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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발송 님의 서재입니다.

양코배기 조선인이 쓰는 임진록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행복발송
작품등록일 :
2022.10.31 11:39
최근연재일 :
2023.02.25 06:10
연재수 :
1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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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글자수 :
463,226

작성
23.02.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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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87화. 첫 번째 기회

DUMMY

사명 대사···.


역사 속에서는 수도 없이 만났던 유명인.


그러나 이 격변의 시대에서는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아니 넘치도록 대사의 깊은 마음과 고매한 인격에 감명을 받았다.


이제 그와의 만남은 특별한 인연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이것으로 끝일 것이다.


아쉬움과 함께 진한 고독감이 밀려들었다.


“나 참. 명색이 스님이···. 그것도 고승이라 불리는데···.”


사명 대사가 입을 쉽게 떼지 못했다.


“아니···? 뭔 말인데 그렇게 입을 떼기가 어렵습니까?”


나도 알지만, 입을 열면 두려움이 밀려올 것만 같았다. 그러면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그 두려움을 겹쳤다.


“알렉 시주와 같이한 시간이 너무 좋았소···. 다시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회자정리 거자필반 (會者定離 去者必返)


내 말 없는 미소를 바라본 대사가 헛헛한 미소를 보였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진작에 그리했을 터였다.


“소승의 배움이 아직도 짧구려···. 허허허. 부처님의 자비를 축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사명 대사가 합장하며 내게 허리를 숙였다. 나도 대사에게 예를 드렸다.


훗날 내가 살던 시대 사람들은 조선의 위대한 인물 두 명을 꼽았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그러나 사명 대사의 위대함은 그분들에 못지않았다.



***



사명 대사가 귀국하고 보름쯤 지난 뒤였다.


수길은 부하 장수들과 회의를 하다 느닷없이 나를 군사(軍師)로 임명했다.


“앞으로 알렉 군사를 잘 보필하거라. 그는 나의 분신과도 같다. 그의 말이 곧 나의 말이니, 그의 말에 따르거라.”


파격적인 대우였다. 적국 조선에서 온 자를 군사로 택하다니···. 더욱이 이국인을.


“예! 알겠습니다!”


장수들이 내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난 수길의 의중을 알았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였다.


후후후···. 이제 나는 빼박 그의 부하다.


굳이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의 부하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배신하면 넌 죽는다는 협박이다.


또한, 자신의 정적들에게도 나를 회유하거나 유혹하면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다는 공표였다.


“이번 싸움은 오로지 알렉 군사의 공이다. 앞으로 모든 싸움을 하기 전에 반드시 알렉 군사와 논의하라”


수길의 말에 장수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뭐래? 얘네들 왜 이래···. 원래 이런 만족인 거야?


수길은 타가하라 전투에서 보여준 나의 능력을 높이 산 것이었지만, 사실은 내가 라이벌 쇼균이나 다이묘에게 가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주느니, 차라리 버리겠다. 뭐 이런 속셈 아니겠는가···. 계륵 같은 존재.


회의를 마친 뒤 수길이 나를 찾아왔다.


“알렉 군사···. 이곳의 생활이 어떻소?”


내가 숙소로 묵고 있는 오모테관으로 수길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 거였다.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일까?


보통은 집무실인 나카오쿠(中奧)에서 다른 장수들과 정사를 보았다. 나 역시도 그의 군사란 직책으로 참석했지만, 그곳에서는 일반적인 논의만 했다.


“쇼군께서 배려해 주셔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늘고 긴 휼을 쥐고 있는 손을 쉼 없이 흔들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내가 집사장에게 단단히 일러두었소, 필요한 게 있으면 그에게 말하면 될 것이오.”


“필요한 건 없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수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혹시 제가 검을 연습할 장소가 있으면 합니다.”



***



“검을 연습하고 싶다고?”


뜻밖이라는 듯이 수길의 두 눈이 커졌다.


근본이 무장인 수길은 검을 연습한다는 말에 마음이 일었다. 문득 양이는 어떤 검법을 익히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어떤 칼을 쓰시오.”


난 키 작은 수납장 위에 놓인 거치대에서 칼을 꺼냈다. 칼을 잡은 내 손이 가늘게 떨렸다.


너무 쉽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게 양이의 칼이오?”


수길의 목소리에 내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흐음···. 릴렉스. 릴렉스···. 서두르면 일만 망친다.


난 수길에게 칼을 건넸다. 수길이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칼을 받아들었다.


스르릉


수길이 가볍게 칼을 뺐다. 칼이 부드러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칼집에서 나왔다. 검푸른 검기가 사방에 번쩍였다.


“오호?···! 명검이구나.”


칼을 들어 방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칼날을 비춰보며 수길이 감탄했다.


“조선 칼입니다.”


왜인들이 쓰는 칼보다는 검신이나 칼자루가 짧고, 배가 덜 휘었다. 왜인 칼보다는 가벼웠다.


그래서 칼의 운신이 더 빨랐고, 배가 덜 휘었기에 베기보다는 찌르기에 유리했다. 한마디로 적을 죽이기보다 전투력만 상실시키는 칼이었다.


“따뜻한 칼입니다.”


내 말에 수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길이 칼날 가까이에 눈을 가져갔다. 푸른 검광이 수길의 눈에 반짝였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형국이었다.


그대로 밀어붙이면···.


내가 한 걸음 수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는 불과 세 보 정도···.


휙휙


수길이 갑자기 칼을 허공에 휘둘렀다. 가벼운 검풍이 방 안의 공기 흐름을 변화시켰다.


뜨끔···. 내 속마음을 알아챈 건가?



***



“활인검(活人劍)입니다.”


활인검.


사람을 살린다는 검을 일컫는 말이다. 말이 안 된다. 활인검이라니. 어떻게 칼이 사람을 살린단 말인가.


“그렇군···. 살기가 없어. 칼에.”


그렇게 말하면서 수길이 다시 두어 번 칼을 휘둘렀고, 그때마다 가벼운 검풍이 방안에 웅웅거렸다.


스르릉


수길이 칼을 다시 칼집에 넣은 뒤 내게 돌려주었다. 모든 것을 다 파악한 듯한 표정이었다.


“칼에 살기가 없으면···. 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무슨 의미일까···. 난 수길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칼은 칼일 뿐입니다.”


날이 선 질문에 무딘 답이었다.


“칼일 뿐이다···.”


수길이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내 의중을 살피는 것이 역력했다.


“그렇습니다···. 주부가 쓰면 가족들의 사랑에 쓰일 것이고, 백정이 쓰면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깔깔깔깔.”


내 말에 수길이 한바탕 앙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장수에게는 그런 칼이 필요 없소···. 칼 주인보다도 더 시퍼런 살기가 담겨 있는 칼이 필요하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란 협박이었고, 내가 자기에게 어떤 쓰임인지를 암시했다.


“적을 베기 위해 밤마다 징징 우는 그런 칼이 장수에게 필요한 법이지.”


“그렇습니까······? 쇼군께서는 혼마루로 돌아가시면 어떤 칼을 쓰십니까?”


“깔깔깔깔.”


수길이 다시 높은 웃음소리를 냈다.


“군사······.”


수길이 웃음기가 사라진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



“아직은 이에야스의 운이 다하지 않은가 보오···.”


난 수길의 말에 아무런 대꾸하지 않았다. 수길이 나를 한 번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오늘 다케다가 갑작스럽게 죽었소.”


“.......”


사냥감을 코너로 몰아넣고,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찰나에 그 역할을 해줄 사냥개가 죽어 버린 것이다.


“그의 아들 또한 아주 용맹하오.”


수길이 선문답처럼 툭 말을 던졌다. 내가 그의 의중을 헤아려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런데 아버지만큼 충성스럽지는 못한가 보군요.”


수길이 실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잘 보았소.”


“장군께서 중용할 그릇이 아니면 그 그릇에 맞게 쓰시면 됩니다.”


수길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 속을 보려는 것인지, 자기 속을 봐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릇이라······.”


내 말을 음미라도 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수길이 갑자기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검은 두건과 검은 옷을 입은 닌자 한 명이 수길의 한 걸음 뒤에 무릎을 꿇었다.


“주군.”


닌자는 쇼군이나 다이묘라는 호칭보다 주군이라 말했다. 군인이 아니라 목숨을 바칠 신하였다.


닌자의 행동은 아주 가벼웠지만, 강한 내공이 뿜어져 나왔다. 이 방 어디에선가 숨어 있었는데도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고수다···.


그제야 난 등골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내 행동이 조금만 수상했어도, 난 그의 칼에 쓰러졌을 것이다.


우쒸···. 놀래라.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수길이 흰 종이에 몇 자를 휘갈겨 쓴 뒤 봉투에 봉하고, 자신의 수결을 했다.


“다케다 카츠요리에게 전하라.”


“하이!”


검은 복장의 닌자가 올 때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무서운 자구나···. 나와 겨룬다면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모르겠다.


수길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진시황의 자객 형가(荊軻)처럼.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닌자였다. 수길을 그림자처럼 숨어서 지키는 닌자들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닌자의 수준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길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겠는걸···.


수길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자였다.


그래서인지 수길의 심복조차도 수길의 거처인 혼마루에는 들이지 않았다. 자기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가신만이 거할 뿐 아무도 그곳에 들어간 사람이 없었다.




<87화. 첫 번째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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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92화. 속고 속이는 게임 23.02.18 39 0 10쪽
91 91화. 운명의 날 23.02.17 40 0 10쪽
90 90화. 이간계(離間計) 23.02.16 38 0 11쪽
89 89화. 품을 수 없다면 베야지. 23.02.15 41 0 11쪽
88 88화. 물고 물리는 정세 23.02.14 43 0 9쪽
» 87화. 첫 번째 기회 23.02.13 46 0 10쪽
86 86화. 신뢰 쌓기 23.02.11 51 1 11쪽
85 85화. 어린진(魚鱗陳) 23.02.09 52 1 11쪽
84 84화. 책사 23.02.08 54 1 10쪽
83 83화. 도요토미히데요시 23.02.07 49 1 11쪽
82 82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23.02.06 58 1 10쪽
81 81화. 이이제이(以夷制夷) 23.02.04 62 1 10쪽
80 80화. 벽제관 전투(3) 23.02.03 64 1 10쪽
79 79화. 벽제관 전투(2) 23.02.02 55 1 10쪽
78 78화. 벽제관 전투 23.02.01 53 1 10쪽
77 77화. 명의 배신 23.01.31 58 1 10쪽
76 76화. 비격진천뢰 23.01.30 53 1 11쪽
75 75화. 평양성 전투 23.01.28 60 1 11쪽
74 74화. 이여송의 출전 23.01.27 58 1 12쪽
73 73화. 명의 원군 23.01.26 57 1 10쪽
72 72화. 왜에 간 사명대사 23.01.25 7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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