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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나양 님의 서재입니다.

퇴역병의 무림보은행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새글

유한세상
작품등록일 :
2024.05.08 22:07
최근연재일 :
2024.06.20 18:15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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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22
추천수 :
570
글자수 :
281,075

작성
24.06.0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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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이별과 만남-1

DUMMY

“그냥 내려가지 뭣 하러 무리했느냐?.”

“흐흐. 형님. 원수를 놔두고 어떻게 빠진단 말이오. 으악! 심 소저 살살 좀!”


실실 웃으며 앉아있던 황영파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엄살을 피웠다.


“참아요. 의원 말 안 듣고 멋대로 움직일 땐 이럴 거라고 예상 못했어요?”


피로 흠뻑 젖은 붕대를 갈아주던 심혜선이 못마땅한 어조로 타박했다.

할 말이 없었던 황영파는 그저 끙끙거리며 그 고통을 참아야만 했다.

심혜선은 곁눈질로 북궁백을 훔쳐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쪽은 힘을 많이 썼나 봐요? 눈가에 주름이 생겼네.”


그 말에 북궁백이 손을 들어 눈가를 매만졌다.

심혜선의 말대로 옅은 주름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머리도 조금 밝아진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해서 그렇소.”

“흐음.”


미간을 좁히는 게 영 못 믿는 눈치였다.

지난 며칠간 그녀의 질문 공세에 시달린 북궁백은 또 똑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자리를 피하고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았소. 마저 끝낸 후 쉴 생각이오.”

“형산파에 맡기면 될 걸.”

“그들도 부상자가 많아 이곳에서 치료 중이지 않소. 그리고···.”


북궁백이 방문을 나서며 말했다.


“내가 시작한 일이오.”


담담한 목소리에 담긴 책임감을 느낀 서혜선은 말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황영파가 불쑥 말을 건넸다.


“심 소저. 혹시 북궁 형님에게 관심 있소?”

“뭐래? 내가 왜 나이 먹은 사람에게 관심을 주나요?”


심혜선이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황영파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북궁 형님. 서른다섯밖에 안 됐소.”

“저렇게 노안이면 더 나쁜 거잖아!”


심혜선이 빽 소리를 지르더니 거칠게 붕대를 주워들고 쿵쿵거리며 방을 나갔다.

난데없는 고함에 몸을 피했다가 상처에 힘이 들어간 황영파는 고통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내숭은···. 얼굴이 벌게진 게 보이는구먼.”


* * *


형산의가를 나온 북궁백은 형산현 밖으로 이동했다.

곳곳에 놓인 화롯불로 환하게 밝혀진 넓은 들판 위에는 백여 명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고 항복한 오합련 무인들이다.

그들 사이로 형산파 문도 몇몇이 오가며 감시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한쪽 끝에 지펴진 모닥불 옆에 드러누워 있는 추걸개가 보였다.


“왔냐?”


추걸개는 우물우물 씹고 있던 나뭇가지를 뱉어내며 그를 반겼다.


“계속 지켜보고 계신 겁니까?”

“이장로께서 도와달라 하시길래 그러겠다고 했다. 지루한데 잘 됐지 뭐.”

“마혈을 짚어 움직일 수 없지 않습니까?”

“지루하다는 건 익숙해져서 큰 감흥이 없다는 말이야. 이런 예기치 못한 사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돋지.”


추걸개는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시커멓게 때가 낀 손가락으로 오합련 무인들을 가리켰다.


“저놈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밥? 뒷간? 혹시 마혈을 풀기 위해 용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럼 족쇄라도 채워야 하나?”


추걸개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활짝 웃으며 상상의 나래를 이어갔다.

북궁백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주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할 일 없는 거지답다고.

아마도 일각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때? 재밌지?”

“...예.”

“킁. 거짓말을 잘 못하는구먼. 넌 죽어도 거지는 못 되겠다.”


추걸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넌지시 묻는다.


“넌 저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냐?”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

“시간과 인력, 자금. 전부요.”


추걸개는 옆에 서 있는 북궁백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표정에 변화가 없다.

그래서 물었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전부 죽입니다.”

“왜?”

“오합련은 수장들과 주력을 잃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닙니다.”


전쟁 중 포로는 존재만으로 전력을 갉아먹는다.

그렇기에 십중팔구 병장기도 없이 최전선에 내몰려 화살받이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병장기가 없어도 신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내공이 있기에 그 자체만으로 잠재적인 위협 요소로 항상 남아있다.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는 전장에서 그런 위협 요소는 철저히 배제해야만 한다.


“삼견쌍사 때문에 그러냐? 삼견 중 둘은 죽고 일사회의 후계자 공두기는 저기 누워 있다. 쌍사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들이 잔존 세력을 수습해 전쟁을 지속하는 건 불가능하지. 이 정도면 전쟁이 끝났다고 봐도 되지 않아?”

“끝났다고 상정하는 것과 끝난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북궁백의 어조는 굳건했다.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확신에 차 있다.

추걸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전부 다 죽이는 건 너무 잔인한데.”

“그럼 단전을 폐하면 됩니다. 그러면 무림의 법도가 아니라 대명률에 의해 처리될 겁니다.”


추걸개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이전에 화공이나 낙석계를 제안하는 모습을 보고 느꼈지만, 그의 생각은 무림인과 궤가 달랐다.

추걸개가 본 무림인들은 상대가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붙여주려 해도 단전을 폐하느니 차라리 죽여달라 소리쳤다.

이렇듯 무림인에게 있어 무공은 목숨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지만, 북궁백은 둘을 철저히 분리해서 생각했다.


‘그래서 두렵구만···.’


산사태를 일으킨 신위에 무림인과 판이한 관념.

그가 왜 강호행을 하는지 얼추 알고 있어서 더욱 걱정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


“앞으로 어찌할 거냐?”

“이 일이 얼추 정리될 때까진 이곳에 머물 생각입니다.”

“그다음은 어디로 갈려고?”

“강서, 복건을 거쳐 항주로 갈 생각입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북궁백은 물끄러미 추걸개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자신의 행선지에 관심을 두는지 궁금했다.

그 눈빛을 읽은 추걸개가 기가 찬 표정으로 쏴붙였다.


“이놈아. 내가 네놈에게 반해서 그러는 줄 알아? 사고 칠까 봐 걱정돼서 그렇지.”

“제가 무슨 사고를 친다고 그러십니까?”


추걸개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놈이 강호에 출도하고 지난 한 달 동안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아느냐?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자그마치 팔백이다, 팔백!”


추걸개가 질린 기색으로 괜한 모닥불만 쑤셔댔다.

그럴 때마다 재가 날아올라 허공에 스며들었다.


“그것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고 더욱 늘어나는 건 정해져 있어. 그런데도 걱정하지 말란 말이야?”


북궁백은 그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착각하시는 게 있습니다.”

“뭐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벌어질 일이 앞당겨진 것에 불과합니다.”

“벌어질 일? 앞당겨져?”


추걸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을 되뇌었다.


“호남 정파들이 저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시간이 더 흘렀다면 호남은 사파 손에 완전히 넘어갔을 겁니다.”

“그걸 네가 어찌 장담하느냐?”

“십 년 사이 호남의 세력 구도가 정파에서 사파로 기울었다고 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지났으면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겠지요.”

“하지만 협약이...”


북궁백이 그의 말을 자르며 냉담한 현실을 알려주었다.


“협약은 동등한 경우에만 지켜질 수 있는 겁니다.”

“...”

“저는 평온한 세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양민부터 저 위에 있는 천자까지. 각자가 처한 상황과 탐욕이 달라 끝없이 분쟁을 이어갔습니다.”

“...”

“누군가 내게 그러더군요. 가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힘을 세상에 내보여야 한다고.”


그 누군가가 남궁세가 인물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주인공은 현 가주인 남궁기 혹은 검성 남궁천 선배이리라.

북궁백이 말을 이었다.


“제가 없었어도 정파든 사파든 전쟁은 일어났을 거고, 제가 있어 조기에 전쟁을 승리로 끝낸 겁니다. 아닙니까?”

“...허어.”


추걸개는 한숨을 쉬는 것 외엔 할 말이 없었다.

개방에서 모은 정보만 들춰봐도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그런데 왜 마음 한 켠이 간질간질한지 모르겠다.

뭔 짓을 해도 빠지지 않는 목 안의 가시처럼 거슬렸다.

갑자기 개방 초대 방주께서 만든 방규가 떠올랐다.


-가장 낮은 곳에서 의로 만인을 구제하고 협으로 중원을 수호한다.


북궁백은 의를 지켰나?

양민을 착취하고 풍기를 문란케 하는 사파를 베었으니 의롭다 할 수 있다.

북궁백은 협을 따랐나?

구명지은을 갚고자 은인의 동생과 함께 불구대천의 원수를 죽였으니 협이라 할 수 있다.

호남에서 그의 행보는 개방의 방규에 어긋남이 없다.

근데 왜 이렇게 거부감이 드는 것일까?


“호남성은 정파의 것이 되었습니다. 오합련의 영역은 정파들이 나눠 가질 것이고 양민들은 부담을 덜겠지요.”

“하지만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너와 황영파, 둘이 상대할 수 있지 않았느냐?”

“남이 나눠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무언가 얻고자 한다면 자신이 피와 땀을 흘려야 하는 법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북궁백에겐 협은 있으나, 의는 없다는 것을.

그 협도 작은 의미의 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번에는 그저 의가 그에게 따라붙었다는 것을 말이다.

복잡한 생각이 든 추걸개는 다시 땅에 드러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능소가 그러더구나. 붕산혈귀가 나타났다고.”

“저를 칭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조만간 네 별호가 되겠지. 형산현에서 호남성으로, 호남성에서 전 중원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무림인에게 있어 별호를 얻는다는 건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무림이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다른 이들에게 이름과 무위를 인정받고 각인시켰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궁백에겐 별 감흥 없는 이야기였다.

추걸개는 그런 북궁백이 답답했다.


“무림 동도들이 널 뭐라 여길 것 같으냐?”

“뭐라고 여기든 상관없습니다.”

“그렇지 않다. 무림에 있어서 별호는 너라는 존재 자체를 의미해. 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피로 물든 귀신이 된 거다. 그 말은 즉···.”

“사파로 여길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정파인에게 혈이니 귀니 하는 불길한 칭호는 붙이지 않으니까.”


북궁백은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이 상황이 성가시기만 했다.

그래서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단언했다.


“정파든 사파든 전 먼저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다. 원치 않은 일을 겪을 때 더 화가 나는 법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모닥불을 중간에 둔 그들의 밝은 면은 서로를 향해 있었으나 어두운 면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반대편에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시쯤 되어 교대하는 형산파 문도들로 인해 정적이 깨어졌다.

그러자 추걸개가 길었던 침묵을 끝냈다.


“부탁 하나만 하자.”

“...”

“만약 갈등을 생긴다면 비무를 먼저 요청하거라. 갈등 대부분은 비무로 해결할 수 있다. 일시적인 봉합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이 무림의 법도다. 무림에 출도했으면 무림인이 되어야 하는 법이다.”


짧은 침묵 후 추걸개가 나직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래야만 너와 내가 적이 되지 않을 게야.”


* * *


오합련이 형산에서 패퇴한 다음 날, 오원평의 명령으로 그동안 방에서 칩거 중이던 오미주는 낮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흐릿한 눈을 깜빡이며 낮잠의 여운을 즐기던 그녀는 불현듯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방도 대부분이 아버지를 따라 나가 조용했던 적련방이 뭔가 소란스러웠다.


“거기 누구 없어? 무슨 일이야?”


오미주가 고함을 지르자 시비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왔다.

평상시 오미주의 성질을 알고 있는 시비가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대, 대공녀님. 저, 적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당주 위동이 들이닥쳤다.


“대공녀. 호남정의맹이 쳐들어왔습니다. 당장 피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들이 왜?”

“그건 나중에 알아도 됩니다. 일단 저를 따라오십시오.”


오미주는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하고 나삼 위에 장포만 걸친 채 위동을 따라나섰다.

적련방을 벗어나는 동안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과 고함,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로 적이 적련방에 쳐들어 온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오미주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무사히 적련방을 벗어나 정신없이 달린 끝에 상담에 진입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중에 오미주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방주님께서 계신 형산으로 갑니다.”

“아버지가 거기에 왜 가셨는데요?”

“형산파를 멸하러 가셨습니다. 지금쯤이면 형산파를 장악했을 겁니다.”


오미주는 그제야 전쟁이 벌어졌다는 걸 알았다.

호남정의맹이 형산파 구원을 포기하고 오합련의 본거지를 기습했다는 사실도 말이다.


‘비열한 새끼들. 정파라는 것들이 뒤통수를 쳐? 아버지만 만나면 이 수치를 천 배, 만 배 갚아주마.’


오미주는 이를 갈며 장포를 여몄다.

땀으로 흠뻑 젖은 나삼 탓에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위동이 못 본 척 척하며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적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오미주는 위동의 재촉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야만 했다.

상강에 도착해 위동이 구해온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 중에 정말로 추적자가 따라붙었다.


“적련방의 대공녀와 내당주가 저기 있다!”


그들이 서둘러 배를 구하려고 할 때만 해도 근처 나룻배를 전부 강으로 띄워 보냈기에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서 다수의 노가 달린 중형선이 등장했을 때, 둘은 상강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헉, 헉. 더는 못 가겠어요.”


상강을 빠져나온 오미주는 엄살을 피우며 주저앉았다.

오원평의 자질을 이어받은 덕에 일류 끝자락에 도달했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고생을 해본 적이 없었던 오미주는 인내심의 한계치가 경지에 비해 매우 낮았다.


‘부하들 괴롭힐 땐 펄펄 날아다니던 년이···.’


위동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도 그녀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히십시오.”


이걸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업히는 오미주.

위동은 기가 막혀 상강에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그녀를 살려 데려가면 부방주도 노려볼 수 있으니까.

힘들다고 늘어지는 거 업어주고, 징징대는 거 달래주고, 배고프다면서 벽곡단 싫다는 거 설득해 먹이고...

밤낮없이 달린 끝에 다음 날 해 뜰 무렵이 돼서야 형산현 인근 산자락에 도착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소식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곧바로 형산파로 가면 안 돼요? 어차피 아버지가 장악했을 건데.”


나무에 기대 늘어진 오미주가 힘들어 죽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그럼 그렇게 해요.”


허락을 받아낸 위동은 산 아래 작은 마을에 내려가자마자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전부가 오합련을 격퇴한 형산파를 칭송하는 목소리로 가득했으니 말이다.


“망했군.”


위동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아부하고 비위 맞추고 피를 묻혀가며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허망하게 날아갔다.

적련방의 내당주로 얼굴도 꽤 알려진 탓에 호남성에서는 살아갈 수도 없다.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갑자기 열불이 치솟았다.


“이 빌어먹을 연놈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며 기진맥진했던 몸에 갑자기 활기가 돌았다.

위동은 나는 듯이 달려 오미주가 숨어 있는 산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요?”

“그게···. 합!”

“헉!”


노심초사하며 위동을 기다리던 오미주는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속절없이 마혈과 아혈을 내주었다.


“흐흐흐.”


위동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끔찍한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니 애비가 죽었다.”

“...!”

“개 같은 놈. 그리 안하무인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거였으면 제대로 하던가. 나는 뭐 어쩌라고 허무하게 뒈져버리는 거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오미주를 향해 위동의 얼굴이 다가갔다.

강제로 입을 맞추고 나삼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네년은 아비의 권세만 믿고 나대는 지독한 인간말종에 끝까지 민폐만 끼치는 년이었지···. 그래도 네년 덕에 목숨은 부지했구나.”


오원평은 딸의 교만한 성품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출타한 사이 칩거를 깰 거라고 반쯤 확신했다.

그래서 위동을 남겨 오미주를 감시하도록 시킨 것이다.

위동은 수밀도 같은 가슴을 움켜쥐며 그 감촉에 얼굴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반반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만, 몸이 이리 좋은지는 몰랐지. 네 몸뚱이가 아까워 기회를 주마.”


위동이 하체를 붙여 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직감한 오미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아랫것이라고 깔보던 위동에게 겁탈당한다는 것이 두렵고 서러워 눈물이 났다.


“앞으로 날 낭군으로 섬겨 함께 도망갈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지. 대답은 조금 있다 듣겠다. 일단 몸도장부터 찍고 나서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위동은 육욕에 몸을 맡겼다.

그 거칠고 잔혹한 과정에서 오미주는 무기력했다.

태풍이 몰아친 상강에 떠 있는 나룻배처럼 힘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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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보타암-1 24.06.16 492 9 13쪽
40 해적-3 24.06.15 550 10 13쪽
39 해적-2 24.06.14 526 11 13쪽
38 해적-1 24.06.13 546 10 12쪽
37 노예의 행방-2 24.06.12 564 9 13쪽
36 노예의 행방-1 24.06.11 561 10 13쪽
35 정파와 사파, 그것이 이유요-3 24.06.10 576 11 13쪽
34 정파와 사파, 그것이 이유요-2 24.06.09 583 9 14쪽
33 정파와 사파, 그것이 이유요-1 24.06.08 607 11 13쪽
32 남창살인사건 -2 24.06.07 609 9 13쪽
31 남창살인사건 -1 24.06.06 612 11 13쪽
30 이별과 만남-5 24.06.05 624 12 14쪽
29 이별과 만남-4 24.06.04 642 14 13쪽
28 이별과 만남-3 24.06.03 669 14 16쪽
27 이별과 만남-2 24.06.02 685 12 14쪽
» 이별과 만남-1 24.06.01 727 14 17쪽
25 형산혈사-3 +1 24.05.31 716 10 15쪽
24 형산혈사-2 24.05.30 668 13 13쪽
23 형산혈사-1 +2 24.05.29 701 11 13쪽
22 형산-4 24.05.28 688 11 14쪽
21 형산-3 +1 24.05.27 714 13 14쪽
20 형산-2 24.05.26 716 11 13쪽
19 형산-1 24.05.25 759 12 15쪽
18 피의 첫걸음 -3 24.05.24 775 12 16쪽
17 피의 첫걸음 -2 24.05.23 774 1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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