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제3계급(8)
“황녀님을 뵙습니다.”
로비노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접시를 들고 있던 카린은 서둘러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동작은 정중하고 부드러워 그윽한 기품을 느끼게 했다. 멀거니 서 있던 엘은 옆에서 카린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로비노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노점상의 벌금을 대신 내어 주셨다지요?”
“어쩌다 보니, 그런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카린의 답은 막힘이 없고 당당했다. 황녀에 밀리지 않는 고결한 모습이었다. 황녀 옆에 서 있던 소 하베디온은 다시 한 번 카린에게 매력을 느꼈다. 엘도 감탄해서 살짝 휘파람을 불었다. 사실 카린이 이런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별로 없다. 그녀는 지금 황녀에 대한 적대감에 일부러 잘 안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아루스의 대표로서 감사드립니다.”
“감사받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현존재가 현존재를 돕는 것은, 현존재의 의무 같은 것일테니까요.”
준비된 동작과 함게 카린이 황녀의 말을 받았다. 로비노스의 눈으로 이채가 스쳤다. ‘현존재’라는 말은, 아루스의 공식적인 행사에나 가끔 나올까, 일상적으로 학자들이 아니고서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다. 그녀가 아루스 출신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한 일이다. 황녀는 그녀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두 사람을 굳이 만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로비노스는 햇살을 닮은 미소를 선보이며 용건을 꺼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옆에 계신 호위 분께서, 하베디온 시장의 아드님과 시합을 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시합요?”
생각지 못했던 요청이라 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로비노스 황녀는 정중하지만 굽힘없이 위엄 있는 태도로 부탁을 이었다.
“철없는 부탁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키리아의 가장 귄위 있는 기사 시합에서 우승하신 분의 실력을 견식할 기회는 많지 않고, 소 하베디온씨의 말에 따르자면, 저 같은 문외한으로서는 비견할만한 상대가 있을 때에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군요. 물론 그냥은 아닙니다. 받아들여 주신다면 내어주신 벌금의 두 배를, 그리고 만에 하나 소 하베디온 씨를 이기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내의 부탁을 뭐든 하나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카린이 답하기 앞서, 엘이 성큼 나섰다. 로비노스 황녀의 눈이 약간 커졌다가, 알겠다는 듯이 만족스럽게 살짝 좁혀졌다. 그녀는 엘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물었다.
“감사합니다. 성함이?”
“엘이라고 합니다.”
엘의 답은 간결했다.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황녀의 질문에 이름만 가져다 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예의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황녀의 미소는 도리어 짙어졌다. 그는 이 기묘한 커플, 그리고 남자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는 확실히 예의 같은 것과는 친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잘라 말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졌다. 더구나 주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답하는 호위라니, 그런 호위를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의 미소는 그녀가 아는 누구보다도 오만했다.
“엘씨, 제안을 받아들여 주신데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의를 표한 다음, 황녀는 시선을 돌려 소 하베디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분이라면 괜찮겠지요?”
소 하베디온은 어떻게 답하면 좋을지 잠깐 멈칫하다가, 곧 “물론입니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의 실력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마나를 다루는 자로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고, 평소 그의 어딘가 건방진 태도가 불쾌하기도 했다. 더구나 황녀님에 대한 이 무례라니! 소 하베디온은 이번 기회에 그를 확실하게 눌러 격차를 확인시켜주고 무모하게 까칠까칠한 태도를 수정시키고 싶었다.
“그럼, 건물 밖으로 나가도록 할까요.”
도도하게, 황녀가 좌중을 아우르며 말했다. 사람들은 무리지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엘은 그 장면을 보고 감탄했다. 황녀라는 지위의 탓이 크겠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존재감의 수준이 확연히 달랐다. 이어, 그도 카린과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무슨 생각이야?”
“별로. 그렇지 않아도 하베디온에게 선물을 줘야 하는데, 좋은 기회다 싶어서 말야.”
“음- 다치겐 하지마.”
“두고 봐야지.”
두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했다. 그리고 엘과 소 하베디온은 정원의 넓은 공터에 마주 대치하고 섰다.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주변을 감쌌다. 서빙 요원들이 바쁘게 회장과 정원을 오가며 간단한 음식을 운반했다. 잔디가 바람에 날려, 엘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소 하베디온이 천천히 검을 꺼내 자세를 취했다. 햇살이 검 위에 앉으며 눈부시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엘은 휘파람을 불었다. 처음 류디스를 만났을 때 보았던 자세보다 훨씬 정리된 폼세였다. 사람들이 감탄한 얼굴을 했다. 대 하베디온이 멀지 않은 곳에서 자랑스런 얼굴로 아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엘이 따라서 검을 빼어 들었다. 디 세리온의 검 날도 마주 빛을 발했다. 엘의 검을 보고 소 하베디온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의 검이 명검이라는 것은 놀랄 것이 못 되었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은 검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지우고 엘을 향해 말했다.
“먼저 오십시오.”
“사양 않고.”
엘은 달렸다. 그의 동작은 무게가 없는 것처럼 가벼웠다. 사람들이 오오- 하고 감탄했다. 황녀의 눈으로도 놀람이 스쳤다. 소 하베디온의 눈은 흔들림이 없다. 그가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굳이 자신만큼 마나에 민감하지 않더라도, 카린과 같은 소녀를 혼자서 호위할 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검을 들어 올렸다.
-카앙!
검이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소 하베디온의 검은 짙은 자색(紫色)의 아우라에 휘감겨 이글거리고 있었다. 엘은 서둘러 뒤로 검을 빼며 몸을 물렸다. 소 하베디온이 엘을 쫒으며 검을 종으로 휘둘렀다. 엘이 서둘러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그의 검이 강한 강철음을 내며 뒤로 밀렸다. 엘은 휘청, 뒤로 발자국을 옮겼다. 그의 검격은 선명하고 부드러웠지만 검을 둘러싸는 아우라가 소 하베디온에 비해 희미했다.
“헛점!”
하베디온은 여유롭게 외치며 한 발자국 앞으로 길게 내딛으며 검으로 찔러 들어갔다. 자색의 아우라는 바늘처럼 모이며 엘을 노렸다. 엘은 어렵사리 몸을 돌려 그 공격을 피했다.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엘의 등을 자색의 검격이 스치고 지나갔다. 명백히 소 하베디온의 우세로 보였다. 오오- 하는 감탄성이 높게 퍼졌다. 대 하베디온이 뻐기는 얼굴을 했다. 황녀는 카린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초조해 하는 기색을 볼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황녀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 잠깐 사이에서도 숨막히는 대결이 이어지고 있었다. 방금 엘이 뒤로 돌아가며 겨우 차지한 일순간의 틈을 이용해 소 하베디온의 팔을 노리고 빠른 검을 내질렀지만, 대기를 섬뜩하게 찢으며 날아간 그 검은 소 하베디온이 팔을 어려운 각도로 휘저으며 막아내자 검 옆구리를 얻어맞고 튕겨나갔다. 다시 사람들이 소 하베디온의 정교하고도 강력한 검술에 감탄의 목소리를 울렸다. 엘에게 기회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절호의 기회를 잃은 엘은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의 입가로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마저 물려 있었다. 마치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감히!’
소 하베디온은 불쾌함에 눈썹을 좁혔다. 지금가지 그가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자신이 그의 체면을 어느 정도 고려한 덕분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정도의 마나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엘이 지금가지 자신과 검을 마주 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나의 짙기는 단순한 검의 공격력을 넘어서 반응속도를 비롯한 동작 전반에 크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소 하베디온은 다음 일격에 끝내기로 결심하고 마나를 한층 활성화 시켰다. 검 끝으로, 자색의 아우라가 한층 강렬하게 뻗어 나왔다. 그 아우라의 길이만큼 대 하베디온의 콧대도 같이 높아졌다. 그는 엘을 향해 달렸고, 검을 휘둘렀다.
‘어?!’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것은 거대한 충격이 아니라 허공을 벤 허망함이었다. 당황한 그는 얼른 자세를 취하며 다음 공격을 이으려 했지만 눈앞에 이미 엘이 도착해 있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시선을 움직여 자세를 정리할 것인지 알고 있다는 듯한 대처였다. 소 하베디온은 당황하며 검을 들었다. 엘의 검격이 이어졌다. 소 하베디온은 걱정하지 않았다. 강화된 그의 검이라면 그의 검격 정도는 간단히 방어할 수 있다. 카앙! 금속의 충격소리가 높에 퍼졌다.
‘큿!’
소 하베디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의 검이 노린 것은 처음부터 그의 손이었고, 미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소 하베디온은 제대로 그의 공격을 방비할 수 없었다. 손과 검 손잡이를 마나로 보호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엘은 그 허점을 노리고 들어왔다. 성급한 방어에 소 하베디온은 균형을 잃고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주변에서 놀란 탄성이 터져나왔다. 황녀의 표정도 흥미롭게 변했다. 엘은 뒤쫒아 그를 공격했다. 마나가 얼마 깃들지 않은 그의 검은, 하지만 하베디온의 허점 곳곳을 노리고 날았고, 하베디온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막을 수 없었다. 방금 전 까지의 공세가 거짓이었던 양, 그는 완전한 수세에 몰렸다.
속도와 무게, 어느 것도 자신의 검격에 비할 수 없었다. 엘의 검은 느리고 가벼웠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느리고 약한 엘의 검은 소 하베디온의 검이 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들었다. 소 하베디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공격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의 검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 처럼 움직였다. 그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검이었다.
‘-이길 수 없다.’
간단한 결론이 그의 머릿속을 장식했다. 맞힐 수 없고, 맞아야만 한다면, 패배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황녀 앞에서, 카린 양 앞에서,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많은 대중 들 앞에서 훨씬 더 적은 만나 밖에 다루지 못하는 이에게 이렇게 무참하게 패배하게 될 줄이야- 소 하베디온은 악에 받쳐, 마지막 검격을 휘둘렀다.
“이야야앗!”
검 끝에서 자색의 아우라가 다시 한 번 길게 뻗으며, 엘을 향해 쇄도했다. 아무런 기교도 없는, 순수하게 파괴력만을 추구한 검격이었고, 그래서 무시무시한 검이었지만 어린애라도 피할만한, 너무도 정직한 검이었다.
*아루스 공화국은 공화국이 된지 천년입니다. 초반에야 되게 싸웠죠. 과거에도 적잖게 싸웠고, 지금도 아루스의 출판물은 교역금지 대상이고, 소지만으로도 타국에서는 심각한 처벌 대상입니다. 일전 로시테아가 삼좌를 완전한 구라 비슷하게 취급했던 것은 어느 정도 그런 정보공작 때문이기도 하죠. 음... 스포일러?
*다들 즐거워 하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니 참고하게 많은 의견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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