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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은 님의 서재입니다.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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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은
작품등록일 :
2020.07.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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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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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51편

DUMMY

52.

언제나처럼 따스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방학이 되자 남작의 집으로 오기로 했던 에스텔라는 어김없이 집으로 끌려가서 일을 돕고 있었다.

‘불쌍한 에스텔라. 매출을 올려줘서 올 방학은 우리 집에 꼭 오게 하려고 했는데.’

엘리시아는 에스텔라의 집에 매출에 해당하는 금액을 주거나 혹은 남작에게 부탁해서 에스텔라의 여관에 일 관련으로 오는 사람들을 묵게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작은 잘못 호의를 베풀면 오히려 자존심이 상해 할 수도 있으니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엘리시아를 말렸다. 덕분에 에스텔라는 이번 방학 때에도 엘리시아의 집에 올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평생 에스텔라는 우리 집에 올수 없겠어.’

엘리시아는 아쉬웠다. 하지만 아직 8살의 엘리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었다. 적어도 에스텔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만큼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집에 있는 동안 애나는 마치 안나처럼 언제나 엘리시아의 옆에 있었다. 애나가 엘리시아를 돌봐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애나는 엘리시아와 친구처럼 지냈다.

“집에 여전히 좋네. 넓지는 않지만 아늑하고 있을 거 다 있는 집이야.”

“그렇군요. 로텔. 나는 처음 오지만 처음 오는 것 같지 않은 편안함이 있습니다.”

“으하하하. 랑베. 남작님의 집에는 좋은 술들이 많이 있어. 훔쳐서 먹자고.”

“저는 술 끊었습니다.”

“아니 재미없게 왜이래. 나 혼자 마시라는 거야?”

“로텔. 제가 술에 손을 대면 전과같이 개망나니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혼자 먹을게.”

랑베와 로텔은 선생님으로서 남작의 집에 왔다. 애나와 로텔. 그리고 랑베는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나 엘리시아가 무척이나 좋아했다. 다만 엘리시아는 한동안 치료에 집중해야 했다. 엘리시아가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애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로텔이 바보 같은 농담을 해대며 분위기를 풀어주곤 했다.

“알겠니? 로제? 상대편이 먼저 칼을 휘두르는 걸 보고 난 후에 반응하면 이미 늦는다. 상대편의 미묘한 근육의 움직임. 그리고 옷의 움직임. 심지어 소리까지 모두 듣고 상대편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어야 해. 그렇지 못하면 곧 죽게 될 거다.”

특히 랑베는 엘리시아의 몸이 괜찮아 지자 전에 시키던 감각의 연습을 계속 가르쳤다.

“네. 랑베 선생님.”

랑베가 엘리시아에게 한 말에 에나가 대답했다. 엘리시아가 열심히 랑베에게 배우고 있는 동안 엉뚱하게도 애나가 더욱 열을 올리며 같이 배우고 있었다. 애나는 엘리시아보다 더 열심히 배웠다. 그동안 애나는 감각의 사용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애나의 검술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애나의 열정에 감탄했는지 랑베는 애나에게도 열심히 가르쳤다. 애나가 떠날 때까지 두 달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기에 랑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가르치겠다고 마음먹었다.

“가령 전쟁터에 나갔다고 하자. 전쟁터는 그야말로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곳이지.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려 서로 죽이려고 아우성을 치는 곳이다. 그곳에 네가 나가면 어떻게 될 것 같니? 전장을 돌아보고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있을 것 같니? 절대 안 그렇단다. 그곳에서는 단 1초라도 상황판단이 늦어지면 그대로 죽어 버릴 수밖에 없다. 사실 아군과 적군도 구별이 제대로 안가는 상황이지. 그저 군복을 보고 구분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만일 상대편이 우리 군복을 입고 있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적 있니? 처음에는 자국의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이후에 하나씩 우리군복을 입을 사람들이 끼어들기 시작한단다. 정신없는 와중에 슬그머니 끼어들기 시작하면 절대로 알 수가 없지. 그저 아군이라고 생각한 사람한테 내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 버릴 테니까 말이다.”

애나는 랑베의 말을 들으면서 이미 경험을 해본 일이라는 것을 엘리시아에게 말해 주었다.

“로제야. 그래서 너는 모든 감각 중에 시각을 이용한 감각도 많이 익혀야 한단다. 너는 앞으로 몇 백 명이 있는 곳이던 한눈에 모든 상황을 파악할 정도가 되어야 해. 시간은 불과 이삼초 정도 안에 끝내야 한단다. 한눈에 이곳에 몇 명이 있는지 알아야 하지. 정확한 숫자까지 알아야 해. 이건 필수란다. 그리고 전에 알려준 대로 그 사람들의 특징을 파악하고 소리와 움직임. 그리고 특징까지 모두 기억을 해야 한단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연습을 계속하면 할 수 있게 되지.”

애나는 랑베의 말에 완전한 동의를 했다. 애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지 랑베가 하는 이야기들이 전부터 자신에게 필요 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 덜 부는 날이면 랑베는 애나와 엘리시아를 데리고 산으로 가곤 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나무가 몇 그루지? 시간은 5초주겠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눈감아. 애나? 나무가 몇 그루지?”

애나는 성급하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다가 대답했다.

“서른 세 그루 입니다.”

랑베는 제법 감탄하며 말했다.

“첫 번째 나무의 특징은?”

애나는 머릿속의 풍경을 떠올렸다.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는 가지가 부러지려고 해요. 키는 작은 편이고 수령은 아마도 20년쯤.”

“뒤에 있는 나무는?”

“무척 큰 나무지만 나무 중간에 구멍이 있어요. 새가 만든 구멍 같아요.”

랑베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애나는 오랜 시간 전쟁터에 있었던 덕분에 감각이 날카롭게 깨어 있군. 죽지 않기 위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감각일 거야. 잘 다듬으면 굉장해 지겠어.”

애나는 약간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 눈을 감고 조용히 주변의 상황을 보자꾸나.”

랑베는 같이 눈을 감고는 일분쯤 후에 입을 떼었다.

“로제. 주변에 있는 나무들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겠니?”

엘리시아는 잠시 소리를 좀 더 구별 하다가 대답했다.

“왼편에 대략 나무 20그루 정도가 있어요. 오른쪽으로는 50그루 이상. 오른쪽 나무 중에 중간쯤에 있는 나무 사이에서 이질감이 느껴져요. 그곳에 누가 있는 것 같네요.”

랑베는 엘리시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좀 더 집중해 보렴. 아마 그것만이 아닐 거다.”

엘리시아는 조금 더 집중을 했다. 나무들 하나하나에서 나는 소리들을 구별해 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들은 바람이 불 때면 모두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그 나무들의 소리를 하나씩 구별을 해야만 했다.

“오른쪽 방향에서 다시 오른쪽. 한명이 더 있어요. 아마도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조금 더 가늘게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는 여자일 가능성이 커요. 그리고 왼쪽 나무 중앙에 한명이 더 있어요.”

랑베는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했다. 더 연습해서 시간을 줄이는데 집중을 해야겠구나.”

랑베는 애나와 엘리시아를 매일같이 데리고 나가 다른 장소에서 훈련을 계속 시켰다. 익숙한 장소에서는 감각이 무뎌 지기 때문이었다. 랑베는 밤에는 나무를 깎아 막대기를 만들었다. 길이 20센티. 폭은 1센티 정도의 평범한 막대기였다. 똑같은 나무 막대기를 수백 개 만든 랑베는 수십 개의 나무 막대기를 허공에 던지고는 숫자를 맞추는 연습을 시켰다.

“지금 던진 막대기의 숫자는?”

“80개.”

“85개”

엘리시아와 애나는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둘 다 정확한 숫자를 맞추는 경우는 아직 없었다.

“전쟁터에 나가자마자 5초 안에 모든 상황이 파악 되어 있어야 한다. 5초안에 적군이 몇 명인지 아군이 몇 명인지 알아야해. 그리고 특징도 모두 알아야 한다. 나머지는 소리와 냄새. 바람이 전해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 항상 싸우는 동안 내가 죽인 적군의 숫자를 기억할 것. 새로운 적군이 들어오는 타이밍을 알아 낼 것. 가장 좋은 것은 적군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새로운 적군이 난입하지 못하게 방법을 만들어 가며 싸우는 게 좋다. 그러려면 상대편보다 훨씬 우위인 검술과 사격 솜씨를 가지고 있어야해. 남들과 비슷한 실력으로는 이 모든 것을 해내지 못한다.”

랑베의 주문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일만큼 까다롭고 가혹한 방법을 제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시아와 애나는 묵묵히 랑베의 주문들을 소화해 냈다. 그것은 의심할 필요 없이 생존 확률을 높여주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싸우는 동안 내 뒤에 적군이 몇 명 있는지 알아야 한다. 내 뒤에서 싸우고 있는 아군도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내 등을 믿는 전우에게 맡긴다는 것은 없다. 최소한 내 전우가 뒤에서 죽고 있는지 알아야 해. 믿고 맡기다가 전우가 죽어버리면 내 목숨도 같이 없어진다. 나는 싸우면서도 내 뒤에, 내 옆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한다.”

애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몇 번이고 겪어 왔던 일이었다. 지겨울 정도로 애나는 비슷한 상황들을 전쟁터에서 경험했다.


아침에는 랑베의 감각 연습과 체술을 사용한 검술을 애나와 배우고 오후에는 애나가 검술을 엘리시아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밤에는 로텔이 전략과 전술 등을 상세히 가르쳤다. 그리고 세 명의 선생님은 엘리시아가 무조건 하루 8시간의 취침을 하도록 강제로 잠을 재웠다. 먹는 것과 쉬는 시간. 그리고 취침 시간 등을 확실히 챙기면서 엘리시아에게 교육을 시켰다. 밤에 잠을 잘 때에는 항상 애나와 함께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엘리시아는 애나와 잠을 잔 이후로 안나의 꿈을 조금은 덜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다가 안나의 꿈에 눈을 뜨는 일은 있었어도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며 깨지는 않았다. 밤에 엘리시아가 눈을 뜨면 애나는 어떻게 잠에서 깨는걸 알아내는지 같이 눈을 뜨고는 엘리시아가 잠이 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엘리시아는 마치 안나와 항상 같이 있을 때와 같은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가능만 하다면 엘리시아는 애나와 언제나 함께 있고 싶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욕심에 불과 하다는 것과 애나의 일을 방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엘리시아는 그것을 절대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같이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할 뿐이었다.

“이번에 애나는 전쟁터에 나가면 언제 돌아와?”

애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말을 했다.

“아마 1년쯤 이지 않을까?”

“일 년이나 전쟁터에 있으면 무척이나 힘들 텐데 괜찮겠어?”

애나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일 년 동안 내내 싸우는 것은 아니니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다만 계속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게 슬플 뿐이지.”

엘리시아는 조용히 애나의 옆에 앉았다.

“저기···돌아오면 말이야.”

애나는 엘리시아의 다음 말이 어떤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으로 바로 올게. 로제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엘리시아는 애나의 얼굴을 상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고마워 애나. 죽지 말고 꼭 돌아 와야 해.”

애나는 엘리시아의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약속할게. 꼭 돌아올게.”

엘리시아는 애나의 손을 잡았다.

“안나처럼 그렇게 떠나버리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애나는 엘리시아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다짐하는 듯 한 말로 대답했다.

“응.”

이제 얼마 후엔 애나가 떠날 때가 올 것이었다. 아쉽지만 헤어질 날은 이제 머지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약속을 매일같이 확인하고 다시 약속하는 시간들이었고 그들은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맹세가 깨어질 리는 없다고 서로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그 약속이 지켜질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깊어만 갔다.


방학의 마지막 날. 애나가 아침 일찍 떠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엘리시아는 애나를 마중하기 위해서 나왔다. 겨울에서 봄이 되어 가는 계절이었다. 이른 새벽의 아침에는 드물게도 안개가 끼어 있었다. 겨울 안개였다. 엘리시아는 차가운 입김을 불어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한 얼굴로 애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연락해줘. 애나.”

애나는 엘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에 만날 때에는 키가 더 커져 있겠네.”

엘리시아는 씨익 웃었다.

“키가 커도 나를 귀여워 해줘야 해. 나는 계속 귀여움을 받고 싶단 말이야.”

“나보다 더 크게 커도 계속 귀여워 해줄게.”

엘리시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져 갔다. 혹시라도 애나를 다시 못 보게 될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꼭 살아서 돌아올 거야.”

“응.”

엘리시아는 더 이상 애써 밝은 척을 하지 않았다.

“무리하지 말고 있어야해.”

“응.”

안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헤어지는 것이 더더욱 힘들어 질것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꼭 돌아올 테니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

“응. 애나 잘 가.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래.”

“응. 잘 있어.”

애나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프리데릭 기사 학교 앞의 상점가로 일단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마부는 짧게 대답을 하고는 마차를 몰았다. 마차의 창문으로 애나는 고개를 돌려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둘 다 서로 손을 흔들지는 않았다. 이제 곧 다시 볼 사람처럼 헤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일 년 동안의 시간동안 헤어져 있어야 하지만 둘은 마치 내일 다시 볼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차가 떠나고 나서 엘리시아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꼭 살아서 돌아와. 애나.”

엘리시아는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된지 한참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서 떠나지를 못했다.


마차 안에서 애나는 작은 가방을 옆자리에 밀어두고 또 하나 들고 있던 기다란 케이스를 열었다. 어젯밤 남작이 애나에게 준 칼이었다. 그 칼은 남작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검이라고 했다. 애나는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검을 손에 쥐어 보았다. 양날 검에 여성에 맞는 가벼운 무계를 가진 검이었다. 검을 든 애나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거의 모두 다 떨쳐 내었지만 아직도 애나는 아직도 아주 미세하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숨기려고 했지만 엘리시아나 로텔, 그리고 랑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 그것을 못 본체 했다. 떨궈내고 정리해내야 하는 것은 애나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좋은 검이야.”

애나는 검의 감각을 익히는 동안 어젯밤에 남작이 했던 이야기가 새삼 다시 떠올랐다.

“애나. 이 검을 받으시오.”

남작은 애나를 따로 불러서 남작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던 검을 꺼내어서 애나에게 전해 주었다.

“전에 파렌티슈 최고라고 불리는 대장장이에게 검을 주문할 기회가 생겼었소. 그 대장장이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검을 만들어 주는 독특한 사람이었는데 특히나 귀족들에게 무척 인색하게 굴었던 사람이었지. 우연치 않은 기회에 그와 알게 되어 검을 주문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었소. 이 검이 그에게 주문해서 받은 검이지. 사실 그 검은 내 아내를 위한 검이었소. 몸이 약한 아내가 들기에 부담 없는 무계와 가벼운데도 불구하고 높은 강성을 가진 검으로 주문을 했지. 실제 그 검은 파렌티슈에서 가장 질 좋은 철이 생산되는 곳에서 가져온 철로 만들었소. 그리고 대장장이가 따로 솜씨를 부려 굉장히 가벼우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검으로 만들었지. 받으시오. 애나.”

애나는 남작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쉽게 받지 못했다. 엘리시아에게 했던 일들을 생각한다면 이 검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작님. 저는 이 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받지 못할 이유가 있소?”

애나는 머뭇거렸다. 아무리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한 짓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목숨으로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만큼 큰 잘못이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로제에게 했던 짓들과 남작님의 마음에 상처를 준일을 생각 한다면 저는 이 검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건 심지어 남작님 아내분의 검입니다. 칼의 좋고 나쁨을 떠나 남작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물건일 겁니다.”

남작은 웃으며 말했다.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라는 의미로 주는 검입니다. 나는 애나가 꼭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죽은 아내도 아마 케이스에 넣어져 먼지만 쌓여 가기 보다는 필요한 사람이 써주기를 바랄 겁니다.”

애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 남작은 애나가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재촉 하지 않고 기다렸다.

“남작님. 이 검을 저에게 주시는 것은 로제를 위해서 입니까? 제가 로제에게 앞으로 필요한 사람으로서 살아 돌아 와야 하기에 검을 주시는 것이라면 받겠습니다.”

남작은 살짝 웃었다.

“좋은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전장의 위험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검을 주는 것은 당신의 살아 돌아오길 기원 하는 것입니다.”

좀처럼 검을 받지 않고 있는 애나를 보던 남작은 결국 애나가 궁금해 하던 것을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로제를 위해서 입니다. 음···그리고 또한 나를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애나는 멈칫했다. 남작이 하는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애나가 남작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으나 딱히 생각나는 부분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남작님하고 결혼이라도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요?”

남작은 눈에 보일 정도로 입가에 웃음을 보였다. 남작 특유의 살짝 악당 같은 짓궂은 웃음이었다.

“글쎄요? 답은 살아서 돌아오면 해드리지요.”

애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남작의 말은 농담일 테지만 전쟁터로 떠나는 사람에게 돌아와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는 대답이었다. 애나는 그런 남작의 농담이 마음에 들었다.

“답변을 돌아와서 검을 돌려드리며 듣도록 하겠습니다.”

“천명의 피를 그 칼에 새겨서 오도록 하시오.”

“답을 들으려면 꼭 그렇게 해야 겠군요.”

“일 년 동안 답변을 잘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남작은 애나와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술을 한잔 마셨었다. 어제의 기억이지만 애나는 왠지 마차 안에서 얼굴이 붉어지고 살짝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거야.’

애나가 마차에서 남작과의 대화를 다시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눈 익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점가 근처까지 왔다는 것을 알게 된 애나는 검을 다시 케이스 안에 넣었다. 마차가 멈추자 애나는 마부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볼일을 보고 오는데 한 시간쯤 걸릴 거예요. 그동안 아침 식사라도 하고 계세요. 여기 받으세요. 2000루센 이에요.”

“알겠습니다.”

마부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아침 일찍 와달라는 요청에 아마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분명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나왔을 거라고 애나는 생각했다.

“조금쯤 천천히 볼일을 봐도 괜찮을 것 같네.”

애나는 마차에서 내려 상점가 중심에 있는 옷을 파는 곳으로 갔다. 몇 일전 남작이 옷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지만 전쟁터에서 좋은 옷은 필요 없다고 정중히 사양을 했었다. 다만 애나는 속옷과 양말, 그리고 몇 가지의 생필품이 필요했다. 전쟁터에서 옷은 못 갈아입는다 해도 며칠에 한번정도는 속옷과 양말을 갈아입고 싶었다. 애나는 옷가게에 들어가 몇 가지 옷을 고르던 중 로텔이 입고 있던 곰 모양의 잠옷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애나는 옷을 보다가 가게 주인에게 질문을 했다.

“이 옷은 작년 폭설 때 팔다 남은 옷인가요?”

애나는 로텔의 말이 생각나서 가게 주인에게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이상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작년에는 폭설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난히 따뜻했던 겨울이었고요. 눈조차도 얼마 내리지 않았는걸요. 그리고 그 옷은 작년에는 없었어요. 올해 들어온 옷입니다.”

“어? 그게 정말인가요?”

옷가게 주인은 갑자기 피식 거리며 웃으며 말했다. 무언가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귀여워서 가져온 옷인데 이제까지 없던 디자인이어서 그런지 팔리질 않았습니다. 다만 로텔이 하나 사가지고 갔지요. 아···그 로텔이라는 사람은 전쟁영웅인데 근엄하고 칼날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에요. 고집도 세고요. 그런 로텔이 이 옷을 사갔다니까요.”

“그 로텔이라는 분은 이 옷을 잘 입고 있나요?”

애나는 모른 척을 하며 옷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잘 입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텔이 사갈 때 이런 말을 했지요. 마음이 다쳐서 무척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마음을 좀 풀어 주고 싶다고요. 자신이 입은 모습을 보면 아마 웃겨서 잠도 못잘 거라고 하던걸요.”

애나는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로텔이 어떤 생각으로 옷을 사갔는지 애나는 알 것 같았다. 로텔은 애나에게 이 옷을 입은 모습을 주여 주기 위해 사간 것이었다.

‘그렇게나 창피한걸 싫어하는 사람이···’

애나의 눈이 웃음으로 휘어졌다. 전쟁터에서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인 냉혈한 같은 로텔이 애나 한사람의 마음을 살리기 위해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 옷을 사러 왔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로텔은 어쨌든 애나의 마음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했다. 애나는 그 마음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제 애나가 가져야 할 마음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사장님. 저도 이유 하나 주시겠어요?”

사장은 옷을 꺼내며 말했다.

“아가씨처럼 예쁜 사람이 입어야 어울릴 옷이지요. 아마 아가씨가 입으면 무척 귀여울 거예요. 생긴 것도 무섭게 생긴 로텔이 입은 모습은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칠 정도네요.”

애나는 옷을 받아 들고 계산 후에 나오면서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생각보다는 귀여웠어요. 로텔이요.”

애나는 가게 주인의 멍한 표정을 보면서 밖으로 나왔다. 마차로 돌아와서 짐을 넣고는 차가운 안개 낀 공기를 한껏 마시던 애나는 길 건너편에 서있는 로텔을 보았다. 로텔은 딱히 애나의 곁으로 다가 오지는 않았다. 그저 웃으며 손만 한번 흔들고는 뒤돌아 가며 말했을 뿐이었다.

“일 년 뒤에 보자. 애나.”

애나는 돌아서서 가는 로텔의 뒤에 조용히 대답했다.

“일 년 뒤에 봐요. 로텔.”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고마워요.”

로텔은 뒤돌아 선채 걸어가며 손만 흔들고는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애나는 로텔이 가버린 방향을 보며 한동안 서있었다.

“정말로 고마워요. 로텔.”

마차에 올라선 애나는 마부가 돌아오자 수도 기사단으로 출발해 달라는 말을 건넸다. 이틀정도 걸리는 여행길이고 도착해서 일주일 뒤에는 전선으로 나갈 테지만 애나는 마음에 불안감이 생기지는 않았다.

“상쾌하네. 공기가 상쾌한 것일까. 아니면···”

청명하고 안정된 마음만이 애나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훗.”

애나는 곰 잠옷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 애나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안정되고 평온했던 예전의 애나 손이었다. 남작과 엘리시아. 그리고 랑베와 로텔의 마음이 애나에게 따뜻하게 닿아왔다. 애나를 위해 온 힘을 다해서 마음을 써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나가는 전장이었다. 이제 애나는 국민들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마음도 죽어가는 예전의 전장이 아니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전장이었다. 전에 없는 마음으로 떠나는 애나는 이제 일 년 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약속을 지키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제 돌아올 곳이 생겼다.


작가의말

원래는 금요일에 올렸어야 하는데 하루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엘리시아의 이야기는 일단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이후의 이야기가 한참 남아 있지만 제가 다른 글을 연재하게 되어 두가지의 글을 동시에 쓸수 없어 잠시나마 엘리시아의 이야기를 중단할수 밖에 없게 되었네요.

엘리시아는 제가 처음으로 쓰게 된 글입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글입니다. 제가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글을 타 플렛폼에 연재하게 되어 일단 엘리시아의 이야기를 쓸수 없게 되어버려서 전부터 연재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애나의 이야기까지만큼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야기를 중단시키면서 마음이 너무 아픈것도 맞습니다.

이 글이 히트를 친것도 아니고 수없이 많은 분들이 보아주시던 글도 아니긴 합니다.

그래도 이 글을 꾸준히 읽어 주시는 분들이 계셨기에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이 글을 계속 연재하고 싶었지만 제 능력으로는 직장 생활을 하며 글을 두개나 연재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들어 결국 하나를 내려 놓을수밖에 없게 되었네요. 하지만 언젠가는 이 글을 다시 연재 할 생각입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소중한 글이고 인기작이 아니어도 상관없이 아끼는 글입니다.

오타도 많고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도 많은 결함 많은 글이었지만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특히 관마새님께 진정으로 감사 드리는 바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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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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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연재중단이라는 마음아픈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20.10.18 12 0 -
»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51편 20.10.17 12 0 24쪽
51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51편 20.10.14 15 0 24쪽
50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50편 20.10.12 10 0 13쪽
49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9편 20.10.09 11 0 17쪽
48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8편 20.10.07 14 0 21쪽
47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7편 20.10.05 16 0 22쪽
46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6편 20.10.02 21 0 15쪽
45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5편 20.09.30 18 0 17쪽
44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4편 20.09.28 17 0 15쪽
43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3편 20.09.25 17 0 11쪽
42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2편 20.09.23 18 0 14쪽
41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1편 20.09.21 17 0 17쪽
40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0편 20.09.18 17 0 15쪽
39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9편 20.09.16 18 0 17쪽
38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8편 20.09.14 18 0 13쪽
37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7편 20.09.11 19 0 15쪽
36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6편 20.09.09 20 0 19쪽
35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5편 20.09.07 18 0 15쪽
34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4편 20.09.04 24 0 16쪽
33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3편 20.09.02 23 0 17쪽
32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2편 20.08.31 21 0 26쪽
31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1편 20.08.28 25 0 30쪽
30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0편 20.08.26 36 0 15쪽
29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9편 20.08.24 34 0 14쪽
28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8편 20.08.21 26 0 15쪽
27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7편 20.08.19 29 0 13쪽
26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6편 20.08.18 44 0 13쪽
25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5편 20.08.14 27 0 13쪽
24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4편 20.08.12 29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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