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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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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1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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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새로운 제3계급(10)

DUMMY

침묵이 예리했다. 카린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황녀와 엘을 번갈아 쳐다봤다. 짧은 대치가 있은 다음, 엘은 별반 동요를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흐응, 그 대답으로, 이후에 큰 곤란을 겪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지 않으시나요?”


황녀가 물었다. 실제적인 권력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이 나라의 정점에 있는 존재다. 그녀의 의혹을 사고서도 앞길이 평안하길 기대하기는 힘들다. 가볍게 흘리는 한 마디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뀌게 할 정도의 힘은 있다. 엘은 여전히 동요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황녀님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겠지요.”


황녀는 잠깐 침묵했다. 엘의 지적대로였다. 처음부터 특별한 조치를 취할 생각은 없었다. 말하자면 이 자리에 그녀가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호기심이다. 그러나 설령 중대한 의혹을 품고 있었더라도 그 의혹에 따라 조처를 취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엘의 기묘한 신뢰는 이상하게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황녀는 미소 지으며 한 발짝 양보해서 물었다.


“그럼 이건 답해 주실 수 있겠지요. 왜 답할 수 없는 것인가요?”


그러나 이번에도 엘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보였다. 지금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최초의 질문에 답하는 것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신분을 숨기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들의 신분이 너무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루스의 황녀라 해도 올려다보아야만 할 정도로 엄청난. 그걸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것도, 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엘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카린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엘이 ‘미안한’ 표정을 짓다니! 별것 아니라면 아니지만, 여성을 향한 것이라 카린으로서는 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이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는 게 꽤 대단한 성의표시란 걸 모르는 황녀로서는 엘의 말이 그저 무성의한 대답으로만 들렸고, 자신의 양보가 짖밟힌 것 같아 불쾌했다. 그래서 카린으로서는 다행스럽게,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그 어려움에 대한 이유는 들을 수 있을까요?”


엘은 반색했다. 이건 답하기 어렵지 않았다.


“황녀님이 불쾌해 하실 것 같아서입니다.”


대답을 들은 황녀는 온화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맑은 종소리처럼 청아하고 듣기에 좋았다.


“호호, 그런 이유라면 괜찮으니 말해보지 않겠나요? 화내지 않는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엘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 그렇다면 답하겠습니다. 저희 정체를 알기에, 황녀님께는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언어는 사태를 향해 우회함 없이 냅다 직선으로 내려 꽂혔다. 침묵이 싸늘하게 흘렀다. 카린은 속으로 ‘와~’하며 그 싸늘함을 즐겼다. 황녀가 억눌린 어조로 말했다.


“...확실히. 꽤 모욕적인 이유로군요.”


그리고 황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은 조금 당황했다.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던가. 저것은 어떻게 봐도 화내고 있는 태도였다.


“아니, 절대 그럴 의도는-”


“괜찮습니다. 저는 화나지 않았습니다. 이만 가도록 하지요. 앞길에 삼좌의 축복이 있기를.”


황녀는 냉랭하게 말을 던지고 성큼성큼 걸어 방을 빠져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하고 그녀의 뒤에서 카린은 밝게 인사했다. 콰앙! 하고 거세게 닫히는 문소리가 따가웠다. 엘은 당혹스런 얼굴로 카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음,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


“아니, 전혀 없어!”


해맑은 얼굴로 카린은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높고 맑아서, 황녀의 목소리만큼이나 듣기 좋았다. 엘은 “큼”하고 콧소리를 흘리면서, 머쓱하게 귀밑머리나 긁어볼 뿐이었다.





진수식이 끝나고 이틀이 지났다. 황녀는 엘과 헤어진 직후 시를 떠났다. 그녀의 떠나는 표정이 불편해서, 시의 관계자들은 모두 안절부절했다고 한다. 하여간 어제 밤의 불꽃 축제는 화려해서, 테라스에 선채 엘과 카린은 꽤 좋은 시간을 보냈다. 검술 승부 이후 소 하베디온은 방에 줄곧 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날 불꽃 축제를 특히 성대하다며 감탄했다. 사실은 불꽃을 바라보던 카린이 마법으로 살짝 장난을 쳐 더 화려하게 연출했던 덕분이었다. 어제 불꽃의 제작자는 할 줄 모르는 걸 할 줄 안다고 소문이 나서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진수식도 끝났고 떠날 때가 되었다. 오늘 아침 하인을 통해 황녀가 하사했다던 포상금이 도착했다. 노점상의 벌금으로 냈던 금액의 정확히 두 배였다.




“-아직 안 끝났어?”


문밖에 기대?서서 엘이 지루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만!” 이라는 대답이 재깍 돌아왔다. 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카린의 ‘잠시’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무척 궁금했다. 옷 갈아입고 치장한다고 엘을 쫒아보낸 카린은 엘에게 일곱 번째 ‘잠시만’이라는 대답을 되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여길 나서면 얼굴을 마법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데, 일부러 이렇게 열심히 치장하는 이유도 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카린의 말을 들어보자면 또 그게 그런게 아니라고 한다.


“응?”


엘의 감각에 한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잡혔다. 정리된 걸음걸이가 잘 훈련된 무인임을 짐작케 했다. 엘이 알기에 이 저택 안에서 그런 걸음걸이가 가능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소 하베디온이다. 그의 예측처럼 곧 모서리를 꺾어 걸어오는 소 하베디온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엘 앞에 섰다. 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기다렸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검을 어디서 보았던지 기억했습니다. 마스터 로시테아의 검과 닮았더군요. ‘디 세리온’이라 하는, 명검이었습니다. 그런데, 세키리아 기사 시합에서 마스터를 뵈었을 때, 그분의 검은 디 세리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엘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가 애매한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디 세리온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날이야 그대로 쓰지만 손잡이 부분은 변형을 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다. 맹점이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미안하지만 알려줄 순 없군.”


소 하베디온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그는 엘이 이렇게 반응하리라 생각했다. 이틀 전에 접했던 그의 검은- 아득하고 거대해서, 도무지 자신이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명백한 패배감 속에서 그가 자신의 승리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이기고 싶었다기 보다 엘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소 하베디온은 깊게 심호흡을 한 다음 엘에게 말했다.


“...지난 이틀 동안 방안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검술에 대한 저의 세계관 전부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무엇보다, 검을 다룬다는 행위가 이를 수 있는 정점에 대한 저의 관념 자체를 재고해야 했습니다.”


엘은 휘파람을 불었다. 세계관의 재고라니! 그저 기교나 하나 둘 가르쳐줄까 생각했는데, 소 하베디온은 엘이 생각지도 않았던 것 까지 이루었다. 어쩌면 머지않아 그는 마스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루스는 두 번째 마스터를 얻게 될 것이다. 소 하베디온은 한숨을 쉬며 무겁게 말했다.


“저는, 너무 큰 것을 얻었습니다. 도무지... 갚을 길이 없는 빚입니다.”


검을 깊이있게 수련했기에, 그는 자신이 얻은 것을 안다. 하지만 엘은 담백하게 고개를 저었다.


“빚이 아냐. 너는 네 그릇만큼 얻었으니까.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그저 너와 싸웠을 뿐이지.”


“그러나...”


“그 동안 네 덕분에 편하게 지낸데다 황녀님도 만나 뵐 수 있었고, 내 여자 친구는 오래도록 한 곳에 갇혀 지낸 탓에 행사 같은 걸 좋아하고 사람들 주목 받길 즐기는 성격이야. 그래서 생각지도 못하게 네게 미안한 짓을 했는데, 그 사과를 겸한 거지. 저래 뵈도 사실은 숙맥이거든.”


엘은 방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방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니, 부산스럽게 느껴지던 기척도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소 하베디온의 얼굴 보기가 미안한지 카린은 아주 없는 척을 하고 있었다. 엘의 설명에 소 하베디온의 얼굴이 슬픔에 쓸쓸하게 젖었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길게 쉬었다가,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 그랬습니까?”


소 하베디온의 ‘역시’는 다른 것 보다는 카린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조는 전체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엘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의외로 담담하네?”


“당신의 진정한 실력은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호위 정도로 착각할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으음, 그래도 첫사랑이었는데, 되게 쓰리군요.”


쓴웃음을 머금으며 소 하베디온은 말했다. 엘은 얼굴을 험상궂게 했다.


“넘보면 화낸다. 큼, 다만 내가 해 준걸 고맙게 여긴다면 부탁하고 싶은 건 하나 있어.”


“...뭐든지.”


카린에 대해 말하는 엘의 태도에 잠깐 쫄았다가,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며 소 하베디온은 정중하게 그에게 말했다. 엘의 실력도 실력이고, 그에게서 얻은 것도 큰 것이라 자연히 엘을 대하는 소 하베디온의 태도는 정중했다. 사실 엘의 자연스럽게 오만한 태도도 더해져 도무지 그가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라고는 생각도 못한 탓도 있었다. 소드 마스터쯤 되면 육체의 노화가 늦어지거나 역전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좀 더,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었으면 해. 너무 냉정하게 딱딱 잘라내지 말고. 가능하면 강해지고 나서 그 힘도 그런 방향으로 사용해 주었으면 하고. 겪어 봤으니 이제는 알겠지만 사소하거나 시시해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강한 힘을 발휘하거나 중요할 수 있는데다, 강자가 언제까지 강자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으음...”


엘의 말을 듣고 소 하베디온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이틀전 엘의 검은 강자로서의 자신감을 가지던 그의 자존심을 완전히 박살냈다. 그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치졸한 잔기술 같은 것들을 사용해서.


“제 3계급은 무엇인가? 그들은 모든 것이다! 그들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 제 3계급은 무엇인가?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모든 것에서 배제되어 있다! 제 3계급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대단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씨익 웃어보이더니, 엘은 그렇게 읊조렸다. 소 하베디온도 아는 문장이었다. 상인들이 모이면 자주 입에 올리는 글이라서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소 하베디온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그 글의 제목을 중얼거렸다.


“새로운... 제 3계급이군요.”


“그래. 네가 안내해준 서점에서 산 재밌는 소책자의 결론이지. 하지만 이곳에 와서 내가 보기로는, 새로운 제3계급이라기 보다는 제2계급이 되고자 하는 제3계급이 그렇지 않은 제3계급과 섞여 있을 뿐인 거 같았으니까.”


“으음...”


소 하베디온은 침음했다. 그의 말은 사태를 너무 단순화했다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틀린 말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엘은 말을 이었다.


“각자는 각자가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아마도 옳겠지만, 사람이 용도 아니고, 너무 가혹한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하니까.”


사실은 용에게도 힘들지 모른다. 여행 초반에 만났던 용은 어지간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소 하베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고마워."


엘은 드물게, 그렇게 답했다.


*챕터 끝!


*소 하베디온 별로 악당도 아니었고, 건방지지도(사상은 꼬롬) 않았는데, 악역으로 확고히 이미지 결정하신 분이 적지 않아서 당황. 역시 카린을 노려서 마이너스 점수가 쎘나 봅니다. 그러고보니 클라우스 학원에서 위록도 같은 경우를 당했죠. 음.(...)


*그리고 엔트라니! 제가 엔트를 좋아합니다만, 걔들은 전부 늙은이 아닙니까! 저 같은 명랑청년에게 그 무슨 폭언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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