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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믄 님의 서재입니다.

통계학 교수가 축구를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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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믄
작품등록일 :
2022.02.14 08:54
최근연재일 :
2022.03.15 19:14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4,459
추천수 :
69
글자수 :
92,283

작성
22.02.18 08:10
조회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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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1쪽

달리자, 다시 달리자

DUMMY

혁준은 유전병은 몸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열여덟, 가장 빛나는 순간을 앞둔 때에 발병했다.


그레미우와 결승 한 달 뒤.

혁준은 자신의 하반신에 흐르는 소변을 알아채지 못했다.

거실에서 어머니가 놀라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하반신에 소변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유전성 강직성 하반신 불완전마비.

의사에게 처음 병명을 들었을 때,

어떤 병인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반신과 마비, 두 단어만으로 그는 좌절했다.


병마는 조금씩, 천천히 그가 이룬 모든 것을 갉아먹었다.

발병 3개월 만에 그는 축구를 그만둬야 했다.

축구는 그의 18년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거기서 끝이라면 나았을지 모른다.

6개월이 지난 후엔 전동휠체어를 구입했고, 장애등급을 받았다.


유전병, 처음 의사에게 그 단어를 들은 날.

퇴근을 하고 웃으며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사온 치킨에 술을 드셨다.


발병 후에도 그는 좌절하고 있을 수 없었다.

유전병을 물려준 부모라며

죄책감을 가진 부모님에게

좌절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는 지도자 과정을 준비했다.

연령별 국가대표를 모두 거친 혁준이었다.


그가 지도자 과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U-17 대표팀 감독님께서 전화가 오셨다.

그에게 추천서를 써줄 수 있다며 먼저 말을 꺼내셨다.


실력으로만 본다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골 결정력, 개인기, 드리블, 슈팅, 패스까지

완성형 유망주란 평을 받으며

한국의 셰브첸코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가 코치 과정을 밟는 것은 최소한 유망주들에겐 희소식이었다.


지도자 과정을 준비 하던 중

혁준은 선수들을 자신과 비교하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밖에 하지 못할까?

왜 저런 판단을 하는 걸까?

단점이 눈에 띄는데도 왜 선수들은 매번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일까?


혁준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 데도

나름대로 선수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의 분석은 숫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몇 번의 패스, 드리블을 실패하는가?

실패를 하고도 몇 번 반복하는가?

어디로 공을 보내고 어디서 슛을 하는가?

답은 무엇인가?


그렇게 그는 비디오 분석을 거쳐

스포츠 통계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을 위해 SAT를 준비했고,

통계학을 전공하며 스포츠 통계학에 발을 들였다.


2010년, 그는 전력분석관으로 벨기에 3부 리그 팀에 취직했고,

다음 시즌엔 팀이 2부 리그 3위를 기록했다.


그는 리그의 모든 선수의 데이터를 분석했고,

상대 선발 선수가 공개되고 30분 안에 알맞는 전략을 감독에게 제시했다.

젊은 감독은 자신의 부족한 경험을 혁준의 통계에 기대어 보완했다.


“공이 둥글더라도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혁준이 교수 임용 제안을 받고 처음 교단에 섰을 때 한 이야기였다.

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스포츠 통계학의 석학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학 수업이 전력 분석보다 힘들었다.

흥미만 갖고 그의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은 생각보다 숫자에 관심이 없었다.


다른 통계학 수업에 지쳐 조금은 재밌을 거라

생각하고 들어온 학생들뿐이었다.

그 생각을 혁준은 박살을 내주었다.


전 세계 2부 리그, 3부 리그 선수들의 수치를 통계화 하고,

그중 의미 있는 숫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석사 과정의 학생들도 어려워했다.


그에게 축구는 이제 숫자로 이해하고

숫자로 봐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분석을 하면서도

유명 선수들을 보며,

특히 그가 선망했던 선수나

그와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한 선수를 볼 때면

다시 뛰고 싶은 열망이 가슴 속에 차올랐다.


그런 그가 다시 축구장 위에 누워있는 것이다.


“한혁준! 일어나라고!”


혁준은 감독의 닦달에 벌떡 일어났다.


“수비해! 임마!”


그가 발을 떼고 딛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다리가 그의 무게를 버티고 있었다.


21년간 다리는 그 어떤 무게도 버티지 못했다.

발을 들 힘조차 없는 그냥 살덩어리일 뿐이었다.


혁준은 조금씩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열여덟, 그라운드를 뛰던 그 느낌.


혁준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일단 지금 달리고 싶었다.


자신의 포지션조차 모르는 선수는

감독의 말대로 수비진영으로 달렸다.


“숨 찬 거 오랜만이네.”


상대가 코너킥 찬스를 맞고,

혁준은 일단 아크 서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상대 키커가 골대 쪽을 바라보며

손을 들고 준비한다.


골대 앞에서 위치 싸움이 치열했다.

키커가 공을 찼고, 공은 가까운 포스트 쪽으로 낮게 깔렸다.

수비가 걷어낸 공이 상대 공격수를 맞고 혁준에게 떨어졌다.


혁준이 놀라 인사이드로 트래핑을 하자

윙어가 사이드로 뛰기 시작하고, 스트라이커가 손을 들었다.

수비수도 라인을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선수들 옆에 날파리처럼

숫자들이 쓰여 있었다.


혁준은 눈을 찌푸리며 숫자를 피해

선수의 위치를 확인하려 노력했다.


그 사이

이미 스트라이커에게 줄 길은 막혔고,

오른쪽 윙어는 출발이 늦어

선택지는 왼쪽 윙어 뿐이었다.


상대 수비수의 시선이 왼쪽 윙어에게 쏠렸다.

상대 공격수가 먼저 눈치를 채고,

혁준의 왼쪽을 막고 압박했다.


혁준은 시선을 왼쪽 윙어에게 두고

상체를 왼쪽으로 숙였다.

공격수는 완전히 속아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쏠렸고

그 순간 중앙선 부근에 있던

오른쪽 윙어와 혁준의 눈이 마주쳤다.


혁준의 눈빛은 멀리서 보아도 확신에 차 반짝였다.

오른쪽 윙어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뛰기 시작했고

혁준은 오른쪽 대각선 사이드로 낮고 빠르게 패스를 뿌렸다.

그의 패스는 중앙선을 지나 윙어의 발에 정확히 떨어졌다.


“뭐야?”


패스를 보고 놀란 정 감독이 혼잣말을 했다.

중앙선 뒤에서 출발한 윙어는 오프사이드도 아니었다.

이미 페널티 라인 가까이 간 윙어는 풀백을 앞에 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사이에 혁준은 약 40미터를 달려 중앙으로 들어갔다.


“헤이”


혁준의 목소리에 윙어는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유니폼 색만 보고 패스를 건넸다.

누가 잡든 그 위치에서 공을 잡는다면

오픈 찬스.


혁준은 몸을 열어 왼쪽으로 공을 떨어뜨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센터백은 혁준과 약 5미터 떨어져 있었고

골대는 23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골키퍼는 그의 슛에 대비해 몸을 완전히 낮추고 있었다.


혁준은 골대를 확인하고

오른발을 공 옆에 강하게 박았고

감독과 선수들이 외쳤다.


“슛!”

“때려!”


왼 발등을 쭉 펴고 정확히 공의 가운데를 맞춘 슈팅은

회전 없이 골대로 향했다.

키퍼가 막을 수 있을 것처럼

중앙으로 향하는 듯하더니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왼쪽 크로스바 끝으로.

키퍼는 공의 방향을 예측하느라

조금 늦게 몸을 날렸고,

혁준은 긴장된 얼굴로 공을 바라보았다.


공은 왼쪽 크로스바 아래에 맞고 튕겨

옆 그물을 타고 들어갔다.

공이 바닥에서 굴러 멈추고

혁준은 멍하니 서 있었다.


상대 선수들이 엎드려 좌절하고 있는 사이

팀원들이 혁준에게 뛰어왔다.


“야, 이 새끼! 웬일이야!”

“골대가 넣었다. 너 어시스트야.”


다들 기분이 좋은 듯

혁준에게 달라붙어 농담을 건넸지만

혁준은 멍한 얼굴로 왼발을 내려다보았다.


“꿈인가?”


기분좋은 소름과 함께 코끝이 찡해졌다.

천천히 걸어 중앙선을 지나려는 순간


“잘했다! 내 아들 잘했어!”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어머니였다.

그 옆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코어는 1대0, 86분을 지나고 있었다.

혁준은 7분 동안 경기를 뛰면서

끅끅 소리를 내며 울었다.


이게 꿈이라면 그 어떤 꿈보다 슬픈 꿈이었다.

이게 현실이라면 그의 인생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7분 동안 상대는 공격에 온 힘을 쏟았다.

교체 카드를 모두 써서 압박을 강하게 해

두 번의 슈팅을 가져갈 수 있었지만

한 번은 골대 옆으로 한 번은 골키퍼 품으로 안겼다.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세 번 길게 울리자


팀원들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소리를 질렀다.

누구는 기도를, 누구는 눈물을

기쁨이 그라운드에 가득했다.


상대편 선수들은 얼굴을 땅에 박기도하고

털레털레 힘없이 라커룸으로 향하는 선수도 있었다.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선수가

혁준의 등을 툭 쳤다.


“잘 차더라.”


혁준은 앳되어 보이는 놈이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김민재?”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의 절친 민재였다.

너무 어린 민재다.


아까 팀원들도 마흔이나 된 자신에게 반말로 말을 건넸다.

그리고 팀원들 모두 모르는 얼굴인데 하는 생각으로

라커룸에 들어가 개인 라커를 열어 거울을 보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얼굴은 맞았으나

마흔이 아니라

열여덟의 얼굴

그때의 얼굴이었다.

놀란 혁준은 뒤로 넘어졌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자 통증이 몰려왔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라커룸에서도 선수들의 축하는 이어졌다.


“혁준이 잘했다.”

“이제 주전해야지.”


혁준은 어색한 웃음으로 그들에게 화답했지만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라운드 위에서 보였던

숫자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도 숫자를 갖고 놀다보니

헛것이 보인 거라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의 일은 현실이라고 믿기에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때 감독이 라커룸으로 들어와 말했다.


“축하한다. 우리 대학 개교 이래 처음으로 결승을 간다.”

‘대학? 그러니까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교라고?’


혁준은 라커룸을 뒤져 지갑을 찾았다.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어 보니

한민대 3학년... 3학년?

혁준이 놀라 민증을 확인하자

주민번호가 00으로 시작한다.


혁준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지난 일을 떠올렸다.


술을 먹다가 대리기사...

정장의 대리기사.

한강 다리 위에서 추락.

그리고 축구 경기.


“당장 내일이 결승이다. 잘 쉬고 오늘 밤에 긴장한다고 잠 못 자지 말고.”

“네!”

“내일 11시 운동장으로 집합. 해산!”

“넵!”


선수들이 우렁차게 대답했고

감독이 나가자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혁준도 밖으로 나가자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


엄마라는 말만으로 눈물이 흐를 듯했다.


“혁준아 여기! 여기야!”


부모님이 그에게 꽃을 안겨주었다.


“진짜 멋있었어. 엄마, 완전 감동.”

“아빠도 깜짝 놀랐다.”


혁준이 보던 부모님의 얼굴보다 스무 살은 어려보이는 부모님.

마흔의 혁준쯤 되어 보이는 부모님이었다.

그리고 혁준이 지난 20년간 본 부모님의 모습 중

가장 밝은 모습이었다.


작가의말

천천히 갈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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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확신을 잃은 후보 선수 - 2 22.03.07 140 0 14쪽
12 확신을 잃은 후보 선수 - 1 22.03.04 159 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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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결승. 우승. 해트트릭 22.03.02 183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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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021 U리그 왕중왕전 - 4 22.02.25 205 4 9쪽
7 2021 U리그 왕중왕전 -3 22.02.23 239 4 9쪽
6 2021 U리그 왕중왕전 -2 22.02.23 266 3 11쪽
5 2021 U리그 왕중왕전 -1 22.02.22 308 4 12쪽
4 꿈꾸던 평범한 삶 22.02.21 422 6 11쪽
» 달리자, 다시 달리자 22.02.18 443 8 11쪽
2 다시 빛나게 될, 시작이 될 어느 날 22.02.16 499 9 8쪽
1 가장 밝게 빛나던 별의 몰락 22.02.14 588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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