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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은 님의 서재입니다.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은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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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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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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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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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2편

DUMMY

32.

“아···펜이 망가졌어.”

엘리시아가 학교에 들어온 지 한 달 정도가 되었을 무렵 엘리시아가 쓰던 300루센 짜리 펜이 망가졌다. 매일 밤마다 잠을 줄여가며 글을 배우던 엘리시아는 하루에 100장 가까운 종이를 써가며 공부를 했다.

“역시 너무 값이 싼 펜을 사 버렸나봐. 로제 우리 내일 학교 끝나고 펜 사러 나갈까?”

에스텔라는 엘리시아에게 내일 쇼핑을 하러 나가자고 은근히 말했다. 엘리시아의 옷이 너무 없어서 자꾸 옷을 갈아입히고 싶었던 차에 펜이 망가지자 이때를 기회로 옷을 더 사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에스텔라가 나에게 뭔가 사 입히고 싶은 모양이네.”

에스텔라는 소리 나게 웃었다.

“옷이 너무 부족해. 교복은 한 벌뿐이고 옷은 딱 두벌에 속옷도 양말도 두개뿐이라니. 더 사야해 로제.”

“나가면 공부 할 시간이 줄어드는데···하필이면 펜이라니···다른 게 문제가 생겼다면 그냥 버텼을 텐데.”

엘리시아는 투덜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에스텔라는 그런 엘리시아의 옆에 같이 누웠다.

“로제. 이젠 글을 읽고 쓰는 것까지 잘 하잖아. 이제 조금 공부 시간을 줄이는 건 어때?”

엘리시아는 에스텔라가 손을 꼭 잡아 오는 것을 느꼈다. 에스텔라의 특유의 걱정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아직 한참 부족해. 아직도 틀리는 글자가 많고 과거형이니 미래형이니 헷갈리는 게 너무 많아서 힘들어.”

“하지만 로제. 이미 우리들하고 같은 수준에 왔어. 게다가 주말에는 미친 로텔 아저씨한테 하루 종일 가있잖아. 돌아올 때는 거의 넝마처럼 엉망진창으로 지쳐서 오고. 잠도 하루에 많이 자야 4시간. 그나마도···.”

에스텔라는 말하다가 아차 싶었다. 밤마다 잠이 들고 한두 시간이 지나면 로제는 어김없이 하루도 안 빼고 울면서 신음 소리를 내었다. 매일 같은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항상 안나라는 사람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신음소리와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안나 죽지 마.’ 라면서 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는 멍하니 잠시 앉아 있다가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고 다시 잠자리에 들어서도 한동안 울다가 잠이 드는 로제를 매일같이 봐왔다.

“저기 로제.”

“왜 그래. 에스텔라?”

“계속 그렇게 몸을 혹사 시키면 아마 곧 병이 날거라고 생각해.”

엘리시아는 병이 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노예생활을 할 때 몸이 아무리 아파 쓰러질 것 같아도 하루 할당된 일은 언제나 반드시 끝마쳐야 했다. 노예에게 일을 쉴 때란 죽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엘리시아는 아파서 쉰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괜찮아. 나는 아직 더 해나 갈수 있어. 하지만···그래. 하루정도 에스텔라와 노는 것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내일은 에스텔라를 위해서 힘내 놀아볼까?”

에스텔라는 그런 엘리시아를 누워서 안았다.

“로제. 난 내일 로제와 놀려면 이제 자야겠어. 부탁인데 같이 자줘. 같은 침대에서 같이 자고 싶어.”

에스텔라는 엘리시아를 꼭 껴안고 자면 혹시라도 밤에 악몽을 안 꾸지 않을까 싶어서 오늘은 같은 침대에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응. 좋아. 오늘은 같이 자자. 저기···에스텔라. 고마워. 나 때문에 밤에 잠을 잘 못잘 텐데···나를 위해서 같이 자 주는 거지?”

에스텔라는 대답 대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엘리시아는 에스텔라의 그 미소가 어쩐지 안나의 미소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손을 꼭 잡은 채 오늘 만큼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죽지 마 안나!”

새벽에 엘리시아는 또다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어김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하아. 하아. 안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꿈이었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꿈은 계속 될 것 이었다. 매일같이 안나는 그렇게 엘리시아의 꿈에서 죽어 갔다.


둘은 학교 상점가로 가서 교복 두벌과 평상복 두벌. 그리고 속옷과 양말을 각각 5개씩 더 구입했다. 그리고 잠옷도 하나 더 구매를 했다. 에스텔라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엘리시아는 에스텔라에게 옷을 선물 하려고 했지만 에스텔라는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엘리시아는 에스텔라에게 어울릴 것 같은 옷 두벌을 몰래 같이 배달 시켰다. 그리고 펜 가게로 가려고 하던 중에 에스텔라가 걸음을 멈추고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펜 가게 말고 시계가계로 가자.”

“시계가게는 비싼 펜을 파는 곳이잖아.”

“로제처럼 펜을 많이 쓰는 경우에는 다신 저렴한 펜을 사면 안 되겠어. 아주 비싼 건 아니더라도 오래 쓸 만한 펜이 오히려 나을 거 같아. 그래야 망가져서 또 나오지 않지.”

사실 엘리시아는 300루센 펜을 5개쯤 사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에스텔라의 말대로 시계 가게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아마도 에스텔라는 혼자서만 좋은 펜을 쓰는 게 미안했기 때문에 엘리시아에게 시계 가게로 가보자는 말을 꺼낸 거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엘리시아와 에스텔라는 시계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며 주인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안녕. 어쩐지 생각보다 빨리 보는구나. 시계가 고장난건 분명히 아닐 테고 오늘은 어떤 것을 사러 온 거지?”

“혹시 괜찮은 펜 세트가 있을까요?”

“있기는 하지만 하품. 중품. 상품. 최상품. 어떤 것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엘리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하품이면 되요. 물론 여기에서 파는 하품이 다른 곳에서 파는 최상품보다 좋을 테지만요.”

시계가게 주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아는구나. 그래서 누가 쓸 거지?”

에스텔라가 대신 대답했다.

“로제가 쓸 거예요.”

“전에 사간 펜 세트는? 실증이라도 난건 아닐 테고.”

엘리시아가 대답했다.

“그런 에스텔라에게 줄 선물이었어요.”

“친구에게는 최상품을. 본인은 하품을 쓴 다라···재미있구나. 그래. 친구 에스텔라. 펜은 잘 쓰고 있니?”

에스텔라가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최고에요. 정말로 그건 이 세상 물건이 아닌 것 같아요.”

시계가게 주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의 가치를 아는 아가씨군. 그럼···어디보자.”

시계가게 주인은 의외로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한참을 고르고 고르다가 문득 어떤 하나의 제품에 눈길이 고정 되었다.

“아마···이젠 괜찮겠지.”

시계가게 주인은 작은 상자 하나를 열었다. 그 안에는 하품이라고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고급스러운 은재질의 펜이 들어있었다.

“순은으로 만든 펜대에 14K 펜촉이란다. 그리고 갈아 끼울 수 있는 여분의 펜촉도 들어 있고. 이 펜도 일일이 잉크를 찍어 쓸 필요 없이 한번 잉크를 담으면 50장 이상 쓸 수 있지. 특히 잉크를 넣기가 무척 편해서 사용하기 좋단다. 아마 이정도면 만족할거다. 고장도 안나고 무척이나 실용적이지.”

엘리시아는 이정도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인가요?”

시계가게 주인은 한참을 고민했다.

“글쎄다···이건···음···”

엘리시아는 의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이 정해 지지 않은 물건인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이 펜은 주인이 따로 있었단다. 주문을 하고는 펜을 찾아 가지 못한 경우라서. 주문한지 꽤나 오래 되었구나. 필시 이젠 찾으러 오지 못할 상황일 테지.”

“누군가 주문을 하고 찾으러 못 온 물건이군요.”

“그 사람의 손에 딱 맞게 주문을 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던 펜이지.”

엘리시아는 무슨 사연인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인가요?”

“이학교의 학생이었기도 했고. 나중에는 일 년에 한두 번씩 검술 선생으로 오기도 했었단다. 이 펜은 선생으로 왔었을 때 주문을 한 건데 벌써 오래 되었지.”

“검술 선생님까지 했을 정도면 대단한 분인가 봐요.”

엘리시아는 검술 선생님을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정말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궁금해지고 있었다.

“이 나라 최고의 기사 중 하나였지. 안나 피제로 라고···.”

순간 엘리시아는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제가 살게요.”

에스텔라는 안나라는 이름을 듣자 바로 이 펜을 주문한 사람이 매일 밤 로제의 꿈에 나오는 바로 그 안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가 되었던 이건 제가 살게요.”

눈을 똑바로 뜨고 당당하게 말하는 엘리시아의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본 시계가게 주인은 놀라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얼마 드리면 되나요?”

시계가게 주인은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수건으로 엘리시아의 눈물을 닦았다.

“안나를 알고 있는 거니?”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너는 안나를 잘 아는 아이였구나. 로제. 이 펜은 네가 그냥 가져가거라. 돈은 안 받으마.”

엘리시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돼요. 그건 아마 안나도 원치 않을 거예요.”

시계 가게 주인은 엘리시아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가져가는 것을 안나도 좋아할 것 같구나. 그리고 네가 그렇게 눈물을 흘린다는 건 안나는 아마도···”

엘리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엘리시아의 표정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눈물을 흘리지만 않는다면 울고 있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네 얼굴과 눈물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당황스럽구나.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너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인 게 틀림없을 거다. 네가 가지고 있어야지 안나도 좋아할 거야.”


극구 사양하는 시계가게 주인 때문에 결국은 돈을 지불하지 못하고 오히려 잉크와 종이까지 받아서 나온 엘리시아는 빠르게 금보관소로 향했다.

“혹시 대금 대납도 가능한가요?”

“푸른 눈의 고객님께는 무슨 서비스든 다 가능합니다.”

“그럼 혹시 카드도 있을 지요?”

“네 당연히 있습니다. 어떤 카드를 원하시나요.”

“가장 좋은 카드로 부탁드려요.”

엘리시아는 그 카드에 안나의 펜으로 첫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쓴 카드를 직원에게 주며 말했다.

“금화 20개와 함께 카드를 시계가게 주인에게 보내주세요. 그리고 제 개인적인 부탁이니 여기 1만 루센 수고비로 두고 가겠습니다.”

“수고비는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해드리는 서비스 입니다. 그리고 카드 값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이건 저에게도 특별한 일이라 그냥 부탁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바로 부탁 드려요.”

엘리시아는 에스텔라와 함께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금 보관소를 나섰다. 금 보관소 직원은 즉시 카드와 금화 20개를 챙겨 시계 가게로 향했다.

“대금 배달 왔습니다.”

시계가게 주인은 의아 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금 배달이 오다니요? 대금도 배달이 오나요?”

“네. 로제 하인리히님이 감사 카드와 함께 보내셨습니다.”

시계가게 주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그냥 가져가라 했는데···.그 아이 안나와 참 성격이 비슷하네. 엄마와 딸같이 말이야.”

“여기 금화 20개.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여기 사인 부탁드립니다.”

“금화 20개?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시계가게 주인은 카드를 펼쳐 보았다. 카드에는 안나의 펜으로 엘리시아가 쓴 글이 적혀 있었다.

‘안나의 펜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시계 가게 주인은 코끝이 시큰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참내···이런···사인 용지 주시오.”

금보관소 직원이 돌아가자 시계가게 주인은 자리에 앉으며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안나를 짝사랑 했다는 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시계 가게 주인은 가게 문을 닫고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 너하고 술 한 잔 마시는 게 내 꿈이었는데.”

시계가게 주인은 손으로 눈을 한번 훔쳐냈다.

“길을 떠났구나. 안나.”

문을 닫고 시계가게 주인은 술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을 본 주변 상인들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그렇게나 슬퍼 보이는 건 처음이라고 다들 생각하며 조용히 길을 비켜 주었다.


다시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엘리시아는 방학을 맞이했다. 베르너 남작이 보내준 마차와 집사가 도착해서 짐을 나르는 사이 엘리시아는 에스텔라와 간단한 작별 인사를 했다.

“에스텔라. 편지 보낼게. 글씨가 좀 틀리더라도 반드시 답장을 줬으면 좋겠어.”

에스텔라는 웃으며 엘리시아에게 말했다.

“걱정 마. 편지는 내가 더 보낼지도 몰라. 그리고 나 너희 집에 괜찮다면 놀러 가고 싶어.”

“아버지께서 분명 기뻐 하실 거야. 친구가 놀러 온다고 하시면 크게 반가워 하실 거라고 믿어. 며칠 자고 갈 거지?”

“괜찮다면 그러고 싶어. 엘리시아와 놀고 싶은걸.”

짐을 전부 나른 집사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가씨. 아버님께서 몇 분 후에 도착 하실 겁니다.”

엘리시아는 집사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제가 마중 나갈게요.”

그리고 에스텔라의 손을 잡으며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에스텔라. 아버님께 소개 시켜 줄게. 같이 나가자.”

“아···나 같은 게 그래도 되나?”

“무슨 소리야.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걸.”

에스텔라와 엘리시아는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여름의 기운과 함께 벌레소리와 나무의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색들이 선명해 보이는 이 계절이 아직은 여름이라는 이름의 계절이라는 것을 엘리시아는 몰랐다.

“세상이 이렇게 파란 줄 몰랐어.”

엘리시아의 앞으로 큰 마차 한대가 도착했다. 엘리시아가 학교에 올 때 남작과 함께 타고 온 마차였다.

“로제. 잘 지내고 있었니.”

마차에서 베르너 남작이 내리며 엘리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버님. 오랜만에 뵈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많이 보고 싶었단다. 옆에 있는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친구니?”

남작은 아직 어린 에스텔라에게 예의를 갖추며 말을 건넸다.

“나는 베르너 남작이라고 한단다. 우리 엘리시아와 같이 있어 줘서 고맙구나.”

에스텔라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베르너 남작의 매너와 외모는 대단하다고 이미 소문을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어서 에스텔라의 얼굴은 붉게 물들다 못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남작님. 저는 엘리시아와 같은 방을 쓰는 에스텔라라고 합니다.”

엘리시아가 에스텔라의 손을 잡았다.

“아버님. 저 에스텔라가 많이 도와줘서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었어요. 이번 방학에 집으로 에스텔라를 초대해도 될까요?”

베르너 남작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이란다. 한 달 같이 있어도 괜찮다.”

“정말인가요? 그럼 오늘부터 같이 있어도 될까요?”

“같이 있어도 되지만 일단 에스텔라도 집에 다녀와야 하지 않겠니. 에스텔라의 부모님도 에스텔라를 많이 보고 싶어 하실 거다. 일단 집으로 가고 몇 일후에 오는 건 어떻겠니.”

에스텔라와 엘리시아가 동시에 대답했다.

“네. 좋아요.”

웃는 얼굴로 말하던 베르너 남작의 얼굴이 급작스럽게 어두워졌다.

“그런데 로제. 만나자 마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미안하다만···방금 오는 길에 금 보관소에 들렀단다.”

엘리시아와 에스텔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계와 펜 세트며 안나의 펜까지 꽤나 많은 돈을 썼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찌 된 거니 로제. 금보관소에서 장부를 확인하고 많이 놀랐다. 화가 많이 나더구나.”

엘리시아가 큰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나는 로제 네가 이럴 줄은 몰랐구나.”

에스텔라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남작님 정말로 죄송해요. 제가 로제에게 너무 큰 선물을 받아서···.”

남작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제. 에스텔라에게 선물을 했니?”

엘리시아는 땅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네···아버지.”

남작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제. 선물을 하려면 제대로 했어야지. 금보관소에 금화 1만개를 맡겨 놨는데 손도 안대고 여태 처음 준 금화 100개로 쓰고 있었던 거니? 금 보관소에 가니 오히려 돈이 늘어나 있더구나. 그렇게 돈 생각 말고 쓰라고 편지도 보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옷은 제대로 사 입고 있는 거니?”

“에? 아버님. 저 충분히 잘 쓰고 잘 입고 있어요. 시계도 아주 좋은 걸로 샀고요. 옷이며 종이며 아주 좋은걸 로 쓰고 있는걸요.”

“아아아···로제. 우리 집안이 아무리 이름도 없고 작은 가문이라 해도 너에게 해줄건 다 해줄 수 있는 집안 정도는 된단다. 너무 지나치게 아껴 쓰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 에스텔라에게 더 좋은 선물을 했어야지. 너를 보살펴 주는 둘도 없이 훌륭한 친구가 아니니.”

에스텔라는 또다시 다리에 힘이 풀리고 있었다.

‘이젠 알겠어. 귀족들의 돈 감각은 우리와는 다르다는 걸. 이제 익숙해 지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겠네.’

에스텔라는 남작에게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로제에게 펜 세트를 받았고 시계도 선물을 받았으며 너무나도 큰 선물을 받아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음···.”

엘리시아는 반대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해 주고 밤마다 글을 알려 주었으며 다른 공부도 언제나 잘 가르쳐 주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에스텔라에게 마음의 선물을 하고 싶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둘 다 무척이나 잘했구나.”

남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로제. 에스텔라에게 적어도 더 좋은 선물을 했으면 좋았겠구나. 하지만 그래도 잘했다. 역시 내 딸이다.”

베르너 남작은 엘리시아의 겨드랑이로 손을 끼어 넣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엘리시아의 뺨에 뽀뽀를 하면서 꼭 안았다. 엘리시아는 그런 남작의 애정 표정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친딸이 아닌 자신에게 그런 애정 표현을 해주는 남작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아버지가 해주는 뽀뽀라는 거 참 좋네요.”

엘리시아는 남작의 뺨에 똑같이 뽀뽀를 했다. 남작은 크게 웃으며 엘리시아를 땅에 내려놓았다.

“에스텔라. 누군가 마중을 나오기로 했니?”

남작의 물음에 에스텔라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희 집은 모두 일을 하고 있어서 아무도 마중을 오지 않습니다.”

남작은 에스텔라를 엘리시아와 같은 방법으로 번쩍 들어 올려 마차에 태웠다.

“집까지 데려다 주마. 귀한 집 아가씨가 짐을 들고 걸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으면 안 되지.”

에스텔라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남작님께 그런 신세를 질수는 없···”

당황해서 말을 하는 에스텔라의 입을 엘리시아는 손으로 막아 버렸다.

“아버님 출발해요.”

남작은 그런 엘리시아의 시원스러운 행동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럼 출발 하자꾸나.”

에스텔라는 입을 막힌 채로 발버둥을 쳤다.

‘앞에서 유턴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에스텔라를 집에 내려주고 집으로 온지 며칠이 지났다. 엘리시아는 베르너 남작의 집에서 흐르는 따뜻한 공기와 평온함에 지쳤던 마음이 조금씩 회복 되어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따스함에 엘리시아는 마음의 상처를 많이 지울 수 있었다. 다만 안나의 꿈은 아직도 계속 되었다. 베르너 남작은 엘리시아에게 많은 신경을 썼다. 몸에 난 흉터를 조금이라도 더 없애려고 매일같이 치료사를 불러 치료를 했고 깡마른 엘리시아를 위해 식사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개인 가정교사를 고용해 엘리시아에게 학교 공부 이외의 공부를 하도록 했다. 남작은 세심하고 체계적으로 엘리시아에게 사회와 세상을 알 수 있도록 배려했다.

“딱히 크게 불만은 아니다만.”

집에 오고 일주일이 지난 저녁에 남작이 엘리시아에게 걱정스러운 듯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옷을 좀 더 사야 갰구나.”

엘리시아는 남작에게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옷은 이미 충분한걸요.”

남작도 엘리시아에게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교 앞 상점가에서 산 옷으로 충분 하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우리 가문이 아무리 작고 이름도 없···”

“아···아버지. 우리 가문이 그렇게 작은 가문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이젠 알아요. 그리고···.”

베르너 남작이 엘리시아의 말을 막으며 갑작스레 씨익 웃었다. 악당 같은 표정이었다.

“우리 가문이 그렇게 이름도 없는 가문이 아니라면 더 좋은 옷을 입어야 가문이 창피를 안당하지 않겠니?”

‘앗···당했다. 아버님이 이걸 노리시고.’

남작은 그런 엘리시아의 얼굴을 보고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다른 가문 아이들은 돈을 너무 써서 골치라고 하는데 우리 딸은 안 써서 속을 썩이니 이렇게라도 해야 갰구나.”

엘리시아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 괜찮으시다면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무엇이던 말해 보거라.”

엘리시아는 말을 할지 말지 다시 한참을 망설였다.

“저기···.진짜 로제가 입던 옷···제가 입어도 될까요?”

남작은 순간 잠깐 당황하는 눈빛을 보였다.

“아···아니에요. 아버지. 아버지의 말씀대로 저 옷을 사도록 할게요.”

당황하는 엘리시아를 보며 남작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엘리시아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너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란다. 다만 로제가 입었던 옷을 입고 있는 너를 보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단다. 하지만 이젠 괜찮단다. 너는 누가 뭐라 해도 이젠 내 딸이다.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며 너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거란다. 로제가 입었던 옷을 입어도 괜찮단다. 이제는 네가 정말로 로제다.”

남작은 인자한 얼굴로 엘리시아에게 말했다. 그런 남작을 보며 엘리시아는 대답했다.

“아버지. 저 정말로 아버지의 딸로 있어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고말고. 나는 이미 너를 딸로 알고 있단다. 네 할아버지가 너를 돌려 달라고 해도 돌려주지 않을 거다.”

엘리시아는 남작의 자리로 걸어가 손을 꼭 잡았다.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할게요.”

남작은 엘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란다. 내가 먼저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엘리시아는 대답 대신 남작의 뺨에 키스를 했다. 둘은 따뜻한 공기 속에서 마주 보고 앉아 나머지 식사를 하지 않고 옆에 나란히 앉아서 남은 식사를 마쳤다.

“오늘은 이제 푹 쉬렴. 방학 동안에는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을 늘리도록 노력하마.”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저하고 같이 산책해 주세요. 아버지.”

“그래.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겠구나.”

침실로 들어간 남작은 책을 읽다가 침대에 누우며 문득 생각했다.

‘이 거참. 결국은 또 옷을 못 사 주게 되었네. 속은 건 아니지만···.’

남작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멈추고 잠시 자신의 친 딸이었던 로제를 생각하다 책을 덮고는 오래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물고 정원으로 나섰다.


로제의 옷은 정말로 대단했다. 엘리시아가 상점가에서 산 옷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엘리시아는 처음 상점가에서 산 옷에도 많은 감탄을 했었다. 노예들의 옷만 입다가 처음으로 입어본 상점가의 옷은 부드럽고 편안했다. 엘리시아는 상점가의 옷만으로도 너무나 만족했기 때문에 다시 옷을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라고 생각했지만 로제의 옷을 입어 본 순간 옷에 대한 기준이 달라졌다. 엘리시아는 옷의 디자인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로제의 옷은 훨씬 예쁘고 세련 되 보였다.

“잘 어울리는 구나.”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 뒤로 돌아본 엘리시아는 남작의 표정이 다소 복잡 하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역시 제가 안 입는 게···.”

남작은 엘리시아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그런 게 아니란다. 그저 네가 처음부터 내 딸이었던 것 같아서 잠시 죽은 로제의 생각을 했던 것뿐이란다. 살아 있었다면 너와는 아주 좋은 자매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잠시 슬퍼진 것뿐이다.”

“아버지. 제가 이 옷을 입어서 진짜 로제의 생각이 자꾸 나게 만드는 것이라면 옷을 입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남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꾸 생각이 나도 괜찮다. 이제는 딸이 둘이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드는 구나. 꼭 네가 로제의 대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보다는 원래 딸이 두 명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구나.”

엘리시아는 남작에게 다가가서 웃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나요?”

남작은 전과 마찬가지로 엘리시아의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울리고말고. 이렇게나 예쁜 딸을 내게 주셔서 신께 감사하고 있단다.”

남작은 엘리시아의 볼에 다시 키스를 하고는 말했다.

“우리 딸의 첫 춤 상대는 아버지가 하고 싶구나. 한곡 추겠니?”

엘리시아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대답했다.

“한 번도 춤을 춰 본적이 없어요.”

“괜찮단다. 그냥 손을 잡고 흔들어 주기만 해도 된다.”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웃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도 없고 둘밖에 없었다. 오직 따스한 태양 빛만이 거실 앞 유리를 비추며 둘의 어깨를 따듯하게 감싸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둘은 한동안 웃으며 춤을 추었고 엘리시아와 남작은 그렇게 정말로 아버지와 딸이 되어 갔다. 이 세상 가장 행복한 한때였다. 이날 엘리시아는 정말로 로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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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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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51편 20.10.17 12 0 24쪽
51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51편 20.10.14 15 0 24쪽
50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50편 20.10.12 10 0 13쪽
49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9편 20.10.09 11 0 17쪽
48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8편 20.10.07 14 0 21쪽
47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7편 20.10.05 16 0 22쪽
46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6편 20.10.02 21 0 15쪽
45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5편 20.09.30 18 0 17쪽
44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4편 20.09.28 17 0 15쪽
43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3편 20.09.25 17 0 11쪽
42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2편 20.09.23 18 0 14쪽
41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1편 20.09.21 17 0 17쪽
40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40편 20.09.18 17 0 15쪽
39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9편 20.09.16 18 0 17쪽
38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8편 20.09.14 18 0 13쪽
37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7편 20.09.11 19 0 15쪽
36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6편 20.09.09 20 0 19쪽
35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5편 20.09.07 18 0 15쪽
34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4편 20.09.04 24 0 16쪽
33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3편 20.09.02 23 0 17쪽
»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2편 20.08.31 22 0 26쪽
31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1편 20.08.28 25 0 30쪽
30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30편 20.08.26 36 0 15쪽
29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9편 20.08.24 34 0 14쪽
28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8편 20.08.21 26 0 15쪽
27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7편 20.08.19 29 0 13쪽
26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6편 20.08.18 44 0 13쪽
25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5편 20.08.14 27 0 13쪽
24 엘리시아, 라펠느, 로제 그리고 시아. 24편 20.08.12 29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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