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군
옛 조나라의 영토를 횡단하던 시황제의 전국순행 행렬이 한단(邯鄲)에 이르렀다.
한단.
난공불락을 자랑했던 조나라의 도읍이다.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들이 쌓아올린 것처럼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성곽은 어마어마한 높이와 폭을 자랑했다.
시황제와 호해가 성문을 통과하자 모든 장졸들이 군례를 갖췄다.
“한단은 수많은 침략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장평에서 대승을 거뒀음에도 끝내 한단을 함락시키지 못했지.”
“하, 하지만··· 조나라는 겨, 결국 망하지 않았습니까?”
“짐에게 하늘이 내린 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하늘이 내린 명장.
도읍 한단을 함락시키면서 조나라를 최종적으로 멸망시킨 무성후(武成侯) 왕전을 말하는 것이리라.
왕전이 없었다면 한단을 함락시킬 수 있었을까?
아니,
결코 불가능했겠지.
수많은 장졸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시황제는 지금까지 그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천하통일은 인간들의 의지가 만든 결과였다.
그렇기에 하늘을 대신하여 대업을 달성한 본인은 삼황오제(三皇五帝)조차 초월한 존재로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폐하, 어서 왕궁으로 드시지요.”
“알겠다.”
비록 망국의 상징이 되고 말았지만 조나라의 왕궁은 여전히 번영을 자랑했다.
황금처럼 번쩍이는 각루.
최고급 박석(薄石)을 깔아서 만든 대로와 계단들.
그리고 왕의 정전(正殿)을 중심으로 펼쳐진 수많은 전각들이 북방을 호령했던 조나라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었다.
분명 함양의 아방궁(阿房宮)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찬연한 금빛으로 장식된 조나라의 궁궐은 호해의 탐욕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부황을 뒤따르면서 조나라의 왕궁에 들어서다니···! 마, 마치 태자가 된 것 같아!’
진나라의 검은 군기들이 좌우로 정렬한 채로 나부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대가 열병식을 거행하듯 엄숙함을 지키고 있었다.
분에 넘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일까.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가 단번에 녹아내릴 정도의 강렬한 권력욕에 휩싸였다.
태자에 책봉되면 부황을 뒤따르면서 천하를 바라볼 수 있다.
조나라의 정전으로 향하는 부황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해의 눈빛이 야욕으로 물들었다. 장차 이세황제가 되어 천하를 거머쥐겠다는 욕망이 그동안 우유부단하던 마음을 충동한 것이다.
“조나라의 옥좌에 앉으니 역시 감회가 남다르군.”
시황제가 금은보화로 장식된 상석에 앉았다.
역대 조나라의 왕들이 앉았던 옥좌였다.
양손을 손잡이에 올렸다.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면서 천하를 정복한 황제로서의 위엄을 드러냈다.
“폐하, 전선에서 급보가 도착했사옵니다.”
“어서 가져와라.”
중랑장(中郞將) 몽의가 죽간을 내밀었다.
그에 시황제는 옥좌에 앉은 채로 죽간을 펼쳐보았다.
“벌써 몽염이 북적을 정벌했단 말이냐?”
“북적의 십만 대군을 쳐부수고 구원군과 운중군을 수복했다고 하옵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완승을 거뒀다.
또한 정벌에 참전했던 병력의 피해도 매우 경미한 수준이었다.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대규모 원정을 허락하지 않았던가. 설마 몽염의 정벌군이 이토록 신속하게 대승을 거둘 줄은 몰랐기에 의아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참살하거나 포로로 붙잡았다라···. 북적의 우두머리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것은 아쉽다만 어쩔 수 없지.”
다 읽은 죽간을 내밀었다.
그러자 환관이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죽간을 건네받았다.
“몽염을 함양으로 불러들여 크게 상찬해야겠군.”
“부소 공자도 전장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공자에게도 상을 내리시지요.”
형님께서 북벌에 성공했단 말인가?
대화를 묵묵히 경청하던 호해는 당혹감을 내비치면서도 부소를 치켜세우는 몽의를 못마땅하다는 눈길로 노려보았다.
“죄인의 신분으로 떠난 괘씸한 놈에게 포상을 내리란 말이냐? 당치도 않다.”
“아닙니다. 소장이 감히 실언을 범했사옵니다.”
툭-. 툭-.
주먹으로 옥좌의 손잡이를 두드리던 시황제가 재차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원정을 완수한 정벌군이 상군으로 돌아왔겠군.”
“부소 공자는 무성후와 함께 삭방군을 점령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삭방군···?”
“공자가 임시적으로 명명한 장성 이북의 땅이옵니다.”
삭방군(朔方郡).
구원군의 서쪽에 위치한 황하 너머의 지역이다.
북적의 잔당들이 장악하고 있을 터.
부소와 왕리가 여세를 몰아 삭방군의 점령에 나섰다.
절체절명의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백면서생에 불과했던 아들이 점점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붓과 죽간을 가져오라. 새로 점령한 영토의 이름을 짓겠다.”
“알겠사옵니다.”
부소가 명명했던 삭방군이라는 이름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삭방군이라는 이름을 곧바로 바꿨다.
“몽의. 짐이 친히 작명한 지명을 함양에 전해라.”
“폐, 폐하! 그것은···!”
시황제가 잘칵, 소리와 함께 죽간을 들어올리며 글자를 보여주었다.
신진(新秦).
새로 점령한 군현의 이름을 신진군(新秦郡)이라 정했다.
* * *
흉노족의 잔당들을 토벌하고 삭방군을 점령한 정벌군이 원정을 종료하고 상군(上郡)으로 귀환하면서 개선식이 거행되었다.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북적을 쳐부수고 돌아온 장졸들의 용맹한 면모를 구경하기 위함이다.
뜨거운 함성과 갈채를 시작으로 진나라 장졸들이 관문을 통과했다. 모래바람 때문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상태로 돌아왔지만 장졸들의 개선식은 엄숙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황제 폐하 만세!”
“진나라 만세!”
몽염. 왕리. 이신.
진나라를 대표하는 명장들이 십만 대군을 쳐부쉈다.
그리고 부소.
처음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황제의 적장자가 전공을 세우면서 명성을 떨쳤다.
천하가 북방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변방으로 추방된 황제의 적장자가 공신들과 함께 전공을 세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몽염이 예상했던 것처럼 진나라의 백성들도 “폐하께서도 노여움을 거두고 변방으로 보낸 맏아들을 함양으로 불러들이시겠지.” 라고 여겼다. 오랑캐들을 대파하면서 망진자호(亡秦者胡)라는 불길한 예언을 소멸시킨 아들을 총애하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태자에 책봉될 날이 머지않았다.
부소 공자가 이세황제로 즉위하게 되리라.
천하의 백성들은 모두 입을 모아 진나라의 새로운 세대를 예상했다.
“공자님! 제발 전장에서는 무리하지 마시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무리를 안 하냐. 무슨 소풍 간 것도 아니고.”
이세황제의 재목으로 거론되고 있는 황제의 적장자는 바가지를 긁히는 중이었다.
네가 내 마누라냐.
누가 보면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환관과 지저분한 추문이 떠도는 것은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다.
은리가 격앙된 목소리를 빽빽 내지르자 부소는 고개를 돌리면서 투덜거렸다.
“함양에서 답장은 왔어?”
“지금 폐하께선 한단에 계세요. 정벌군이 출진하자마자 폐하께서 전국순행을 떠나셨거든요.”
대규모 정벌과 동시에 수도 함양을 비웠단 말인가.
과연 천하를 통일한 지배자답게 담력이 보통이 아니군.
“으음···. 그럼 다시 서찰을 보내야 하나?”
“아뇨, 폐하께선 공자님의 요청을 윤허하셨어요. 옛 조나라 땅으로 떠나실 줄 미리 알고 있었거든요. 함양의 궁인들과는 자주 서한을 나누고 있으니까요.”
이런 똑똑한 환관을 보았나.
하나를 부탁하면 열을 해내는군.
환관들이 부정부패의 상징처럼 여겨지면서도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은리의 똑 부러지는 일처리에 부소는 환관의 중요성을 느꼈다.
“공자.”
“아, 누님.”
부소와 은리가 강족과 저족의 이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을 때,
흑발을 늘어트린 여인이 다가왔다.
상장군 몽염의 외동딸인 몽연화였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폐하께서 삭방군이라는 이름 대신에 새로운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에잉, 그냥 좀 쓰시지···. 뭐가 또 그렇게 불만이시람.”
불효막심한 아들이 정한 지명 따위는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꼬장의 결과인가.
노여움을 슬슬 풀 때도 되지 않았나.
아무리 온화한 성정이라도 사춘기가 되면 한 번쯤 반항할 수도 있지.
배려와 융통성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는 폭군의 포악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새로운 이름?
딱히 궁금하진 않았다.
여느 지명들처럼 상투적인 이름이지 않을까.
하지만 몽연화가 의미심장한 반응을 보이자 부소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항상 단아하고 이지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연상의 누님께서 노골적인 반응을 보이다니. 복도에서 회초리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몽연화의 말을 기다렸다.
“신진군. 폐하께서 신진군이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신진이요···?”
크게 놀랄 건 없는데요.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 지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새로울 신(新). 그리고 대진의 진(秦)입니다.
“······.”
풀이하면 새로운 진나라.
중원 전역에 격렬한 파란을 불러일으킬 지명이 발표되었다.
군현 이름에 불과하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겠지.
시황제가 간접적으로 후계구도에 대한 의중을 내비쳤다는 여론이 빗발칠 터였다. 태자 책봉에 매번 미적지근한 반응만 고수했던 황제였기에 파란의 규모가 더욱 거대할 것이었다.
“공자님을 태자에 책봉하겠다는 의중이 아닐까요···!”
“경하드립니다, 공자.”
은리와 몽연화가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에 부소는 흙빛이 된 얼굴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 * *
중랑장 몽의의 부하들이 동해군(東海郡)의 회음현(淮陰縣)에 이르렀다.
전혀 개발이 안 된 촌구석이다.
내륙의 호수를 끼고 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황제를 호위하는 무관들이 왔다는 소식에 동해군의 태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혹시라도 행정업무를 조사하기 위한 감찰관일까 대경실색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동해태수. 회음현에 한신이라는 이름을 쓰는 남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예,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에 동해태수가 어벙한 표정을 지으면서 되물었다.
그러자 무관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죽간을 꺼냈다.
한신(韓信).
단번에 말귀를 못 알아먹는 동해태수를 위해 친절히 글자까지 보여주었다.
“자, 잘은 모르겠사오나··· 아마 관청의 명부에 모두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그럼 어서 관원들을 불러 명부를 살펴보도록 하게.”
회음현에서 한신이라는 이름을 쓰는 인원은 열 명이 넘었다.
한나라 출신의 백성들들 중에 한(韓)을 성씨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신(信)이라는 이름도 흔하게 쓰이는 이름이었기에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꽤나 많은 인원이다.
동해태수에게 보고를 받은 몽의의 무관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민에 빠졌다.
“나으리들께서 어느 한신을 찾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명부의 마지막에 적힌 놈은 분명 아닐 겁니다.”
“동해태수, 그게 무슨 말인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마을에서 걸식이나 하는 놈입니다. 그런 한심한 날백수가 나으리들께서 찾으시는 한신일 리가 없지요. 얼마나 하는 행동들이 한심하면 동해군의 태수인 제가 놈의 악평을 알고 있겠습니까?”
“흐음···. 아무튼 모두 불러보게.”
한낱 지방관의 의견 따위는 중요치 않다.
황제의 적장자께서 내린 명령이다.
열 명의 인원을 모두 함양으로 데려가더라도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무관이 명령하자 동해태수는 관원들을 소집하여 열 명의 인원을 관청으로 불러모으도록 했다.
- 작가의말
늙은 아낙네에게 밥을 빌어먹고 깡패들 가랑이나 기어다니던 내가 사실은 중원을 통일할 국사무쌍의 대장군이었습니다.
완전 라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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