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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의 그린라이트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르웨느
작품등록일 :
2023.06.03 12:30
최근연재일 :
2023.06.24 11:27
연재수 :
13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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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5,966

작성
23.06.0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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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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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 이런 패기 없는 것들.

DUMMY

일단은 선글라스를 끼고 오긴 했는데.


“아저씨가 정말 신호등맨이에요?”

“선글라스 벗어봐요!”

“아저씨 맨눈 보는 거 굉장히 비싼 건데, 얘들아.”


예나 지금이나 당돌한 애들은 당돌하구나. 오늘 같이 봉사를 하게 된 다른 학부형이 어서 등교해야지 않냐며 말려보지만 아이들의 고집을 꺾기엔 부족했다.


결국 건널목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정확히는 걷는 아이콘이 있는 위쪽 부분이 까매지고 멈춘 아이콘이 있는 아랫부분이 밝은 회색이 되었다.


이 능력이 생긴 이후로 색맹 비슷한 것이 되어버려서 신호등맨이라는 별명과 다르게 현실의 신호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시각장애라고 운전면허도 못 따고 말이야, 일해라 교통안전공단! 전국의 신호등에 화살표 마크를 넣어달라고.


잿빛 깃발이 달린 깃대를 눕히면서 선글라스를 벗어 내렸다.


“빨간색이다!”

“지금은 빨간불이니까 빨간 눈인 거예요?”


비싸다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재잘재잘 이것저것 묻는 아이들은 눈 색이 초록으로 바뀌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호들갑을 떨며 횡단보도를 건너주었다.


“헤헷, 진짜 인간 신호등이야!”


오늘도 이렇게 착실히 오해 하나 적립했군. 내 눈이 무엇을 기준으로 색을 바꾸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을 것 없어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멀어져 가는 뒤통수들을 보았다.


그나저나 쟤는 학교 안 가나. 초등학교 너머 나지막한 뒷산 중턱에 초록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며 다시 깃대를 눕혔다.


아침 일과가 끝났으니 슬슬 저쪽으로 넘어갈까. 빌린 조끼와 깃대를 반납하고 업무용 폰을 켰다. 일단 SNS부터 확인.


아침 일과가 끝났으니 슬슬 저쪽으로 넘어갈까. 빌린 조끼와 깃대를 반납하고 업무용 폰을 켰다. 일단 SNS부터 확인.


어제 잡은 괴물 사체 때문에 오늘 하루 방역한다고 휴교구나, 연산중. 지금 이 시각 괴물 출몰한 곳이 어딘지 마저 확인하고 산 초입부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도 두 개 뽑았다.


중턱까지는 금방이었다. 이 쉼터로 가는 길이 출입 금지판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조금 헤매긴 했지만.


“별로 안 올라온 것 같은데 여기 전망이 좋네.”


내가 왔다는 걸 대놓고 알리려 떠들자 벤치에 앉아 있던 이자 학생이 이쪽에 시선을 준다. 몰매를 맞은 후 고개도 안 들고 가던 어제 보단 낫군.


“‧‧‧‧‧‧.”


과묵한 건 그대로다. 어색한 거야 서로 마찬가지일 테니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려는데 소년이 먼저 휴대폰을 꺼내 내민다.


“이거 돌려드릴게요.”

“아, 응 고마워.”

“저 안 도와주셔도 돼요.”


딱히 큰 이유 없이 쥐여 보냈던 폰인지라 돌려받는 것도 별 의미 없이 챙기는데 뒤따르는 말이 손으로 내렸던 시선을 올리게 만들었다.

굉장히 건조한 말투네. 검게만 보이는 눈은 탁하다. 어제 보니 여럿이서 발로 걷어차던데 얼굴은 안 건드렸는지 생채기가 보이진 않았다. 적당히 감출 건 감추면서 괴롭힐 줄 아는 녀석들이란 뜻이다. 숨을 고른다.


좀 더 위를 올려다본다. 이자 학생이 홀로 앉아 있던 벤치 곁에 우뚝 선 신호등은 여전히 녹색 불을 흩뿌리고 있다.

세간에서는 내 신호등 불빛을 안전이니 위험이니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해 부르지만 십수 년간 이 능력을 사용해온 내 해석은 늘 하나뿐이었다.


빨간 불일 땐 멈추라는 것.

헌데 지금 네 불은 초록 불이네, 응. 내 그린라이트께서는 밟으라는군.


“반대야, 이자 학생.”


못 알아들은 시선이 선글라스를 응시한다.


“나 좀 도와주라.”


왜 내 눈에만 보이는 신호등들이 네가 있으면 그린라이트를 띄우는 건지 알려면 네 협조가 필수다.




지평선에 걸린 해가 붉다. 이쪽 길은 가로등이 모두 끊겨 있어 어두컴컴해지기 전에 내려가는 것이 좋았다. 아니면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앉아 있던가.

지금은 4월 초, 날이 아무리 많이 풀렸다 해도 야산에 노숙할 정도로 녹록한 기온은 아니었다. 게다가 배고픔을 호소하는 생리적인 욕구에 이자는 결국 뒷산을 내려갔다.

연립주택 공동 현관에서 걸어 나오는 모녀가 들어서는 이자를 보고 아는 체 해왔다.


“어머, 이자야. 어제 너희 학교에서 괴물들이 나왔다며. 넌 안 다쳤니?”


이런 물음을 받을 때마다 이자는 불편했다. 왜 멀쩡하냐는 소리로밖에 안 들려서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인 채 걸음걸이를 빠르게 했다.


“엄마, 쟤 좀 모른 척하면 안 돼?”

“맘 좀 곱게 써라, 기집애야. 안 그래도 가여운 앤데.”

“쟤는 그렇게 여기는 게 더 불쾌할걸.”


속닥거리는 모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이자는 아랑곳 안 하고 계단을 올랐다.

302호 도어락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자 평소의 기계음과는 다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현관 문고리를 잡고 당겨도 잠금장치가 맞물려 철컥거릴 뿐이었다.


도어락 건전지가 다한 거다. 이자는 우두커니 현관문 아래만을 응시했다. 돈은 없다. 아동급식카드도 집안에 두고 나온 상태다. 애초에 그 카드는 식품 외에는 계산할 수 없어서 있어도 이런 상황에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전지는 살 수 없다. 살 수 있어도 밖에서는 도어락 내부를 열고 교체할 수 없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떠오르는 대상은 많지 않았다. 이자 모자의 담당인 사회복지사의 폰 번호는 알고 있지만 그녀에게 연락할 기기가 없다.


공동현관에서 마주친 모녀가 떠올랐다. 안 됐다면서 수군거리면서도 자기 애하고 노는 것은 꺼려했던 입주민들. 집안에 있을 것이 뻔한데도 자식에게 문 하나 열어주지 않는 여자에 대해 온갖 입방아를 찧어댈 어른들. 이곳 주민들에게는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은 곤경이다.


문득 오전에 남자에게 돌려준 휴대폰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남자가 하루만 늦게 찾아왔어도 이 고비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을까. 애초에 자기 것도 아닌 폰을 남자가 가져갔다고 느끼는 속내가 참 구질구질해 문고리를 놓았다.


공중전화는 번화가 쪽에 나가야 하나 있다. 동전 하나 없지만 긴급통화로 후불 연결이 된다는 건 알고 있다. 복도의 램프에 늘어진 그림자를 응시한다. 이제 막 해가 졌을 뿐 아직 늦은 시각이 아니고 그 녀석들은 새벽까지 나와서 노는 무리다.


만에 하나라도 마주친다면 어제 당한 굴욕을 몇 배로 쳐서 갚으려 들 거였다. 내일 등교하면 벌어질 일이긴 하지만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을 하루 앞당겨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자 이자는 다시 연립주택을 나섰다.




오늘도 철야네. 저녁에 눈 붙이고 나오긴 했지만 밤중에 일하면 철야인 거지.


‘한두 명도 아니고 불법 브로커를 통해서 들어온 밀입국자들이 몽땅 사라졌으니 어느 놈들이 숨어서 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 맞을 텐데.’


대이변 이후로 세상이 개판 나면서 사회를 유지하고 제도권 안에서 보호받고 싶은 사람들은 더욱 도시 중심적으로 뭉치게 되었다.


괴물과 싸울 힘을 지닌 이들은 소수고 그들에게 보호받던 그들이 보호를 해주려고 하던 뭉쳐 있는 쪽이 연락하고 출동하기 수월하니까.


덕분에 특정 지역 부동산은 연일 상승세고 지방은 중심지 빼고는 버려진 폐가가 늘어섰다. 그렇게 인적은 끊기고 인프라는 남은 곳에선 시답지 않은 놈들이 꼬여 이상한 짓을 해대는 거고.


“오늘도 허탕인가 보다, 그치 얘들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상공, 대략 42m 쯤이다. 어둠은 내게 장애가 아니고 내 눈에만 보이고 나는 만질 수 있는 신호등은 상공에도 있으니 이런 잠복 수색에 하늘만큼 좋은 잠복처도 없는데 꼭 이런 임무 맡을 때 이렇게 방생된 괴조들과 마주친단 말이야.


“너희가 운 좋게 도시를 탈출한 개체인지 이제 막 버려진 시가지에서 튀어나온 건지 몰라도 너희 덕분에 빈손으로 가진 않겠다.”


집단 사냥을 할 줄 아는지 양쪽에서 두 마리가 달려든다. 일단 곡예비행이 어느 정도 가능한지 알아야 하니 건너편 신호등으로 넘어가면서 둘러보았다.


수는 총 14마리, 에서 12마리로. 놈들의 날갯짓이 이전보다 과격한 퍼덕거림을 보인다. 이렇게 서로 아이컨텍하는 동안 두 마리가 잡혀버렸으니 어떤 쪽으로든 동요한 모양이다.


꿰에에 하고 우는 것이 나름 자기들끼리는 소통하는 거 같고. 발사했던 송곳이 도로 감기고 재장착되면서 철컥 소리가 작게 난다.


성인 여자 평균치보다는 좀 더 작은 덩치라 동시에 덤벼들어도 여섯, 일곱이 한계일 거다.


“아, 맞다. 너희는 내 눈이 무슨 색으로 보여?”


밤중에도 벗지 않는 선글라스 덕에 보이진 않을 테지만, 애초에 말도 안 통한다, 의미 없이 물었다. 아무도 없는 거리와 건물을 몇 시간이고 혼자서 하는 것도 없이 쳐다보고 있으면 인형한테라도 말 걸고 싶어진다고.


“그거 알아? 인간의 세상에선 빨간불이 보이면 하던 거 다 집어치우고 멈춰 라는 뜻이야.”


와, 말하고 있는데 달려들긴. 머리와 양팔을 노리는 녀석들을 수그려 피하면서 다리를 낚아채려는 괴조의 등에 주검을 박아넣으며 함께 떨어졌다. 안전장치 없이 고층에서 추락하는 이 감각은 언제 느껴도 오싹오싹하다.


왼팔의 갈고리를 근처의 신호등에 던져 걸고 체중을 실어 그 건너편의 신호등 위로 오른다. 저놈들 왜 따라 안 내려오나.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주검에 박혀 같이 끌려온 놈의 멱살을 붙잡아 칼자루를 비틀어 뽑았다가 같은 자리를 다시 내리찍었다. 심장을 확실히 쪼개놔야지, 남은 녀석들 처리하고 돌아봤을 때 바닥에 없으면 슬프다고.


추욱 늘어진 사체를 놓아주고 거리가 넓은 계단을 오르듯 곳곳의 신호등을 밟고 위로 향한다. 내가 하는 짓거리를 구경하던 녀석들이 퍼드득거리며 멀어졌다.


아, 왜. 너흰 열하나고 난 홀몸인데. 이런 패기 없는 것들. 괴수의 망신들 같으니라고.


작가의말

이 작품의 현대적 배경은 평행 세계의 지구로 실존 지명, 단체, 인물 등과 연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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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진짜 뭐 하는 놈들이지. 23.06.16 20 0 11쪽
9 9. 응, 내가 나빴다. 23.06.13 19 0 13쪽
8 8. 착각을 깨줄 방법이 없네. 23.06.13 20 0 10쪽
7 7. 제 책임은 없다는 건 명확히 해야 하니 23.06.12 29 0 11쪽
6 6. 오냐, 어디 1억짜리 진심 한 번 들어보자. 23.06.10 20 0 11쪽
5 5. 넌 언제까지 솔로할 거냐. 23.06.09 24 0 11쪽
4 4. 야, 너구나? 근데 눈을 왜 그렇게 떠. 23.06.07 24 0 10쪽
3 3. 거기 누워 있어! 23.06.06 27 0 11쪽
» 2. 이런 패기 없는 것들. 23.06.03 21 0 10쪽
1 1. 저는,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23.06.03 71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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