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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냥] 체스3

“라이덴이 쓸 거면 뀨 말을 새로 만들어야겠네. 피 한 방울만 줄 수 있어? 뀨?”

“거절한다.”

“현명한 판단이야, 뀨.”

아이스타스는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요. 왜 화이트는 라이덴이 말만 하면 다 들어주는 걸까요. 심지어 거절당했는데도 똑똑하다고 칭찬을 해요. 불만 가득한 아이스타스의 얼굴을 못 본 듯 검은 용은 체스판만 내려다보고 있어요.

“누가 선을 맡을 거지? 뀨.”

“내가 하는 거 아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반문에 화이트는 웃음 지었습니다.

“보통은 연장자나 고수가 뀨 연하나 하수에게 선을 양보해, 뀨. 선제공격, 먼저 치는 쪽이 유리하니까, 뀨.”

여태껏 아이스타스가 백색 진영이었던 건 화이트가 양보했기 때문이에요. 아이스타스는 묘하게 구겨진 얼굴로 화이트를 응시했어요. 선이 유리하다니요?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아이스타스는 도통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재봅니다. 불리한 채로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아요. 힐끔힐끔 라이덴을 쳐다보자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소년이 입을 엽니다.

“그럼 내가 흑을 하지.”

“체스를 쉽게 보는 거야?”

소년이 후를 맡는다고 해도 아이스타스는 뾰족하게 대꾸했어요. 그냥 라이덴이 무슨 말을 하던 다 싫은 거예요.

“난 뒤에서 덮치는 걸 더 좋아하거든. 사냥도 좋아해.”

뭔가 쳐다보는 녹안이 굉장히 끈끈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지만 본인이 불리하게 시작하겠다니 말릴 이유 없죠. 아이스타스는 손가락을 얽으며 마음 놓았습니다. 안 좋은 건 역시 상대에게 떠밀어야죠. 헌데 라이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이트가 앞발로 소년의 뒤통수를 갈겼어요.

“한 번 더 그러면 매너 실격패 먹인다, 뀨.”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라이덴이 뒤통수를 쓸며 웃음을 터트렸죠. 뭐죠, 쟤들 왜 저렇게 친해 보여요? 아이스타스는 더욱 못마땅한 눈으로 라이덴을 쳐다봤습니다.

화이트의 말들은 체스 바깥으로 나와 다시 보석이 되었어요. 검은 용은 흑진주를 한 무더기 꺼내어 놀이판에 떨어트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얼굴 없는 말들이 되었지요.

“뭐야, 밋밋해.”

인형들의 생김새와 모션을 보는 재미로 체스를 두는 아이스타스는 실망했습니다. 이런 시시한 게임 어서 끝내고 화이트랑 놀고 싶어요.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체스는 각각 열여섯 개의 말을 가지고 하는 게임이야. 자기 차례 때 가진 말 중 하나만 움직일 수 있고, 그렇게 옮긴 말로 먼저 적 킹을 잡는 쪽이 이겨. 말의 종류는 여섯 가지인데 첫 번째가 킹. 팔방 중 한 칸씩만 전진할 수 있어. 내 킹은 바로 이 아이야, 프린세스라고 불러. 네 킹은,”

아이스타스가 소개하자 검은 드레스를 갖춰 입은 붉은 소녀가 팔짱을 끼고 흥 고개를 돌립니다. 붉은 소녀도 라이덴과 인사하기 싫나 봐요. 아이스타스는 적잖은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킹이야, 뀨.”

라이덴의 킹은 다이아몬드 반지였습니다. 허공에 떠서 한 바퀴씩 빙글 돌곤 했어요. 결혼반지처럼 화려했죠. 아이스타스는 설레었어요. 내기가 끝나면 달라고 화이트에게 졸라봐야겠습니다.

“그렇대. 킹은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서 적에게 잡힐 곳으로는 이동할 수 없어. 킹이 적에게 체크를 당했는데도 움직일 말이 하나도 없다면 체크메이트라고 부르고 게임 종료야. 체크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킹이 도망칠 곳이 없으면 그건 스테일메이트라고 불러. 킹은 자살하면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스테일메이트 상태가 되면 그 판은 무승부로 끝나게 돼.”

“빅장 같은 거로군.”

낯선 용어가 나왔지만 아이스타스는 되묻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걸 티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 사이 검은 용은 인덕션을 소환해서 팬을 달구고 옥수수를 튀겼어요. 고소한 버터 향이 방 안 가득 퍼집니다. 모두의 입 안에 살짝 침이 고여요.

“다음은 체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야, 계급은 퀸이고 내 퀸은 퓨어화이트야. 화이트는 자기 차례에 팔방 중 한 방향으로 칸 제한 없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어. 물론 가는 길이 다른 말로 막혀 있다면 그 말을 치우지 않는 이상 넘어갈 수 없지. 게임 시작 때는 킹과 같이 하나뿐인 말이지만 진행에 따라 제2의 퀸, 제3의 퀸이 증원될 수도 있어. 네 퀸은,”

“날씬한 왕관을 쓴 말, 뀨.”

“이거래. 위치로 보면 이게 룩, 나이트, 비숍일 텐데 이 탑이 룩이라니, 지크하르트에 비하면 훨씬 약해 보여.”

투덜거린 아이스타스가 마저 설명을 잇습니다. 룩이나 나이트, 비숍, 폰에 대한 설명은 앞서 두 말의 설명보다 짧았죠. 캐슬링과 프로모션, 앙파상도 덧붙이고 나서야 본격적인 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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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즈 에밀리, 한 칸 전진해.”

인형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걸 봤지만 말이 지시대로 움직이자 라이덴은 신기했습니다. 폰 메이드는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촛대를 든 채 정교하게 움직였어요.

“A8 룩, 한 칸 전진.”

“바보야, 다른 말이 앞을 막고 있으면 갈 수 없다고 했잖아.”

방금 전 규칙을 설명해줬는데도 행마법을 잊은 지시에 아이스타스는 눈을 흘겼어요. 라이덴의 룩에서 아주 작은 병사가 나오더니 탑 밖으로 현수막을 내던집니다. 그 현수막에도 바보냐, 가 적혀 있었습니다. 인형들에게까지 무시당하는 걸 보고 아이스타스는 다시 웃었어요.

“이동할 수 없는 곳으로 지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퀸즈 폰, 한 칸 전진.”

“킹즈 에밀리, 두 칸 전진.”

“킹즈 폰, 두 칸 전진.”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내뱉는 듯 빠른 지시에 아이스타스는 다시 얼굴을 구겼죠. 뭐죠, 왜 따라하는 거예요. 화이트랑 경기를 하면서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꼭 장난치는 것 같아 기분 나빴어요.

“따라하지 마. C2 에밀리 두 칸 앞으로.”

“어떻게 두든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짐을 미리 싸두는 걸 추천하지. C7 폰 두 칸 전진.”

어디까지 따라하나 싶어서 아이스타스는 메이드만 움직였어요. 라이덴도 고스란히 따라하는 바람에 양측의 폰이 파도물결처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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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폰이 없었어요. 양측의 폰이 시작 때보다 복잡하게 얽혔기에 사선을 헤엄치는 서펜트도 돌진하는 드레이크와 드래곤도 섣불리 나아갈 수 없었어요. 아이스타스는 대공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라이덴도 나이트를 옮겼죠.

기분 나쁜 변태 자식! 아이스타스는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화를 터트리는 순간 내기고 뭐고 없을 테니까요. 반드시 이겨서 우쭐대는 라이덴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습니다.

아이스타스는 계속 대공을 옮겼어요. 흑말 후방 폰을 잡을 수 있는 데까지 갔지만 그리로 대공을 옮겨봤자 다음 차례에서 흑말 퀸에게 잡아먹힐 거예요. 이제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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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에밀리 한 칸 전진.”

“C5폰, 에밀리를 잡아.”

C5에 있던 폰이 D4로 이동하자 촛대를 든 에밀리가 자루에 감싸여 사라집니다. 아이스타스는 기분이 나빴어요.

“모션 이상해!”

화이트에게 클레임을 걸고 F3에 있던 메이드도 희생시켜 적 폰의 진형을 무너트렸습니다. 계속 뺏기기만 하는 게 속상해 입술을 앙다물며 서펜트까지 희생말로 삼아요.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흑말 폰 하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대공이 기사들을 호출해 흑말 폰을 끌고 갔지만 별로 기쁘지 않았어요. 메이드 두 말과 서펜트 하나 잃은 것을 만회해야 해요. 집중하고 또 집중했죠. 라이덴은 그런 아이스타스를 쳐다보느라 체스판도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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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8에 있던 나이트가 C6로 껑충 넘어갔습니다. 아이스타스는 눈살을 찌푸렸어요. 이 녀석 잡을 게 없으니까 공격수를 전진시켜 놓고 자기 차례를 넘기네요. 아이스타스도 B1에 있던 대공을 A3로 옮겨요.

 

뒤늦게야 라이덴이 H6에 있던 폰을 전진시켜서 G4에 있던 설거지하는 에밀리의 접시 날리기로 혼꾸멍을 내주었습니다. 뭐 저 에밀리도 다음 차례에 룩에게 잡혀버리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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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8룩 H6으로.”

라이덴은 H5의 설거지하는 에밀리를 잡는 대신 바로 앞에서 멈췄습니다. 이런. D1에서 드래곤이 룩을 잡으려고 발톱 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 봐요.

아이스타스는 처음으로 막막함을 느꼈어요. 화이트와 할 때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 적은 많았지만 그래도 잡아먹을 게 없진 않았죠. 빼앗지도 못하고 뺏기기만 했다면 체스를 계속할 수 없었을 거예요.

라이덴을 상대하고 나서야 아이스타스는 화이트가 항상 잡아먹을 만한 말을 마련해줬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건 불리해 보이는 짓이지만 화이트는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져가기도 했어요. 이럴 때 화이트라면, 키세스를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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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으로 빽빽이 몰려 있는 흑의 말 사이에 파고들었습니다. 그러자 발 뻗고 쉬고 있던 비숍이 급히 쫓아오네요. 대공을 본래 자리로 돌려 역공을 합니다. 이 나이트란 말은 참 오묘하다니까요.

비숍은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C4로 와 메이드를 잡아버려요. B3에서 걸레질하는 에밀리로 비숍을 무찌르자 라이덴의 입이 잠시 다물렸습니다.

“킹, E7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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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8에 있던 킹이 한 칸 앞으로 나가요. 그 많은 말들 놔두고 하필 킹을 옮겨야 되나요? 폰 하나도 먼저 주지 않겠다는 이기심에 아이스타스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화이트으으으!”

아이스타스는 화이트의 목을 끌어안고 조르며 흔들었어요.

“쟤 좀 혼내줘! 때려줘! 아까처럼! 머리 때렸잖아!”

“게임과 관계없이 뀨 모욕적인 언행이면 제재하겠지만 미러전도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부분이니까 뀨, 졸렬하지만 반칙은 아냐, 뀨.”

라이덴이 모욕적인 언행을 했었나요? 했을 거예요. 아이스타스는 금방 동의했습니다. 저 자식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모욕적이에요.

“이 졸렬변태고자 자식!”

“뀹!”

화이트는 웃음이 또 터졌습니다. 황설탕과 물엿, 생크림, 버터를 넣고 녹여 만든 캐러멜소스를 그만 엎을 뻔했습니다.

“드래곤, 심판 볼 거면 제대로 봐라. 저것도 모욕적인 언사잖아.”

“뀩, 여름, 여름도 경고.”

라이덴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던 관계로 검은 용은 아이스타스의 관자놀이에 주둥일 맞췄어요. 아이스타스도 라이덴도 깜짝 놀랐죠.

“화이트, 뭐 만들어?”

아이스타스는 놀라긴 했지만 싫은 게 아니었어요. 화이트의 몸에서 나는 캐러멜버터 향은 달콤해 욱한 마음도 가라앉았죠.

“팝콘, 뀨. 사이다도 있으니까 목마르면 마시면서 해.”

목이 마르기보다는 탄다가 맞죠. 화이트가 내민 쟁반 위에는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음료가 있었어요. 그 속에 동동 떠다니는 얼음을 보고 냉큼 컵을 잡아 얼음을 삼키려다가 또다시 놀랐습니다. 이거 뭐죠? 물이 왜 이렇게 달고 톡톡 튀어요?

“달긴 하지만 탄산, 수로군.”

아이스타스와 같이 대접을 받은 라이덴이 한 모금 마시고 맞춥니다. 라이덴은 가는 눈으로 드래곤과 소녀를 살폈습니다. 소녀는 전적으로 드래곤을 신뢰하는 듯 코앞에 이빨이 다가와도 겁내는 걸 볼 수 없었습니다.

“저 드래곤은 수컷이야?”

“화이트는 여자애야!”

아이스타스가 크게 반발했어요. 라이덴은 어리둥절했죠.

“아, 그래.”

“남자애는 싫어! 화이트, 너 여자지?”

뭡니까, 알고서 답한 게 아니었나요. 아이스타스식 막무가내에 라이덴은 벙쪘습니다. 소스 버무리기를 끝내고 캐러멜 팝콘을 한 아름 들고 온 화이트가 고개를 갸웃합니다.

“지금은 암컷이지, 뀨.”

“훗, 봐. 여자애잖아, 내가 화이트에 관해서 틀릴 리가 없지.”

“역시 여름이야, 뀨! 자, 이것도 잡숴봐, 뀨!”

아이스타스의 우쭐거림에 장단 맞추며 검은 용은 대접을 양측에 내려놓습니다. 고봉처럼 수북 쌓인 하얀 과자에서는 달달한 향이 진동을 했어요. 아이스타스도 라이덴도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마싯어! 화이트!”

“응응, 먹으면서 해, 뀨.”

어느 사이 아이스타스의 얼굴엔 웃음만 가득했습니다. 라이덴이 등장한 후로 한 번씩 불안하게 떨리던 동공도 구겨지던 미간의 흔적도 사라졌습니다. 계속 아이스타스를 지켜본 라이덴은 그 차이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습니다.

“한 접시 더.”

라이덴은 예비 초월자다운 식성과 속도로 텅 빈 대접을 내밀었습니다. 주문하는 목소리는 제법 쿨했지만 입가에 하얀 팝콘 부스러기가 붙은 것은 하나도 쿨하지 않았습니다.

검은 용이 다시 옥수수를 튀기는 동안 멈췄던 내기는 진행되었습니다. 아이스타스는 뺨이 터지도록 팝콘을 입에 넣으며 체스판을 노려봤어요.

“H1 드레이크, G1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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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대며 시간을 끄는 건 아이스타스의 취향이 아니에요. 라이덴은 널널한 자리로 나이트를 옮깁니다. 바아보. 그렇게 대충대충 수를 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예요.

“대공, G6으로 이동해. 체크! 네 차례야.”

어디 한 번 살육전을 벌여보아요. 라이덴은 그제야 파놓은 함정을 알아챈 듯했어요. 현 상황은 체크당한 킹만 도망친다고 해결될 게 아니었죠. 킹을 옮겨도 동시에 표적이 된 흑말 나이트가 잡히고 말 거예요.

라이덴은 잡히기 전에 나이트로 대공을 쳤어요. 그러자 저 밑에서 푸릉거리고 있던 드레이크가 쿵쾅쿵쾅 뛰어와 나이트를 한 입에 덥썩 삼켜버렸죠. 모션이 끔찍했지만 아이스타스는 아무런 잔인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라이덴은 흑말 룩을 옮겨 드레이크를 사냥해버려요.

잡고 잡고 또 잡는 살육 퍼레이드. 아직 마지막 한 발이 남아 있다고요. 별 힘도 없는 설거지하는 에밀리가 접시 날리기로 룩을 처리해요. 암기 마스터 에밀리라 해도 손색이 없는 솜씨입니다.

이렇게 오른쪽이 깨끗이 정리되었네요. 아이스타스는 승리감에 팝콘을 더욱 우걱거렸어요. 이거 정말 맛있네요. 라이덴이 입맛을 다시며 제 쪽을 봅니다. 그러게 누가 빨리 먹으래요, 절대로 나눠주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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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미적 내빼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라이덴이 멈춰있던 폰들을 전진시켜요.

흑 폰을 잡고 잡았는데, 프린세스와 화이트의 전방에 남아 있는 메이드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이제 출격할 때가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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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D4로 이동해.”

“Yes my princess, 뀨!”

“너 말고!”

옥수수가 타지 않게 팬을 간간히 흔들어주고 있던 화이트가 대답합니다. 장난꾸러기 드래곤 같으니. 자, 이제 흑말 나이트와 드래곤이 마주보게 되었다고요. 나이트가 내빼버리면 흑말 퀸은 엄폐물 없이 드래곤에게 노출되어버리죠. 라이덴은 어떤 수를 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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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5 나이트, F4로.”

F4라 함은 D4에 멈춰 있는 드래곤이 가로 이동으로 잡을 수 있는 위치입니다.

“화이트, F……” 화이트가 늘 성동격서라고 했어요.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공격한다는 뜻이래요. 흑말 나이트가 이동한 곳은 H3의 메이드를 노릴 수 있지만, 메이드는 그리 값어치 있는 기물이 아니죠. 드래곤을 F4로 옮길 경우의 허수를 세어봅니다. 오픈로드가 된 흑말 퀸이 D2까지 내려올 거고, 그럼 체크가 되어요. E1에 있는 프린세스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F1밖에 없지만 그 자리에는 서펜트 한 마리가 대기하고 있는 걸요. F4로 옮기는 순간 체크메이트로 내기가 끝나는 거예요.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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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4로 이동해, 체크야. 졸렬 변태.”

하마터면 졸렬 변태에게 시집갈 뻔 했어요. 식은땀이 막 납니다.

“진짜 졸렬이 뭔지 보여줘?”

졸렬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라이덴이 조금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렇게 협박해도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화이트가 바로 옆에서 팝콘 튀기고 있는 걸요. 어쩜 자신의 드래곤은 요리하는 모습도 저리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우습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멋집니다.

“킹 F6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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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말 킹이 뒤로 빠지긴커녕 앞으로 나오네요. 덕분에 드래곤을 운용하기가 애매해졌습니다. 근접해버리면 반대로 드래곤이 킹에게 잡히고 말 테니까요.

“A1 드레이크, D1로.”

이제 흑말 퀸과 드레이크가 마주보는 현상이 되었습니다. 마주본다고 해서 서로 잡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에요. 양쪽 다 배후가 든든하거든요. 드레이크를 잡았다간 프린세스에게 반격당할 것이고, 퀸을 잡았다간 룩에게 역습당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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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덴은 D8에서 E7로 흑말 퀸을 옮겼습니다. 다시 퀸과 드래곤이 마주보네요. 킹이란 배후가 있는 퀸과 달리 드래곤은 등 뒤를 맡길 동료가 하나도 없습니다. 드래곤을 아끼는 아이스타스는 서둘러 드레이크를 측면지원으로 올려 보냈어요. 그러자 흑말 룩이 드레이크를 쫓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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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크를 잡아 죽인 룩이 드래곤 옆까지 왔군요. 약간 아리송해요. 드래곤이 룩을 잡으면 동시에 킹을 체크하게 되는데 말이죠. 이건 또 무슨 함정인가 싶어서 머리를 굴려보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현재로서는 룩을 처리해도 드래곤이 뒤를 잡힐 일이 없으니 무엇을 노리는지 몰라도 순순히 응해주어야겠네요.

“화이트, D4로. 체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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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F5로. 멍군.”

F5에서 빗자루질하던 에밀리도 자루에 쌓여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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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D3로, 체크.”

“퀸 E4로. 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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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과 드래곤 사이에 퀸이 끼어듭니다. 설마 퀸을 버림수로 쓸 줄은 몰라 아이스타스는 눈살을 찌푸렸어요. 드래곤을 전진시켜 퀸을 잡게 하자, 뒤이어 킹이 내려와 드래곤을 잡습니다. 쓰러지는 화이트의 모습에 아이스타스는 주먹이 떨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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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꼭 복수해줄게, 화이트!”

“고마워, 뀨.”

“너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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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이 죽었는데 화이트는 너무 태평해요. 속상하지도 않은 걸까요. 우선 흑말 나이트의 범위에 있는 잡초 뜯는 에밀리를 전진시켜요. 그러자 흑말 나이트는 껑충 내려와 프린세스를 노렸습니다.


“G2로, 나이트.”

서로가 서로에게 체크를 걸고 피하고 하던 사이에 왼쪽 진영은 빨래하는 에밀리와 흑말 폰만 남았어요. 그때에 아이스타스는 고양감이 찾아왔습니다. 흥분이 조금씩 차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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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위로 한 칸!”

흑말 비숍이 급히 추격해오지만 대공을 옮겨서 비숍이 내빼게 만들었어요. 흑말 비숍은 멀리 도망치지 않고 빨래하는 에밀리가 B8에 닿지 못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지요. 잔잔히 퍼졌던 고양감 만큼 아이스타스는 분통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쓸모없는 에밀리! 두 칸만 더 전진할 수 있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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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입장은 역전되었어요. 승격하려는 라이덴의 흑 폰을 아이스타스가 막아야 해요. 서펜트를 급히 사선 아래로 한 칸 보냈습니다. 흑 폰이 한 칸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정리될 겁니다.

그 사이 라이덴은 오른쪽 진영에서 나이트를 움직여 잡초 뜯는 에밀리조차 납치해버렸어요. 정말 쓸모없는 에밀리입니다. 서펜트를 위로 보내어 마지막 남은 흑 폰을 없애버려요. 그러자 라이덴의 나이트로 마지막 남은 에밀리를 잡으려고 하네요.

“에밀리! B7로!”

이제 한 칸만 더 가면 되는데 앞은 비숍이 막고 있고 심심찮게 나이트가 노리고 있어요. 지원투수로 서펜트를 보냈습니다. 서펜트에게 위협받자 비숍이 길을 비켜줬어요. 아이스타스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에밀리, B8로. ……승급 안 할래.”

화이트를 부르고 싶은데 부를 수가 없어요. 지금 상태로는 프로모션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힐끗 쳐다본 라이덴이 물러서지 않고 마저 승부수를 던져요.

“비숍, B8로.”

“서펜트, B8로.”

“나이트, B8로.”

에밀리가 잡히고, 비숍이 잡히고, 서펜트가 잡히고, 살아남은 것은 흑말 나이트입니다. 아이스타스는 더는 내기할 의욕이 나지 않았어요. 막 짜증나고 분하기만 합니다.


댓글 1

  • 001. Personacon 二月

    17.04.08 16:42

    이 글 완전 제 취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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