사를 존중할 수 있었다. 정의는 흔히 공평이고, 공평은 상대적 비교에서 이루어지는 만족감의 균형에서 이루어진다. 만족은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에 달려있다. 그것들은 무엇보다 자유를 전제한다.
“깔깔. 천박한 상인들을 제하고, 돈으로 우리 가문에 제안을 해오는 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군요.”
그리고 마차 문이 덜컹 열리고, 화려한 흰 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아름답지만 오만한 인상을 주는 여인이었다. 이제까지 엘과 언쟁을 계속하던 기사가 재깍 그녀 옆에 서더니 엘을 향해 외쳤다.
“허리를 숙여라! 체일 공작가의 영애시다!”
‘체일...?’
엘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풀었다. 가물가물하니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공작가의 영애라니, 이제 귀족이라는 게 이름뿐이라고는 해도 틀림없이 강대한 권력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엘은 일을 원활히 풀고자 허리를 숙였다가 폈다. 여자가 말했다.
“당신, 돈도 있고 능력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저런 자들에게 신경을 쓰는 거죠? 저런 비렁뱅이 도적들 따위에게? 그것도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 가면서?”
“어쨌거나, 저들이 다 참살당하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은 그 죄의 댓가로 치기에 너무 가혹한 것 같으니 말입니다.”
여자의 말은 거칠고 경멸적이었다. 엘은 그녀의 말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습격당한 장본인이 그들을 경멸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짧은 한숨을 쉬고 조금 씁쓸하게 답했다. 그저 사람이 죽는 걸 되도록 막아보고자 했을 뿐인데, 여러 가지로 쉽지 않았다. 그 답변을 듣고 한층 흥미가 동한 듯, 여자는 엘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고혹스레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의 부탁을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저들의 처분을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대신에 내 밑에서 잠시 일해 주었으면 하는군요. 어떤가요?”
“감사합니다. 약속한대로 저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엘은 재깍 제안을 받아들였다. 만일 그녀가 자신에게 시키려는 일이 들어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면 그건 무시하면 될 일이다. 어떤 종류의 약속도 최종적인 수준의 정의(正義) 위에 서지 못한다. 어떤 종류의 자긍심도 정의 위에 서지 못하기에 지금 자신이 이렇게 자세를 낮추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정의가 단선적(單線的)이 아니라는데 있을 뿐이었다.
“뭐, 그런 것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내가 관심이 있는 건 당신이니까. 후후.”
여자는 말했다. 그녀가 가장 존중하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의 욕망인 것 같았다. 사람을 구한답시고 이꼴을 하고 있는 자신이 바보 처럼 느껴졌다. 엘은 입안 가득히 쓴맛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엘은 그곳의 도적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앞서, 이대로 떠난다면 다시 돌아올지 어떻게 아느냐고 기사대장이 호통을 쳤지만, 그 질문에 대한 엘의 답은 간단했다. 그는 다시 검에 마나를 둘러 나무를 써걱 베어 넘겼다. 모두 침묵했다. 그의 행위는 만일 그런 것을 원했다면, 자신의 무력으로 그걸 못했겠냐는 뜻이었다.
그의 무력은 압도적이라서 아무도 반론하지 못했다. 반대로 저들을 구하길 원했다면 그냥 구하고 말 것이지 어째서 굳이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는 것인지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엘이 이들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독단적으로 처리하고자 한다면 공작가의 영애를 비롯한 이들의 신고로 군대가 들이닥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체일 공작가의 영애를 비롯한 운송단의 호위들을 그냥 보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구속한다고 했을 때도 하루 안에 그들의 실종에 꽤 대규모 병력이 이 곳으로 들이닥칠 것이 명백했다. 정말 책임을 지고자 한다면 지금을 모면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고로 설득은 필수적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엘로서는 일이 이렇게 꼬일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로서는 이것이 자기 가치관을 존중하는 한에서 할 수 있었던 그나마 최선의 행위였다. 이후 어쩌면 그 오만한 여자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여간 엘은 일주일 이내에 체일 공작의 저택으로 찾아가기로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그리고 이틀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카린과 엘은 함께 체일 공작의 저택이 있는 스텍 지방에 도착했다. 간간히 야트막한 언덕이 있을 뿐, 드넓은 초지가 넓게 펼쳐지고, 많은 양들이 뛰노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엘이 이 일에 끼어든 건 전적으로 죽는 이의 숫자를 줄이려는 거였지 한쪽의 잘못을 없던 것으로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지랖과는 무관합니다. 끼어드는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역사는 민중의 것이다’고 말하는 녀석이 학살이 벌어지려는 걸 보고도 막지 않는다면 그게 훨씬 문제겠죠.
*댓글을 답시다~
*후, 이제 엔트 확정? (>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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