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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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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1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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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1(3)

DUMMY

오늘은 운이 좋았다.


골리는 묵직한 가죽 주머니의 무게를 전신으로 느끼며 그렇게 결론지었다. 등으로 흠뻑 배어나오는 땀방울들도, 그 무게를 생각하면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무거운데 무겁지 않다? 이상한 말이지만, 당연한 말이었다.


그 무게, 일 그램 마다마다가, 내일의 밥이었으니까! 상납금을 모두 내고 나고도, 한참이 남을만한 그런 돈이었으니까! 언제나 멀건 죽만 먹으며, 가끔 검은 빵이나 씹었는데, 이제 하얀 빵을, 씹으면 그냥 녹아들어간다는, 그런 빵을 먹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 뿐이랴, 소시지! 그 많고 다양한 소시지들! 그뿐이랴, 그 많은 사탕과 케익들! 형형색색의 달콤한 음식들! 그런 것들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무게는 온전히 삶의 환희로 바뀌어줄 터였고, 그러니 축복받아 마땅한 무게였다. 역시 막 트리타스에 들어온 촌놈들이 사냥감으로는 최고였다. 히히, 하고 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소년, 거기까지.”


이런 말이 들려오기 전 까지는. 골리는 당황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뒤를 둘러봤지만 어두운 골목길을 연결하는 무채색 건물들의 모습이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유령이라도 본 것일까? 그때 탁, 하고 한 청년이 골리의 앞에 내려섰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깃털처럼 그의 동작은 표홀했다.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구나! 골리는 절망감을 느끼며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육체적인 능력을 보인다는 사실을, 여러 이야기를 통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그야, 네가 내 물건에 손을 댔기 때문이지.”


엘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뒤에서, 또 언제 등장한 것인지 모를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골리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두 사람 모두 자기보다 대여섯 살은 더 많아 보였다. 더구나 마나까지 다루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도망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잡혀서 필과 같은 꼴이 될 수는 없었다. 교수대라니! 그런 건 싫었다.


“여, 여기요.”


아쉬움과 긴장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골리는 가죽주머니를 눈앞의 청년에게 내밀었다. 청년은 묵묵하게 그것을 쥐었다. 다음 순간, 골리는 악독한 눈빛으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죽어! 이 새끼야!” 어린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살기어린 말이 동시에 나왔다. 골리의 소매 밑에서 금속성의 빛이 번뜩였다. “어-?” 다음 순간, 당황해서 골리는 뒤로 물러났다. 청년- 엘의 손에는 검이 쥐여 있었다. 그의 손 안에서, 그것은 부러지지도 않고, 손 모양을 따라 우그러져 있었다. 마치 치즈를 쥐어짠 것처럼 기묘한 모양으로.


“아아, 정말 마음에 안 드는군. 누구에게 배웠지?”


“배, 배우다니!”


골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조직을 끌고 들어가면 곱게 죽지도 못한다. 직접, 보았다. 그 공포는 뼛속에 각인되어 있다.


“네가 나를 찌르기 위해 사용한 자세나 수법은 혼자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하물며 이 검은 꽤나 좋은데다 새것이고, 찔리는 이를 되도록 확실하게 죽이도록 고안되어 있군. 어쨌건 너 같은 소년이 가지고 있기엔 어울리지 않아. 네 뒤에 있는 놈들은 누구지? 누가 너희 같은 애들을 소매치기로 훈련시키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살인이라도 하도록 교육시켜, 제 또래의 아이가 죽은 광장에서 그 아이가 죽도록 만든 원인이 되는 것을 시키고 있는 거지?”


엘은 차분하게 분노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기세는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 아이는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다가 결국 눈을 까뒤집고 말았다. 더러운 바지 사이로 흘러나온 뜨거운 액체가, 마찬가지로 더러운 골목을 적셨다. 옅은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카린이 아이에게로 다가가며 엘을 질책했다.


“엘, 너무 심하잖아!”


“아, 실수. 이런 아이들을 이 꼴로 만들어 배불리고 있을 놈들을 생각하니 그만. 쩝. 후, 하여간 아이들을 어떻게 훈련시켰기에 주저 없이 사람 배에 칼을 꽂을 수가 있을까?”


엘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키득키득 웃으며 말하는 그의 눈빛은 흥분에 타오르고 있었다. 카린은 조금 걱정스레 그런 연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기분 좋아 보인다?”


“그야, 아루스의 법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런 개새끼들은 씹어 먹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니까. 어쩌면 이 개새끼들이 아루스에 와서 만난 최초의 명료한 악이잖아?”


상큼하게, 엘은 말했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면서 흠칫흠칫 전율하는 게, 정말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엘에게는 아마 새디스트의 기질이 있는 것 같다고, 카린은 불안하게 생각했다.





“이 년! 이 개같은 년! 아니, 이 개보다 못한 년!”


빌로는 지방에 가득한 뱃살을 흔들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의 발밑에는 어린 소녀가 웅크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낡은 채찍은 핑핑 소리를 내며 대기를 휘갈랐고, 사람의 피부로 쩍쩍 갈라냈다. 섬뜩한 소리에 걸맞게, 거칠지만 어린 피부가 쩍쩍 갈라졌다. 그 장면 뒤에는 크고 작은 소년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일렬로 서 있었다.


“일주일째 상납금도 못 채우고! 뭐 이런 쓰레기 같은 게 다 있지! 생긴거나 좀 반반했으면 팔아버리기라도 하는건데, 그것도 못하고, 밥이나 축내는 개보다 못한 년! 필 그 새끼 처럼 뒈져버리던가!”


한참 채찍질을 하던 그는 분이 풀린듯 씩씩거리며 채찍을 벽에 걸었다. 기름기와 땀이 뒤섞여 그의 피부는 빛에 번들거렸다. 그는 뒤돌아보며 성난 얼굴로 아이들에게 외쳤다.


“니놈들도 상납금 밀리면 이꼴 될 줄 알아! 그리고 콜리 이 새끼는 뭐한다고 이렇게 늦어? 감시 보낸 놈 말로는 한건하고 잘 튀었다더니. 하여간 되는 일이 없어.”


소년들은 두려움에 흠칫, 몸을 좁혔다. 빌로는 그들의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다가 근처의 소파에 몸을 묻었다. 가죽 소파는 삐걱 소리를 내며 그의 육중한 몸을 받아들였다. 운동을 했더니 몸이 피로했다. 조금 있다 맥주라도 한 잔 하러 나가야지, 싶었다. 그리고 콰작,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나의 사랑하는 개새끼들아!”


나무 조각이 산산이 부서지며 방안으로 튀어들었다. 문이 박살난 것이다. 믿기 힘들었다. 철판을 덧대어 만든 문이었는데, 이렇게 과자처럼 부서지다니! 엄청난 힘에 우그러든 문은 선명한 발자국이 찍힌 채 빙빙 날아 벽을 박살냈다. 돌가루가 튀며 먼지가 퍼졌다. 문을 지키던 놈들은 모두 바닥에 뻗어 있었고, 아직 멀쩡한 놈들도 너무 의외의 사태에 어찌할바를 모르고 흠칫대고 있었다. 그 먼지를 헤치고 그림자가 걸어 들어왔다. 당당히. 너무도 당당히. 자신의 앞에 그 무엇이 거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는 듯, 당당히.


“막아!”


제왕의 보무에 전율을 느끼며 밀로는 외쳤다. 흠칫거리던 조직원들이 칼을 빼내들고 불청객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불청객, 그는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년으로 보였는데, 달려드는 이들을 보며 씨익 웃으며 검을 잡았다. 그리고 검집채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랑한다!”


검집에 허리를 맞고, 맨 처음 달려들었던 놈이 새우처럼 꺾인 채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소년은 킬킬대며 당당한 걸음을 이었다. 옆에 있던 조직원이 악에 받쳐 공격했고, 보조를 맞춰 뒤쪽에서도 소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빌로는 저 공격은 그가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안도의 웃음을 보였다.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라도, 한명 이상은 상대하기 힘들테니까. 어설픈 자비심으로 검을 검집에서 안 꺼낸게 실수였다. 그러나 그 소년은 불길하게 킬킬 웃으며 또다시 검집채로 휘둘렀다. 단 일격에, 달려든던 두 사람의 네 팔목과 어깨는 수수깡처럼 으직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아, 이 상쾌함!”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소년은 기분좋게 외치며 걸었다. 소풍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제서야 빌로는 그가 검집에서 검을 꺼내지 않은 것은 자비(慈悲)라기보다, 두들겨 패고 싶어서 그랬음을 알았다. ‘자비’하고는 꽤 거리가 먼 성품으로 보였다. 그의 보폭은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한번도 변한 적이 없이 일정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조직원들은 덤벼들지 못했다. 쾌감에 뒤섞인 살기가 물씬물씬 피어오르고 있었다. 험한 짓도 많이 하고 살았지만, 이런 미친놈은 그들도 본적이 없다.


“너희 같은 개새끼들 덕에, 세상이 그나마 명료해지니까!”


하지만 저항한다거나 저항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는 일정한 보폭으로 들어와 움직이며, 한명한명, 검집채로 두들겨 팼다. 그의 일격은 육중하고 아무도 피하거나 받아내지 못했다. 다리뼈가, 갈비뼈가, 팔뼈가, 마치 마른 비스킷이 부서지듯 부서졌고, 맞은 자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두려움에 움직이지 못하는 빌로의 앞에, 마침내 그 소년이 도착했다. 그는 소파의 팔걸이에 발을 턱 하니 올려놓고는, 빌로을 바라봤다. 가학적인 기대에 빛나는 그의 표정은 무서웠다.


“으, 으으으, 사, 살려주세요..”


소년의 정체가 무엇인가, 라거나 목적이 무엇인가, 라거나 물어볼만한 질문은 많았다. 특히 지부이긴 하지만 부장의 지위에 있는 간부라면 위엄을 위해서라도 그런 질문을 앞세웠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 들어오면서 소년이 보여준 힘은, 그 명료한 힘의 우위는 그럴 의지를 꺾었다.


“-저게 다냐?”


검 손잡이 끝으로 빌로의 턱을 올리며, 엘은 물었다. 그의 검집 끝은 빌로의 뒤에서 공포에 질린 채 늘어서 있는, 소년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


“재들이 다냐고.”


“여, 여기는 저 애들이 답니다.”


빌로는 답했다.


“여기는? 그럼 다른 곳도 있단 말이군. 어디야?”


“어, 어디라니요?”


다른 거처를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간부로서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공포에 공포가 대항했을 뿐이다. 그랬다가는 죽을 테니까. 엘은 싱긋 웃는 얼굴로, 온화한 어조로, 빌로에게 말했다.


“비루먹을 개새끼야. 다 들었으니 발뺌하지 마! 고아원이나 수용소에서 애들 사들여 소매치기나 앵벌이 시키는 악마 같은 새끼들이 너희들 말고 또 어디에 있냐고! 또 말하게 만들면 그때마다 사지 하나씩 받아간다.”


“그, 그건-”


빌로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을 멈칫거렸다. 어떻게든 이 미친놈을 속여 시간을 벌어야 했다. 시간을 충분히 번다면, 윗선에서 사람이 올테고, 그러면 이 미친놈을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의 윗선에는 마나를 다루는 전투요원도 있다. 엘은 그의 표정을 보다가 싱긋, 웃었다. 빌로는 그 웃음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다음 순간, 서늘함이 그의 팔을 스쳤다.


“꺄아아악!”


서늘함은 금세 고통과 공포로 바뀌었다. 바닥에 육중한 고깃덩어리가 팔딱이고 있었다. 잘라진 단면에서 피가 왈칼왈칵 쏟아졌다. 엘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그의 팔을 잘라낸 것이다. 그는 지루한 표정으로 검을 검집으로 회수하며 말했다.


“아아- 검날은 너무 깔끔하게 베여서 재미가 없군. 하여간, 나는 별로 착한 사람이 아냐. 인내심도 대단치 못해. 더구나 이 나라에 도착해서 쌓인 것도 많아. 그걸 명심하는 게 좋아. 죽음은 삶의 최저점이 아니니까. 다음에는 검집으로 사지를 찢어내는 묘기를 보여주지.”


엘의 눈을 보며, 빌로는 이 미친 소년이 정말로 그렇게 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죽는 것 보다 못한 꼴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분노로 타오르는, 하지만 냉정한 눈길은 틀림없는 보증서였다. 그는 저항을 포기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적절한 깽판.


*희망을 위한 찬가는 이번 챕터를 끝내고나면 좀 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른 이 물건을 출판사에 넘겨주고 싶군요.


*기탄없는 의견수렴중! 글을 퀄리티를 위해 도움을 제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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