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
중원의 통일국가들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계책을 이용하여 유목국가의 등장을 저지해왔다.
한낱 미개한 야만인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심점이 출현하게 되면 천하를 뒤집을 힘을 가지게 된다.
한(漢)을 유린했던 흉노 제국이 그러했다.
또한 중원을 침략하여 왕조를 건국한 수많은 유목민족들이 그러했다.
그렇기에 회유책과 강경책을 사용하면서 산짐승이나 다름없는 유목민족들을 길들였다. 날카로운 발톱이 형제와 동포를 향하도록 이간질하면서 저들이 스스로 머릿수를 줄이고 증오를 키워가게끔 만들었다.
-유목민족의 통일은 중원에게 있어 악몽이나 다름없다.
북방의 말발굽에 유린당한 중원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강족과 저족은 흉노족의 졸개입니다!”
“미개한 야만인들을 받아들인다니요! 머릿수를 줄이는 것만이 저들을 다스리는 법입니다!”
흉노족을 배척하고 강족과 저족을 회유하겠다는 부소의 결정에 수많은 장수들이 반대했다.
야만인들은 오랜 숙적이다.
국경을 넘어오는 야만인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
진(秦)나라를 비롯하여 조(趙)나라와 연(燕)나라가 모두 강경책을 고수했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말귀가 통하지 않는 미개한 야만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분명 폐하께서 진노하실 겁니다.”
“이미 공자께선 정벌이 시작되기 전에 환관에게 당부하여 함양으로 서한을 보내셨다더군.”
몽염의 대답에 왕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반면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이신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부소 공자께서 강족과 저족의 복속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계셨단 말이군요. 하지만 복속이 목적이었다면 정벌이 시작되기 전에 저들을 회유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난폭한 야생마를 길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근이 아니라 가혹한 채찍질일세. 채찍에 피투성이가 된 야생마는 그제야 자신이 한낱 날짐승임을 깨닫게 되지.”
두렵다. 무섭다.
오한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회유책의 성공을 위해 전장에서 수만 명을 죽였다는 뜻이 아닌가.
보통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왕리는 떨리는 손길로 술잔을 거머쥐면서 침음을 삼켰다.
“이보게, 몽염. 부소 공자께서 정말 많이 달라지셨군. 다른 사람처럼 여겨질 정도야.”
“···동감일세.”
진나라의 공신들이 기억하는 부소는 개미 한 마리도 밟지 못하던 유약한 도련님이었다.
온순함과 완전히 상반되는 잔악성을 마주하게 되면서 더욱 의문이 들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충격 때문일까.
함양에서 추방당한 이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돌변했다.
다른 영혼이 빙의하여 육체를 차지했다는 상상을 누가 감히 할까.
몽염과 이신은 기이함을 느끼면서도 ‘부소 공자께서 정말 많이 달라지셨다.’ 라고만 생각했다.
“강족과 저족에게 진심을 받아낼 수 있겠나? 죽음을 앞둔 놈들이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 부하들과 함께 풀어주면 제 주인인 흉노족에게 다시 달려갈 텐데.”
“이미 공자에게 일임하기로 했네.”
“부소 공자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양이군. 누가 보면 사윗감인 줄 알겠네, 이 사람아. 벌써부터 팔불출처럼 사위를 챙길 생각인가?”
“크흠! 쓸데없는 말을···!”
부소는 황제의 적장자이나 변방으로 추방된 죄인의 신분이다.
그런 부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몽염의 모습에 많은 의혹들이 생겨났다.
노처녀 딸을 황후로 내세우려 한다.
이세황제의 장인이 되어 진나라 조정을 장악할 심산이다.
세간에서 확산되고 있는 불쾌한 뜬소문을 몽염이 모를 리가 없었다.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이신의 말에 헛기침을 늘어트리면서 불쾌감을 표현했다.
“내가 아무리 팔불출이어도 그렇지···! 설마 반오십이 넘는 여식을 황후로 내세우겠나!”
“실로 안타까운 일이네. 만약 연화가 서너 살만 어렸어도···. 부소 공자가 연상의 여인이 취향이라면 어떻게든 노려볼 만할 텐데.”
“술이 들어가면 금세 나불대는 버릇은 여전하군.”
“하하핫! 쉽게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지.”
부소를 사윗감으로 들일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은 듯했다.
언감생심이라 했던가.
활약을 거듭하는 부소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욕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목민족 세력의 대군을 쳐부수고 드넓은 영토를 탈환하는 일생일대의 전공을 거두었다. 변방의 승전보가 함양에 도달하게 된다면 황제는 기꺼이 노여움을 풀고 적장자를 불러들일 터.
통일제국의 후계자.
그것은 황위를 물려받을 태자(太子)를 의미한다.
북벌의 완수를 통해 중원의 통일제국을 물려받을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만천하에 증명했다. 지금까지 여러 이유들을 내세우면서 태자 책봉을 미뤄왔던 황제도 이번만큼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 * *
유목민족 세력을 격파하면서 흉노족이 점거하고 있던 구원군(九原郡)과 운중군(雲中郡)을 되찾게 되었다.
강족과 저족을 구원군과 운중군에 흩어져 살도록 명령했다.
물자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준마와 가죽을 받는다.
중원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통치와 예법을 따른다.
충성과 복속의 증거로서 각지의 부족장에게 진나라의 관직을 하사한다.
패자들을 향한 자비라고 하기엔 너무도 호화로운 조건이었다. 부소의 제안을 접한 부족장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확답을 주저했다.
왜 우리들에게 잘해주지?
국경을 침탈하여 번번이 약탈을 일삼은 철천지원수일 텐데.
이런 회유책은 변변찮은 규모인 우리들보단 강성한 흉노족에게 해야 하지 않나?
자비로운 제안이다.
과연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부족장들은 자신을 속이려는 기만책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대답이 없네. 당장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마술을 보여줄까?”
“아, 아닙니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물리마법.
45만 명을 땅에 묻어버리는 대마법사 백기의 바위마법도 있다.
스산한 목소리로 결정을 주저하던 부족장들을 위협하자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그러자 부소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와 굶주림이 피하고자 국경을 침략한 것을 알고 있다. 지금부터 진나라가 너희들을 조정의 보호를 받는 군민으로 거두겠다. 황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통일제국을 호령하는 황제의 적장자가 보호와 보살핌을 약조했다.
그에 신뢰를 느끼기 시작한 강족과 저족의 부족장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였다.
“하지만 맹세와 신의와 배반하는 행동을 한다면 결단코 용서치 않겠다. 노인과 아녀자를 가리지 않고 부족을 쓸어버릴 테니.”
이것은 평등한 교섭이 아니다.
승자는 명령하고 패자는 따른다.
강족과 저족의 부족장들에게 생사여탈권이 본인에게 있음을 각인시켰다.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진나라를 위해 싸우겠나이다!”
뛰어난 용력과 기마술을 겸비한 강족과 저족은 분명 출중한 전력이 되겠지. 말에서 활을 쏘면서 적들을 교란하는 궁기병을 편제에 둘 수 있을 터였다.
흉노족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또한 언젠가 중원을 집어삼킬 유방과 항우를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착실하게 안배를 쌓아둬야 한다. 시황제의 사망과 진나라의 몰락으로 시작될 중원의 혼란기를 수습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욱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일단 나부터 강해져야 돼. 유약한 백면서생을 누가 의지하겠냐고. 일단 운동으로 몸부터 키우고 무관들에게 검술도 배우고···. 젠장,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잖아.’
월지와의 공방에서 수차례 죽을 뻔했다.
눈 먼 화살에 맞을 뻔했으며, 적의 급습에 목이 달아날 뻔하기도 했다.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방패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불귀의 객이 되었겠지.
1만의 병력이 전멸의 위기를 겪었다.
어쩔 수 없는 중과부적의 상황이었다고 해도 본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진나라 장졸들은 북을 치고 고함을 내지르면서 전선을 독려했던 부소의 결단력과 담대함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본인의 무력함에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몽염에게 한 번 부탁해봐야겠어. 아무리 말라깽이라도 단기간에 다부진 근육질로 만들 수 있는 일타강사를 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일단 이 빌어먹을 어좁이부터 해결해야지.’
겨우 몇 달 만에 기마술을 익힌 것처럼 무예를 빠르게 익힐 방법은 없을까.
몽씨 가문의 누님에게 또 부탁해야 하나.
* * *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는 황실을 보필하는 환관들의 우두머리이자 시황제의 눈과 귀를 대신하는 첩보기관의 수장이기도 했다.
황제의 일인체제를 위해서였다.
또한 반역의 무리들을 사전에 제거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전국의 수많은 협객들이 시황제의 암살에 실패했던 이유가 첩보기관의 활약에 있었다. 중원을 비롯하여 주변국까지 파견된 수천 명의 첩자들이 함양으로 첩보를 보내면서 정세를 감시했다.
“몽염이 대승을 거뒀다고? 그게 사실이냐!”
“그렇사옵니다, 어르신. 오늘 아침에 전서응을 보내왔습니다.”
상장군 몽염은 30만 병력의 군권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다. 게다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몽의의 형이었기에 수많은 첩자들을 파견하여 경계했다.
북벌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유목민족 세력이 와해되었으며 구원군과 운중군을 수복했다.
최악의 결과였다.
황제가 북벌을 성공적으로 이끈 몽염을 중앙으로 불러들이면 조정이 몽씨 가문의 손아귀에 떨어지겠지. 그동안 조정에서 영향력을 쌓아온 본인은 뒷방 늙은이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부소.
몽염보다 더 큰 문제는 함양에서 추방당한 황제의 적장자였다.
북벌에서 일생일대의 전공을 세웠으니 모든 관심이 집중되겠지. 황실의 후계구도에 계속 중립을 고수하던 조정의 원로대신들이 일제히 부소의 편에 설 것이었다.
“폐하께서 부소를 다시 함양으로 불러들이기라도 하면···!”
부소는 중랑장(中郞將) 몽의와 친분이 두터웠다.
만약 부소가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면 모든 공직에서 밀려나는 수모를 겪게 되리라.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지금의 자리까지 오지 않았는가.
조고는 주름이 가득한 손아귀로 죽간을 움켜쥐면서 가슴을 옥죄는 조바심을 드러냈다.
“다른 공자라면 모를까 부소만큼은 안 된다! 감히 폐하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던 놈이 이세황제에 오른다면··· 나와 너희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다.”
어떤 공자가 이세황제에 오르더라도 꼭두각시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부소는 아니다.
놈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념을 이루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의 백면서생이었다면 말귀가 어느 정도 먹혔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신념을 가지기 시작한 황제의 적장자에겐 어떤 회유와 협박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중거부령 어르신.”
명령을 조용히 기다리던 환관이 다가왔다.
그에 조고가 입가를 비틀면서 대답했다.
“함양으로 오기 전에 부소를 죽여야겠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살수들은 차고 넘친다.
충직한 사냥개로 길들여진 암살의 명수들을 동원한다면 제아무리 몽염의 보호를 받고 있는 부소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
부소를 죽이고 처소를 불태워서 사고로 위장하면 된다.
지금까지 조정의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해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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