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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발송 님의 서재입니다.

양코배기 조선인이 쓰는 임진록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행복발송
작품등록일 :
2022.10.31 11:39
최근연재일 :
2023.02.25 06:10
연재수 :
100 회
조회수 :
16,234
추천수 :
235
글자수 :
463,226

작성
23.0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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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96화. 거사(1)

DUMMY

그의 마음을 읽어 준다는 것.


그것이 핵심이었다.


자기가 모시던 주군을 살해했다는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중압감에 몰린 아케치에게 가족, 특히나 노모의 안위는 그가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게 만들었다.


”결국, 그대가 아케치를 할복하도록 만들었구료.“


”장군은 왜가 조선을 침공하도록 만들었잖습니까.“


”깔깔깔깔······.“


자기를 비난했지만 수길은 호탕하게 웃음으로 받았다.


”호랑이나 독수리는 결코 참새나 토끼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법이지.“


무서운 말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또 있으랴···.


그 소(小)를 위해 대는 무엇을 해주었는데, 소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인가. 소나 대나 그 자신이 전부인데···.


”오늘 저녁은 혼마루에서 하면 어떻겠소?“


수길이 나를 자기의 집으로 초대를 했다. 뜻밖이었다.


나를 믿기 시작한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자기와 내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굳게 닫혔던 수길의 마음을 열게 만든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나는 오모테를 나와 천수각(天守閣)으로 향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망루였지만 이곳은 에도성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를 감시하는 눈길을 피하기 좋은 곳이었다.


천수각 망루에 서서 난 에도성 안을 둘러보았다.


수길이 집무를 보는 나가오쿠와 가족들이 거주하는 혼마루가 있는 내성(內城)이 보였다. 미로처럼 좁은 길들이 건물 사이로 보였다.


내가 거사를 한 뒤 벗어나야 하는 곳.


그러나 곳곳에 숨어 있는 사무라이 닌자들. 내성에서 닌자들의 손길에서 무사히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난 머릿속에 내성의 구조를 다시 한번 담아 두었다.


내성을 벗어나면 바로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 수길의 친위대인 궁성 경비대가 머무르는 병영.


사무라이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부대.


백여 명 정도의 병력이었지만, 웬만한 창기병 1개 부대보다 더 강력했다. 혼마루에서 일이 생기면 닌자들과 함께 수길을 보호할 무사 집단이었다.


그래···. 호랑이 굴로 가자.


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심한 구름이 저녁노을을 받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핏빛처럼 선명하고 붉었다.



***



혼마루로 들어서는 내성의 중문을 들어서자 긴 칼을 허리에 찬 무사 두 명이 막아섰다. 난 양팔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내 몸을 샅샅이 검색한 뒤 아무런 쇠붙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중문을 들어설 수 있었다.


중문을 들어서고 혼마루까지 가는 동안 그 넓은 내성 안에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난 내성 곳곳에서 낯선 이방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을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모노를 입은 수길의 아내가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으고 인사를 했다. 그 뒤로 아이들 네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수길의 아내가 나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좁은 복도로 이어진 실내는 마치 에도성 내성의 축소판 같았다.


복도는 미로처럼 열 칸 정도마다 좌우로 꺾였고, 복도 양쪽 옆은 방들이 이어졌는데, 두꺼운 종이를 바른 창살 문이 칸막이처럼 이방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이쪽입니다.”


수길의 아내가 방문 앞에서 옆으로 돌아서서 허리를 굽혔다. 집안 현관을 들어와 좌로 세 번, 우로 두 번을 꺾었다. 그리고 긴 복도의 끝방.


길 잃어버려 미아가 되기 똑 알맞겠네···. 또라이들.


난 현관에서부터 지금 안내된 방까지의 지나온 통로를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복도 양옆의 방에는 무엇이 있는지, 누가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방으로 오는 동안 내내 난 방문 뒤에서 나를 따라오던 낮고 긴 숨결이 내가 방에 들어서자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사라진 건가···? 아님.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지켜 보고 있는 걸까.


수길을 해하려는 시도는 애시당초 불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계란색의 청결한 다다미가 깔린 방이었다. 다른 방들과는 달리 상당히 넓고, 중앙의 천정으로 자연 채광이 들어왔다.


방안 중앙에는 앉은뱅이 작은 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왜의 최고 권력자의 집 세간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했다.


수길의 다른 면을 보는 것 같았다.


“어서 오게···.”


내가 방으로 안내되고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유카타 차림의 수길이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앉게...”


수길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나도 그와 마주 보며 앉았다. 둘 사이에는 각자의 자리 앞에 놓인 작은 앉은뱅이 탁자만이 전부였다.


“이 방이 어떤가?”


방은 말할 수 없이 훌륭했다.


천정으로 난 창으로 아직 지지 않은 햇살이 자연의 빛을 방안에 고루 비춰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단정했다. 유일하게 중앙의 벽은 황금색 바탕에 붉은 용이 승천하는 그림이 벽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 앞에도 화려한 문양의 빈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수길의 자리 같았다.


그런데도 굳이 나랑 마주 앉은 건 무슨 의미일까.


수길이 앉아 있는 뒷벽에는 흰 회벽에 탱화가 여러 점 걸려 있었다. 조선에서 가져온 그림들 같았다.


“대단히 훌륭합니다···. 특히나 천정의 박공창은 우리 고향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깔깔깔······. 칭찬을 들으니 마음이 좋군.”


난 감상을 하는 것처럼 방안을 둘러 보았다. 그러나 내 눈은 그림이나 벽화보다는 내부 구조와 장식품처럼 걸려 있는 칼들에 머물렀다.


용이 그려진 벽 앞에는 나무로 만든 거치대가 있었고, 예리하고 긴 사무라이 칼이 두 개가 아래위 칸에 걸려 있었다.


저거다.


내 등 뒤에는 격자무늬의 창살 문이 세워져 있었다.


창살문 뒤로는 아마도 다른 방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고, 여차직하면 문을 부수고 닌자들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오기 딱 참이었다.


방어를 위한 방의 배치군······. 완벽해.



***



기모노를 입은 여종 두 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와 수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음식이 나왔다.


역시 기모노를 입은 여종 두 명이 작은 화로를 들고 들어왔다. 화로 안에는 시뻘건 숯들이 열기를 뿜었다.


여종이 화로 위에 작고 둥근 무쇠솥을 걸었다. 솥 안에 맑은 육수가 바글바글 끓었다. 여종들이 야채와 고기를 솥 안에 넣었다.


“우리나라 전통 음식인 와쇼쿠(和食)일세.”


내가 살던 시대에서는 샤브샤브라고 했지···.


여종들이 먹기 쉽게 음식을 덜어 앞에 놓았다. 난 긴 나무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었다. 훌륭했다. 담백하면서도 엷은 맛이 사찰 음식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떤가?”


“좋습니다···. 조선 음식과는 또 다른 느낌이오.”


“그렇지···?”


수길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조선 음식과 어깨를 견줄 만하다는 자부심이 드러나 보였다.


멘트성 발언이라는 걸 모르고 좋아하긴···.


여종이 음식을 집어서 내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도 좋은 음식이지.”


여종이 얼른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수길이 잔을 들었다. 나도 잔을 들었다.


방 안 분위기는 평온한 듯하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에도의 전통 샤케일세.”


“예···. 향이 그윽하군요.”


난 샤케를 입에 댔다. 깊으면서도 부드러운 향과 맛이 절로 우러났다. 목젖이 짜르르했다.


술맛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



“궁금한 게 있소.”


수길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대는 영길리인이오···. 아니면 조선인이요?”


난 수길이 묻는 의도를 알았다. 난 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따뜻한 샤케가 목젖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생애 마지막 술이 왜인들이 만든 술일 줄이야···.


내가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수길은 가만히 나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란 말을 아시오?”


제나라의 환공이 관중을 비난하는 신하들에게 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병철 회장의 인재상으로 더 유명했지만···.


“그대는 의인(疑人)이요? 신인(信人)이요?”


“조선에게는 신인이겠고, 왜에게는 의인이겠지요.”


“깔깔깔깔···. 그대가 왜인이 아닌 것이 너무 아쉽구나.”


그래서 나에 대한 믿음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최후의 통촉인가, 아니면 마지막 회유인가···.


그때 여종이 음식을 집으려다가 젓가락을 놓쳤다. 방안의 팽팽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쨍그랑.


젓가락이 식기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방 안의 공기를 일시에 깨트렸다.


휙휙.


아주 짧은 순간.


팽팽한 실이 뚝 끊어진 것 같았다.


스르륵.


내가 등지고 있는 방문 뒤에서 날카로운 검기와 움직임이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주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어머나···! 스미마셍. 스미마셍!”


여종이 당황해하며 수길의 눈치를 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난 여종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하하하하···. 외국인을 처음 보아 많이 긴장한 것 같습니다.”


난 일부러 과장된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클라쎄 같은 행동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내 말에 방안을 감싸고 있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위로 치켜떴던 수길의 눈매도 다시 돌아왔다.


여종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스미마셍을 외쳤다. 수길이 두 여종을 나가라고 손짓했다.


잠시 뒤 새로운 여종 두 명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내 옆에 앉은 여종이 머리를 조아리면 말했다.


“시즈꼬입니다.”


조금 전 나간 여종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뒷머리를 틀어 올려 찔러 넣은 비녀가 아주 긴 바늘처럼 가늘고 길었다.


여자에게서 아주 건조한 느낌이 들었다. 난 여종을 보고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주군······. 가부키를 올리겠습니다.”


차렵 뒤에서 집사가 말했다.


“들여라.”


잠시 뒤 짙은 분칠을 한 게이샤 세 명이 들어왔다.


한 명이 자리에 앉아 샤미센을 튕겼고, 두 명이 기이하게 꺾어지는 동작으로 부채춤을 추었다.


수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게이샤들의 공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게이샤가 고음의 노래를 불렀다. 목소리가 짱짱하다. 마치 맑은 겨울날 아침······. 얼음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안면 근육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두껍게 분칠한 얼굴은 그로데스크했지만 두 눈에서 뿜어나오는 살기는 감출 수가 없었다.


칼이다.


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칼을 떠 올렸다.


가부키가 끝났다. 게이샤들이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아 낮은음의 엔카를 불렀다.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갔는지 수길의 유가타 앞섶이 많이 풀어졌다.


내 자세도 약간 흐트러졌다. 옆에 앉은 여종이 가끔 내 어깨를 살짝 밀었다.


“잠시 실례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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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95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23.02.22 34 0 11쪽
94 94화. 오다노부나가의 몰락 23.02.21 36 0 10쪽
93 93화. 혼노지의 변 23.02.20 35 0 10쪽
92 92화. 속고 속이는 게임 23.02.18 39 0 10쪽
91 91화. 운명의 날 23.02.17 39 0 10쪽
90 90화. 이간계(離間計) 23.02.16 38 0 11쪽
89 89화. 품을 수 없다면 베야지. 23.02.15 41 0 11쪽
88 88화. 물고 물리는 정세 23.02.14 43 0 9쪽
87 87화. 첫 번째 기회 23.02.13 45 0 10쪽
86 86화. 신뢰 쌓기 23.02.11 51 1 11쪽
85 85화. 어린진(魚鱗陳) 23.02.09 52 1 11쪽
84 84화. 책사 23.02.08 54 1 10쪽
83 83화. 도요토미히데요시 23.02.07 49 1 11쪽
82 82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23.02.06 58 1 10쪽
81 81화. 이이제이(以夷制夷) 23.02.04 62 1 10쪽
80 80화. 벽제관 전투(3) 23.02.03 64 1 10쪽
79 79화. 벽제관 전투(2) 23.02.02 54 1 10쪽
78 78화. 벽제관 전투 23.02.01 53 1 10쪽
77 77화. 명의 배신 23.01.31 58 1 10쪽
76 76화. 비격진천뢰 23.01.30 53 1 11쪽
75 75화. 평양성 전투 23.01.28 60 1 11쪽
74 74화. 이여송의 출전 23.01.27 58 1 12쪽
73 73화. 명의 원군 23.01.26 57 1 10쪽
72 72화. 왜에 간 사명대사 23.01.25 72 0 10쪽
71 71화. 일체유심조 23.01.20 87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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