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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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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0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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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쓸쓸한 달(8)

DUMMY

다음날 아침 날씨는 상쾌했다. 햇살은 맑았고, 만물은 약동하는 생의 의지로 충만해서, 기화하는 이슬조차도 다음 생명을 위한 기운찬 예비로 보일 지경이었다. 창망한 하늘은 하얀 구름의 유장한 흐름과 더불어 그러한 약동을 한층 떠미는 것 같았다.


...엘에게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후아.”


그러한 감흥과 함께 아침 수련을 계속하는 엘의 동작은 실제로 그 자신이 오늘 아침 풍경에 담은 감상과 같은 경쾌함으로 충만해 있었다. 마나를 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엘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이긴 했다. 하나, 그 인간적인 동작의 끝 결에서 묻어나오는 튕겨짐은 무게감 없이 세상을 누비고 있었다. 카린은 멀지 않은 곳의 큰 바위 위에 앉아 엘의 수련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나를 운용하지 않은 동작이라 평소보다 재미는 없었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꽤 즐거운 모습이었다.


“멋지군요.”


약간 먼 곳에서, 엘의 수련에 대한 감탄이 작은 손뼉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엘은 자연스럽게, 카린은 깜짝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르첼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은 간단히 목례했다. 그의 목례를 받으며, 메르첼은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경멸이 섞인 어조로 엘에게 물었다.


“후후, 어제 보여준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군요. 정말 놀라워요. 당신의 본 모습은 어느 쪽인가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요. 당신에게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잖습니까.”


엘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간결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엘은 조금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까지 메르첼을 알아온 바, 그녀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런 모습을 보인 정도로 자신에게 공격적인 대화를 요청해 온다는 것은, 그녀답지 않은 것 같았다. 메르첼은 물러서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그럴 수 있겠지만, 저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든요.”


“...후. 정직은 확실히 중요한 덕목이겠지요. 하지만 정직을 주장하기 전에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는 덕을 좀 더 생각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엘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메르첼의 말을 받아넘겼다.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궁지에 모는 주제에 정직을 강요하다니!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정직의 목적은 정의일진데, 그녀의 행위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메르첼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저는 아루스의 국민이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루스야말로, 욕망만이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라는 것을, 아무런 위선 없이 인정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국가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까. 하기야, 승리하는 것은 욕망이라는 게 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제가 어떤 사람이든 이제 상관없지 않습니까? 원하신대로 싸우지요. 그리고 이기겠습니다. 그러니 신원 증명서를 발행해 주시면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엘은 냉소적으로 답했다. 어지간하면 겉으로나마 예의바른 태도를 유지했겠지만, 어비스의 악마들이 연상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속에서 견디기 힘든 화가 치솟았던 때문이다. 메르첼은 엘의 태도에서 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느끼고 그를 한번 쳐다보는데서 그치고 멀어져 갔다. 엘은 세리온을 늘어뜨리며 투덜거렸다.


“쯧, 기분 다 잡쳤군. 오랜만에 상쾌했는데.”


카린이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엘 곁으로 쪼르르 쫒아와서는 메르첼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저 여자가 왜?”


“음, 아니야.”


무언가 말을 하려던 카린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엘은 왼손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잘 정리된 금발을 부스스하게 만들면서 대단히 위험한 말을 했다.


“키도 작은 게 싱겁긴.”


가슴과 키는 카린에게 있어 조금 콤플렉스다. 그녀의 키가 결코 여자 가운데서 작은 것은 아니지만, 용의 인간체 평균으로 따지면 가슴과 함께 좀 모자라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다. 그래서 당장에 카린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고, 주변 사물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미 주변으로 소리와 영상의 전달은 차단되어 있다. 엘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침 훈련이 빡세질 모양이다.




합동 훈련은 스펙의 돌산 근처에 있는 황무지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지방군과 중앙군은 막사를 건설하고 포진해 있었다. 다 합쳐 일만에 달하는 인원이 흉흉하게 대치하는 장면은 상당히 볼만한 것이다. 무기의 날을 봉하고 실시하는 훈련이라고는 해도 자존심이 걸린 기 싸움이라 죽는 사람도 드물지 않게 나왔다. 본부에서는 이번 훈련에서도 3명 안팍의 사상자를 생각하고 있었고, 무사고를 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오늘 있을 비무도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고, 이미 무대 마련도 끝나 있었다. 무대라고 해도 거창한 게 아니고, 간단하게 깃발을 꽂아 범위를 정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했고, 대신에 층층이 나무로 만든 단을 쌓아 구경하기 좋도록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여간 지름이 100m정도 될 듯한 원형의 공간 주변으로 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 무대 중앙에서, 엘은 이미 나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음. 아직도 어깨가 뻐근하네.”


그는 한쪽 팔을 다른 쪽으로 누르며 쭉쭉 펴고 있었다. 카린 덕분에 아침 훈련을 지나치게 뻑적지근하게 했다. 팔을 다 푼 다음 엘은 폴짝 폴짝 뛰며 다리를 폈다. 아침에 좀 과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과거 사부와 훈련할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엘 정도의 실력이면 스트레칭이 무의미했지만 기분상의 문제였다. 몸이 전체적으로 가벼워 기분이 좋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엘이 스트레칭을 끝낼 때쯤이 되어 맞은 편에서 두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검을 쥔 채, 가벼운 복장으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위압감이 있었다. 중앙군에서는 와- 하고 큰 함성을 내질렀다. 지방군 측에서도 별반 호응은 없었지만 웅성거리며 두빌의 등장에 긴장된, 그리고 존경어린 시선을 보냈다. 지금이야 자군의 자존심을 걸고 싸우고 있지만 그들은 아루스의 시민이며, 아루스의 기치아래 통합되는 군인들이다. 엘은 싱긋 웃으며 두빌에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일찍 나온 거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군.”


그리고 두 사람은 검을 들어올렸다. 특별히 시합을 주관하는 사람은 없었다. 두빌 자신이 그런 것에 기대지 않아도 좋은 강함과 공정함을 겸비한 때문이다. 심판은 이후 있을 장교 시합에서부터나 필요하다. 긴장이 스쳤다. 구경하던 이들이 모두 조용해 졌다.


“핫!”


동시에, 한 줄기 기합이 튀어나오며 엘과 두빌의 검이 맞부닥쳤다. 쿠앙!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섬전 같은 그림자는 서로 맞은편에 착지한 채 몸을 돌렸다. 관전하던 이들로서는 색이 다른 두 빛이 번쩍였다는 것 밖에 인식하지 못했지만, 일검의 교환으로 당사자인 두 사람은 상대의 실력은 알았다. 그렇지만 지방군 쪽에서는 내심 어디서 굴러먹던지 모를 놈을 대표랍시고 보낸데 따른 불안이 이로서 일소된 지라 와- 하고 환호의 함성을 높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두빌은 천지가 뚫린 듯 시원한 표정으로 엘을 바라봤다.


“껄껄. 정말로 놀랍군. 놀라워, 자네 나이에 이런 성취라니! 로시테아라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네.”


“장군이야 말로, 대단한 검이었습니다.”


엘도 순순히 그렇게 말했다. 그는 로시테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뛰어난 검기를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으로서 엘이 만난 로시테아 다음으로 강한 사람에 틀림없었다. 물론 엘의 사부도 인간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있기에 계산에 포함하지 않았다.


“자, 또 감세.”


두빌은 검을 들고 발을 박찼다. 그는 석궁의 쿼렐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 엘에게로 접근했다. 엘은 그를 피하지 않고, 간단한 심호흡과 함께 그의 검을 정면으로 받았다. 쾅! 폭음이 나며 엘이 발 디딘 뒷부분의 땅이 움푹 꺼졌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두빌은 거기서 공격을 끝내지 않고 엘을 향해 박치기를 시도했다. 엘은 이번에도 피하지 않고 도리어 목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세게 내밀어 그 박치기에 응했다. 퍽! 새된 소리가 나며 양자의 머리가 충돌했다. 두빌이 어지러운 듯 왼손으로 눈을 감싸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네, 돌이군.”


“무슨 실례의 말씀을! 단지 머리 쪽으로 마나를 좀 운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엘이 두빌을 향해 뛰어올랐다. 두빌은 검을 들어 엘의 공격에 대비했다. 검과 검이 동시에 또 충돌했다. 쿠앙! 반발력에 두 사람은 서로 튕겨나갔다. 두빌은 이번에 그 힘을 이용해 엘과 거리를 두는데 사용했다. 그의 착지는 솜털처럼 가벼웠다.


“답지 않은 기교!”


엘은 감탄인지 조롱인지 모를 소리를 하여 검을 들고 뛰었다.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은 모양이 단번에 그를 두 동강 낼 것 같은 기세였다. 두빌은 감탄한 얼굴로 한 마디를 했다.


“지치지도 않는군.”


“젊은 덕분이죠.”


엘은 실없는 소리를 하며 검을 휘둘렀다. 막대한 에너지에 대기가 진감했다. 전력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움직여 보게 된 데, 세포 하나하나까지 흥분에 들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이 검격을 날리면서 두빌이 부디 잘 받아주길 기대했다.


“흥!”


엘의 바람처럼, 두빌은 엘과 마찬가지로 검을 양손으로 잡고는 올려쳤다. 강대한 마나에 휘감긴 검신이 아래에서 위로 이글거리며 쏘아 올라가고, 주변의 먼지와 모래가 자석에 끌리는 철처럼 휘말렸다. 폭풍 같은, 아니 폭풍의 기세였다.


-쿠아아앙!


폭음이 터지고 모래와 자갈비가 주변으로 내렸다. 그 일대는 모두 먼지구름에 휩싸였다. 구경하던 변사들은 웅성거리며 긴장된 시선을 충돌의 중심에 보냈다. 점차 먼지가 걷혀지며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의 중심으로 꽤 큰 규모의 크레이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방금 교환된 일격의 힘을 설명하는 모습이다.


'정말로 아깝군.'


장군은 입맛을 다시며, 맞은 편에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엘을 바라봤다.


*성원 없으면 후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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