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계 마을에서(2)
29화.
이 자는 어떤 말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풍문으로는 귀족 자제가 귀족 신분을 감춘채 경험을 쌓기 위해 왕국을 여행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귀족 청년이 퉁가 마을에 찾아 온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삼년에 한번정도 길을 잃은 귀족이 마을로 찾아 오기도 한다. 그런 귀족이 마을에 한번씩 나타날때마다 마을의 처녀나 식량은 바닥을 내버렸다.
잠자리에는 반드시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녀를 끼고 자고 식사도 호화스럽게 대접해야만했다. 귀족에게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몰랐다. 귀족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꿈도 꿀수 없었다. 만약 귀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영주성에서 기사들이 처 들어와 마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촌장님! 젤리에요."
"들어 오너라."
끼이익.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앳된 얼굴의 소녀가 나무 쟁반에 하얀 빵과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스프를 들고 와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 놓고 밖으로 나갔다.
"드릴건 이것 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촌장님! 전 정말 귀족이 아니라니까요. 말을 놓으셔도 됩니다. 나이도 많으신 분이 말을 높이니까 제가 불편합니다."
촌장이 눈을 껌뻑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 아니시란 말입니까?"
"대체 몇번이나 똑같은 말을 해야 합니까?"
슬슬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나이 지긋한 어른한테 높임말을 듣고 있으려니 너무 불편했다.
"그, 그럼 귀족이 아니라는 맹세를 하실수 있습니까?"
"아, 정말...전. 절. 대. 로. 귀. 족. 은. 아. 닙. 니. 다!!"
한자 한자 끊어서 말해 주었다. 이래도 믿지 않는다면 어쩔수 없었다. 일본에서 조직에 속해 있을때엔 누구에게나 반말을 찍찍거려며 으르릉거렸었다. 마법사가 되고 부터 성격이 많이 변한것 같았다. 이제는 노인을 공경할줄도 아는 참인간이 된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제다 촌장은 귀족들의 생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족속들이 귀족들이다. 명예를 위해서라면 목숨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게 귀족들이었다. 자신의 명예에 흠집이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들이 모르게 은밀하게 한다.
명예에 금이 간 귀족은 다른 귀족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만약 이 청년이 귀족이라면 절대로 맹세를 하지 않을 것이다. 켄이라는 청년의 표정으로 볼때 귀족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헛다리만 짚은 것이었다.
"자네 정말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드디어 촌장이 말을 놓았다. 그런데 그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자네 귀족 사칭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는 있는가?"
"사칭이라니요? 누가요?"
"바로 자네를 말하는 거네. 그런 복장은 귀족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만이 입을수 있는 거라네."
"예엣?"
켄은 깜짝 놀랐다. 평소에 흔히 입고 있던 쟈지(ジャージー. 츄리닝)를 입고 있었다. 상하 셋트형으로 아디다디스(adidas) 제품이다. 검은색 재질에 가슴에 큼지막하게 아디다스라고 금색으로 프린트되어 있는 쟈지였다. 바지의 왼다리쪽에도 크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런 쟈지가 이곳에서는 문제가 된다고 했다.
"충고하네만 그 옷은 입지 않는게 좋을걸세. 귀족이나 질 나쁜 용병은 물론 뒷골목 패거리들에게 걸리면 죽을지도 모른다네. 이곳에서야 그런 사람들이 없지만 다른 큰도시에서는 절대로 입지 말게. 자네가 애들에게 먹을 거리를 주어 충고해 주는 걸세."
"알겠습니다."
고작 옷 한벌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를뻔했다. 귀족이나 용병, 폭력 조직이 덤벼 들더라도 모조리 아작 낼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많이 귀찮아 질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벌벌떠는 귀족이라는 사람들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충 제다 촌장이 귀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해 주며 무조건 귀족 앞에서는 엎드리라고 했다. 막대한 힘을 가진 귀족일지라도 지지않을 자신은 있지만 아직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것이 너무 많았다. 정보를 모아야만 했다. 정보는 힘이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평민이 이렇게 돌아 다닐수 있는건가?"
"산속에서 생활하다가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처음 찾은 마을이 이곳인데요?"
안면에 철판을 깔았다. 다른 변명거리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허허, 그래서 아무것도 몰랐던가? 평민이 함부로 돌아 다니면 않된다네. 신분증도 없이 돌아 다니다가 경비병이나 병사들에게 걸리면 첩자나 탈주 노예로 오인받아 잡혀 간다네."
"노예요? 노예가 있단 말입니까?"
"당연히 있지. 전쟁 노예나 범죄를 저질러 노예가 된 사람, 빚을 갚지 못해 노예로 전락한 사람등 많은 노예들이 있다네. 그리고, 화전민이나 떠돌이들을 잡아 노예로 팔아 버리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네. 자네 신분증은 있는가? 없다면 노예가 될수도 있네."
지구에도 예전에는 노예들이 있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직도 노예 제도가 살아 있다고도 했었다. 겉으로는 폐지되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노예로 팔려가는 어린애들이 존재한다. 그런 노예들이 이곳에서는 활성화되어 있는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자네는 어디에 정착할 생각인가?"
"정착이라니요?"
"신분증도 없는것 같은데 어디로 돌아 다니다가 노예 상인에게 잡혀 노예가 되는것 보단 한곳에 정착해 생활하는게 좋지 않겠나?"
"그렇기도 합니다만...신분증은 어떻게 구할수 있는 것입니까?"
"누군가 보증을 하거나 아니면 용병이 되어 용병패로 신분을 대신해도 되네."
이 세계에서 한동안 생활할려면 신분증은 꼭 필요한것 같았다. 굳이 신분증 같은 것은 없어도 그만이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촌장님. 신분증을 구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라네. 돈이 좀 들어 가는 것이 문제지만."
영주성의 행정관에게 뇌물을 먹이면 얼마든지 구할수 있지만 돈이 문제라고 했다. 다행이 제다 촌장은 자신을 좋게 본것인지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이 세계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신분에 따라 차별이 심하다고 했다. 국가간의 전쟁이나 인근 영지와의 영지전도 발생한다고 했다. 지구의 중세 시대와 마찮가지였다.
이 퉁가 마을도 5년전에 벌어진 영지전으로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간 탓으로 젊은 사람이 절대로 부족하다고 했다. 하필이면 영지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징집되어 간 젊은이들은 죽거나 전쟁 노예로 다른 영지나 다른 나라로 팔려 갔다고 했다. 아르타인 자작령은 원래 15개의 크고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영지전의 패배로 인해 보상금조로 8개의 마을을 잃어 지금은 7개의 마을만이 자작령에 속해 있었다. 정착할곳이 없다면 이곳에 정찰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럼 한동안 이곳에서 신세를 지겠습니다."
"고맙네."
제다 촌장은 활짝 웃으며 반겨 주었다. 젊은 남자가 절대로 부족한 퉁가 마을은 가끔씩 바다에서 올라 오는 해양 몬스터로 인해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몬스터를 퇴치할 힘있는 젊은이들이 없는 탓으로 매번 많은 피해를 입는다고 했다.
젊은 남자 한명이라도 아쉬운 시기였다. 아직 어린애들이 성인이 될려면 몇년이나 지나야 한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이 마을에 정착해 주길 바랬다.
"돈이 구해지는대로 자네 신분증을 만들어 주기로 하고 식사를 하게."
"감사합니다. 촌장님도 같이 드시지요."
이 가난한 마을에서 어떻게 돈을 구할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탁자위의 하얀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간이 만든 음식을 먹어 보는 것이었다. 지구의 빵에 비하면 딱딱하고 아무런 맛도 없었다.
"이렇게 스프에 찍어 먹게."
촌장을 따라 빵조각을 떼어 내어 스프에 찍어 먹었다. 무슨 스프인지 그리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정성을 생각해 빨리 먹기위해 조금 크게 빵을 떼어내 찍어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는 마음에 들었나?"
"감사했습니다."
"그럼 마을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겠네. 잠시만 기다리게."
제다 촌장은 집밖으로 잠시 나갔다가 다시 돌아 왔다.
"따라 오게."
촌장을 따라 넓은 장소로 갔다. 여전히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제일 먼저 저 하수로를 어떻게든 해야 할것 같았다.
웅성웅성.
광장으로 보이는 넓은 곳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지 떠들썩했다. 처음 마을로 들어 설때와는 달리 어느 누구도 엎드리진 않았다. 오히려 적대감을 보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저들 입장에서는 속았다는 기분일것이다.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었다. 저들이 제멋대로 추측한 결과였다. 그만큼 귀족들을 두려워한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모두 조용히 하게. 이 청년은 평민인 켄이라고 하네. 인사하게나."
"반갑습니다. 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웅성웅성.
켄의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평민이었어? 제기랄, 귀족인줄 알았잖아."
"괜히 겁 먹었네."
"평민이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거야?"
"영주성에 세금으로 낼 밀가루를 괜히 축냈잖아. 이제 어떡하냐?"
저마다 한마디씩 불만을 토해냈다.
'씨발! 그게 내 잘못이냐? 지들이 착각한걸 가지고 꼬장을 부리는 쫌생이 놈들.'
생각같아서는 마법으로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야쿠자 시절에서 탈피한 상태다. 화가 나더라도 참을땐 참아야 한다.
"크흠! 자네는 날 따라 오게."
마을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뒤로 한채 촌장을 따라갔다. 허름한 집앞에 선 제다 촌장은 이 집에서 지내라고 했다. 가재 도구는 다른 사람을 시켜 보내 준다고 하며 멀어져 갔다.
끼이익.
거친 소음을 동반한채 나무 문이 열렸다. 촌장집과 마찮가지로 흙바닥이었다. 먼지가 수북히 쌓인 낡은 침대와 탁자, 그리고 의자 두개가 전부였다.
"이런 집에서 살라고?"
기가 막혔다.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한동안 이 마을에 거주하기로 한 켄으로써는 도저히 이런 집에서는 생활할수가 없었다. 세찬 바람이 불면 훅 날아 가 버릴듯한 집이었다. 혹시라도 비가 오면 반드시 비가 샐것이었다.
이런 집보다는 텐트 생활이 100배는 더 나을것이다. 그렇다고 지구의 물건을 함부로 꺼내 놓을수도 없었다. 쟈지 한벌로 큰소동이 벌어진 것을 경험한 켄은 다른 지구의 물건도 큰소동이 벌어 질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대충 먼지를 털고 집을 고치는 일이었다.
똑똑똑.
누가 찾아 왔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접니다."
목책에서 처음 만난 아론이라는 녀석이 문앞에 서 있었다. 뭔가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귀족이라고 생각했었던 자가 알고 보니 평민이었다는 것에 속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촌장님이 도와 주라고 해서요."
아론은 가재 도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냄비 한개와 주걱, 작은 자루 한개, 거칠게 보이는 얇은 천이었다.
"이 자루에는 곡물이 들어 있으니까 스프를 끓여 먹으면 돼요."
아까운듯 아론은 곡물 자루를 힐끗거렸다.
"근데, 아저씨! 정말 귀족이 아니에요?"
"아저씨라니? 그냥 형이라고 불러."
"흥, 그건 내 맘이에요. 귀족이 아닌거죠?"
이들에게 귀족 신분이란 경외의 대상이자 두려운 존재인것 같았다. 왜 이렇게 귀족을 두려워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언제 내입으로 귀족이라고 한마디라고 했냐?"
"끄으응...아저씨 땜에 미치겠어요. 경계를 잘못 섯다고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갈구어 대는지...따라 와요. 마을 안내를 해 줄께요. 촌장님 지시에요."
아론을 따라 한집 한집 방문을 해 인사를 했다. 대부분이 어린아이와 노인 여자들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중년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몇은 신체 어느 한쪽이 불편하거나 아예 없는 장애인들이었다. 몬스터와 싸우다가 저렇게 되었다고 했다.
어린아이들은 호기심으로 바라다 보고 젊은 여자들은 눈을 찡긋거리며 애교를 떨어 대었다. 심지어 어떤 중년 여인은 호들감을 떨면서 몸을 자꾸 비벼와서 곤혹스러웠다. 여전히 마을에는 악취가 진동했다.
"아론아! 저 개천에 왜 똥을 버리는거냐?"
"개천이 아니면 어딜 버려요?"
아론은 오히려 반문을 해 왔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것 같았다.
"냄새가 심하지 않냐?"
"킁킁, 무슨 냄새요?"
아론은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익숙해진 탓이다.
"똥을 저렇게 마을안에 버리면 전염병이 돌지도 모르잖아?"
"저, 전염병요?"
전염병이라는 말에 아론은 깜짝 놀랐다. 이 대륙에서는 전염병이 어느 마을에 발생하면 그 마을은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사람은 물론 가축, 집등 그 지역에 있는 모든것을 태워 버려 전염병이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게끔 차단하는 것이다. 그 마을에서 도주할수도 없다. 기사와 병사들이 마을 주변을 포위해 도주하는 사람들을 죽여 버리기 때문이다. 귀족보다 두려운게 전염병인것이다.
"저, 정말 저 똥들이 전염병을 발생시킨다고요?"
"그렇다니까. 빨리 치우지 않으면 마을에 전염병이 돌지도 모른다."
"어, 어서 가요. 촌장님댁으로 가야해요."
아론은 뭐가 그리 급한지 제다 촌장집으로 뛰어갔다.
- 작가의말
즐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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