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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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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2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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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쓸쓸한 달(4)

DUMMY

저택에 도착했을 때, 간단한 연락이 있은 뒤, 두 사람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곧 일층의 한 큰 방에 도착했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소 하베디온의 집도 크고 화려했지만, 여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한 미녀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신다는, 꽤 시적인 정경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엘에게는 익숙한 얼굴로, 체일 공작의 딸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면서 책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카린이 힐끗, 보자니 ‘생산력와 인구증가’라는 제목을 가진 얇은 책이었다.


“아, 왔군요.”


엘을 보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엘은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엘 옆의 카린에게로 향했다.


“그쪽은?”


“제 여동생입니다.”


엘이 소개했다. 카린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린카라고 해요.”


“반가워요. 린카 양.”


그러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은 그녀가 이름을 되돌리지 않은 데서, 린카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 그리고 공작의 딸은 엘에게 물었다.


“그래. 산적 두목 노릇을 재미있었나요?”


“별로. 고될 뿐이지요. 거기에 대해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요청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세요.”


“신원 보증서를 몇 장 써 주셨으면 하는군요.”


공작의 딸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녀는 엘에게 물었다.


“괜찮지만, 무얼 할 생각인가요?”


“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먹고 살 길은 마련해 줘야 하겠지요. 처벌도 해야 할 테고. 어느 쪽이든 저 혼자서는, 그리고 그곳에서는 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 상 이동이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체일 공작가의 신원보증서라면 대부분의 검문을 그냥 통과하게 해 줄 것이다. 체일 공작의 딸은 엘의 말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들으면서 슬쩍 말했다.


“흐-응. 체일 공작가의 이름을 등에 업고 범죄라도 저지르면 곤란한데요.”


“걱정마시길.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엘은 단언했다. 그는 그들이 목적지까지 도착하도록 하는데 최면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이미 산채에 남아 있는 모든 인원에게 그곳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강력한 암시를 걸어뒀다. 엘의 최면은 강하지 않지만 평범한 이들이라면 자살을 명령하더라도 기꺼이 실행하도록 만들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다. 사고가 없기는 힘들겠지만, 나서서 범죄를 저지를 리는 없었다. 만일 범죄를 저질렀다면 오해이거나 누명이다. 그녀의 신원보증이 필요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얕보여서 이동하는 가운데 이용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도울 일이라는 것은?”


엘은 겉으로는 담백하게 표정관리를 했지만,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엘의 단언은 사정을 모르는 이에게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애초에 도적질을 하려던 놈들이다.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누가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최면에 대한 사실을 밝힌다면 상대와의 대화는 극히 어려워진다. 최면이란 자유의지에 작용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신뢰를 얻는 것을 방해하기 쉽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도움을 얻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간단히 해결됐다. 표정관리에 열심인 엘에게, 그녀가 말했다.


“단, 얼마 뒤에 황실의 충성스런 개, 두빌 장군이 이곳을 방문합니다. 시찰차 오는 것이지요. 틀림없이 군사력으로 시위를 할 텐데, 그 시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루스 유일의 소드 마스터가 그 위용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늙은이가 잘난 척 나대는 걸 본다는 건 고역스런 일이죠. 그러니 당신이 두빌 장군과 대결해 줬으면 하는군요. 보증서는 이후 써드리겠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확실히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약속도 지켜야 했고, 보증서를 얻을 수 있는데다 그 정도라면 가벼운 편이다. 그렇지만 엘의 표정은 깨끗하지 않았다. 전공이고 하니 싸우는 것은 상관없지만, 의아한 것이 있었다. 이곳에 왜 굳이 군사적인 시찰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루스에서 지방시찰을 하는데 군사력이 필요하다니, 의외로군요. 그러한 종류의 군사적 데몬스트레이션은 공화국과는 어울리지 않을텐데요.”


“후후. 기본적으로 그렇지만, 아루스는 꽤 넓은 국가죠. 권력을 지나치게 중앙에 집중시키면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는 효율이 무척 나쁘니 어느 정도 지방 자치를 허락함으로서 그것을 만회하고 있지요. 도시의 의회에 자치권이 恝㈄퓸?있는 것과 같다고 보면 돼요. 그건 지방의 행정기관은 지방의 인원으로 채워 넣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리고 지방의 모든 인간들은 그 지방의 권력자에게서 자유롭지는 않지요. 중앙의 바보들은 그래서 괜히 평화로운 이 지역을 들쑤시곤 하지요. 꽤나 민폐죠.”


공작의 딸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고압적이지 않은 태도라서, 그녀가 엘을 꽤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하기야 직접 엘의 강함을 보고서도 무시하거나 낮춰본다면 구제할 길이 없는 바보라는 소리다. 그때 엘 옆에 있던 카린이 화난 얼굴로 끼어들었다.


“오면서 봤는데, 별로 평화로워 보이지는 않던걸요.”


“응? 무슨 말인가요?”


“사람들 벌주는 방식 말이예요.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요? 아는 사람들한테 아는 사람을 벌하도록 하다니! 너무 잔인하잖아요!”


카린의 말은 높고 강했다. 오면서 보았던 장면에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엘은 카린을 말릴까 하다가 그만뒀다. 어느 정도는 동감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는 말려봐야 소용없다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딸은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떠오른 듯, 환한 웃음을 보이면서 카린에게 말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작년부터 이 지역의 법을 주로 공개처벌로 하도록 관습법을 살짝 바꿨었군요. 그런데 그게 잔인한가요? 제가 생각하기엔 매우 평화롭고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보는데 말이죠. 올해나 늦어도 내년 까지 의회에서 시끄러울 것 같아서 천한 것들에게 미리 손을 좀 써둘 필요도 있었고...”


“그게 무슨 효율-”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었다. 그게 카린을 더욱 화나게 했다. 어디가 평화롭고 효율적이란 말인가! 그건 벌을 받는 이와 벌을 주는 이, 양자의 마음을 찢어놓는 방식이다. 그러나 공작의 딸은 고혹적인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효율적이지요. 그렇게 해 두면 천한 것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니까요. 본디 천한 것들은 능력도 가진 것도 없기 때문에 서로서로 친하게 지내죠. 그렇지 않고선 빌어먹기 힘드니까. 번식 능력은 쓸만하지만요. 후후, 쥐새끼하고 비슷하죠? 그런데 천하고 무능한 것들도 모이면 꽤 귀찮단 말이예요. 주제에 서로 돕는답시고, 한 놈 쫒아내려면 다 함께 들고 일어나기도 하고...”


그리고 불쾌한 듯,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카린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공작의 딸을 슬프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 할아버지는 토지를 비우는데 꽤 고생하셨다고 해요. 안타까운 일이죠.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것 처럼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서로가 서로를 벌주도록 하게 하면,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할 테고, 믿지 않으니 돕지도 않겠죠. 다루기 편해지지요. 이게 효율적이지 않다면 뭐가 효율적인가요?”


“...아, 그, 대체...”


카린은 말을 더듬거렸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말이 말을 치밀고 올라와서 말을 도리어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즐거웠던지, 공작의 딸은 소리 높여 웃었다.


“깔깔, 정말 닮은꼴 남매로군요. 시시껄렁한 비렁뱅이 도둑놈들 구한답시고 귀찮은 일을 하려 들지 않나, 형벌 방식이 너무 잔인하지 않냐고 말하질 않나. 하지만 아가씨, 사실 이건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죠.”


“무슨 말도 되지 않는...!”


겨우 꺼낸 말이었다. 목구멍에 차오르던 대부분의 말은 전부 머리 끝까지 올라가 불 떼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여전히 공작의 딸은 유유자적한 태도로, 오만한 웃음을 선보이며, 향기로운 차와 함께 말했다.


“그게, 말이 된답니다. 이런 식으로 천한 것들 끼리의 연대를 끊어내지 않으면 불만이 있을 때 다 함께 일어나게 되죠. 지배하는 자들은 그들을 처리해야 하고 말이죠. 그때 그들은 모두 죽어야만 해요. 용서는 있을 수 없답니다. 그건, 반란이니까요. 그러니 반란이 불가능하도록 천박한 연대를 끊어놓는 것은 그들의 하찮은 목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못살게 괴롭히지 않으면 되지요!”


카린이 외쳤다.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그게 가능하다면 좋겠죠. 하지만 천한 것들은 어느 정도 배가 부르면 그 짓을 해서 애를 낳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지금이야 괜찮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루스가 아무리 발달해도 그들을 먹여살릴 수는 없게 될 거예요. 천한 것들은 제곱으로 늘어나는데, 기술은 아무리 발달해도 제곱으로 생산력이 증대되진 않으니까요. 추월당하는 것은 필연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을 헐벗게 만들어 자연적으로 도태 시키는 것은, 필수적이기 까지 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문명 자체의 유지를 위해서요. 그렇지 않나요?”


“......”


카린은 전신을 벌벌 떨면서 굳어 있었다. 분하고 분하고 분한데, 저 재수 없는 계집의 한 말을 박살낼 방법이 없었다. 공작의 딸은 카린이 대공 이후로 만난, 가장 재수 없는 현존재에 당당히 랭크될 만 했다. 아니, 재수 없는 거라면 어쩌면 어비스의 대공보다 위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때는 맞은 만큼 갚아 줬었으니까.


“후후, 오랜만에 이런 이야기도 다 해보고, 신선해서 즐거웠어요. 그만 가서 쉬도록 하세요. 방은 집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렇게, 공작의 딸이 이야기의 막을 내렸다. 완벽한 카린의 패배였다. 엘은 카린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려 진정 좀 하라고 옆으로 치우면서 공작의 딸에게 물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앞으로 무어라 부르면 좋겠습니까?”


“흐음, 그렇군요. 아직 제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요. 그냥 메르첼이라 부르세요.”


간결하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메르첼 양, 이만.”


그리고 엘은 카린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방을 나가고 문을 닫은 다음, 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삼좌 가운데 둘이 여자인데다 형식적이지만 최고 지도자도 여자고, 아루스 헌법의 최고 이념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라는 거라서 세키리아 같은 데와는 비교도 못하게 여권이 셉니다. 물론 지금 우리사회 정도는 아닙니다만.


*희망찬 같은 글은 안 될 겁니다. 그러려면 주인공을 좀 더 딜레마적인 상황에 몰아넣었겠죠. 뭘 선택해도 고통스러운. 프로파간다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글이라서, 그냥 편하게 읽으시면 됩니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빠는 일본만세 외치는 애들이 아니라 이영훈처럼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걸로 무장한 사람들이죠. 수량경제사 같은 책은 실제로 강력합니다. 허수열 교수 아니었으면... 음; 안 속기 위해서라도 공부는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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