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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편한인생

시한부 화화공자의 기묘한 여행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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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편한인생
작품등록일 :
2024.05.26 09:33
최근연재일 :
2024.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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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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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38. 벽라춘(碧羅春)

DUMMY

검을 쥐었던 느낌이 점차 흐려지고 있다.

몸 전체에 넘치던 활력이나 만월이 북돋아 주던 기운도 환상처럼 사라졌다.

손에 잡힐 듯한 허망한 아쉬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입맛을 다시며 그림을 바라봤다.

차가운 얼굴의 여인을 눈에 담고 허전한 한숨을 쉬었다.

먹깨비 자식은 단꿈이라도 꾸는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잠을 자고 있다.

생생한 감흥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다탁에서 벌떡 일어나 구석에 쌓인 족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두께가 대충 내가 집었던 검과 비슷하다.

눈을 감고 월녀검무를 떠올렸다.

다행히 생생히 기억난다.

뒤로 늘어뜨린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검을 휘두르듯 족자를 휘둘렀다.

고양감이나 충만함은 없어도 검첨이 향하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승천하듯 솟아오르며 발을 옮기는 순간.

제기랄, 스텝이 꼬여서인지 볼썽사납게 자빠졌다.

발을 짚던 방위나 나아가야 할 길은 눈에 뻔히 보이는데, 망할 놈의 몸뚱이가 따르지를 못한다.

두어 번 더 시도했어도 마찬가지였다.

족자를 집어던지고 다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탁이 흔들리자 비휴가 빼꼼 눈을 뜨고 내 품을 파고든다.

최신 소프트웨어 장착은 끝난 거 같은데 하드웨어가 골동품이니······.

품을 파고든 먹깨비는 늘어지게 하품하고 고개만 내밀고 있다.

이 자식 이젠 제법 묵직하다.

이젠 옷 앞섬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몸집도 살이 붙었다.

계속 밀려드는 아쉬움에 눈을 감고 월녀검무를 떠올렸다.

그래 당분간은 상상하는 걸로 만족하자.

눈을 감은 채 환상 같은 것에서 봤던 월녀검무를 따라 검을 휘둘렀다.



*



은향의 원주인 예월은 추레한 행색의 까무잡잡한 노인을 대동한 채로 독고세가로 들어섰다.

정문을 지키던 무사의 안내를 받아 접객당에 도착한 예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까무잡잡한 노인은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형형한 눈을 빛내고 있다.

접객당 소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제갈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예를 올린 건 예월이었다.

“맹의 군사를 뵙습니다.”

가볍게 예를 받은 제갈진성은 까무잡잡한 노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입니다. 총령원주.”

까무잡잡한 노인은 고개를 살짝 흔들고 공수했다.

“맹의 정보망이 대단한 것인지 군사의 눈이 매서운 것인지 모르겠구려.”

부드럽게 웃음을 보인 제갈진성이 자리를 청했다.

“앉으시지요.”

총령원주 감태정甘泰政이 자리에 앉자, 예월은 감태정의 뒤에 시립했다.

마주 앉은 제갈진성이 미소를 띠며 물었다.

“복건에 계시다 들었는데, 소주에는 언제 오신 것입니까?”

“나야말로 무한에 있다는 군사가 어이 소주에 있는지가 궁금하외다.”

“설마 하오문의 장로이자 중원의 정보를 꿰고 계신 총령원주께서 모르셨으려고요.”

감태정은 코웃음을 쳤다.

“피차 바쁜 처지끼리 입씨름은 예까지 하십시다. 보자 하신 연유는 소혜와 유하 때문인게요?”

“알고 계시다니 말이 빠르겠군요.”

“데려가는 건 상관없소이다. 허나 누구의 부탁으로 맡게 되었는지는 밝힐 수 없으니 그리 아시오.”

감태정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제갈진성의 여유 있는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걸 묻고자 자릴 청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묻고 싶은 게 뭐요?”

“살수가 움직였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씰룩이는 감태정의 눈썹을 본 제갈진성이 표정을 굳혔다.

감태정은 헛기침하며 손으로 입을 쓸었다.

“내가 비록 하오문의 장로직은 맡고 있긴 해도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하오.”

“안찰사를 죽이려 하셨습니까?”

감태정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군사!”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안찰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함도 아니고요.”

“난 모르는 일이 외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누구의 청에 의한 것인지는 알고 계시지요?”

감태정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맹이 황실과 그리 가까운지는 내 몰랐소이다.”

“안찰사 역시 멀지만 황가의 핏줄입니다. 황실에서는 이 일을 무거이 여기고 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제갈진성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살수에 대한 추살령이 내려질 겁니다. 맹이 아닌 황실에서.”

“그것이 무슨 소리오! 황실에서 살수에게 추살령을 내리다니! 실행하지도 않은 살행의 책임을······.”

눈살을 구긴 감태정이 노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군사 답지 않군요. 이런 협박을 하다니.”

제갈진성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협박이라······, 이것 보시오, 감 총령. 내가 이 자리에 어떤 직책으로 앉아 있는 것 같소?”

반공대로 바뀐 제갈진성의 말투에 감태정의 표정도 딱딱해졌다.

제갈진성은 싸늘하게 웃으며 품에서 어사패를 꺼냈다.

“······!”

“다시 묻겠소. 하오문은 어찌하여 소주에 살수를 파견한 것이오. 또한 안찰사 증안표의 죽음에 하오문이 관여하지 않았음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지 말해보시오.”

한숨을 내쉰 감태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예를 취하려 했다.

손을 내저은 제갈진성이 서늘한 눈으로 말했다.

“예나 받자고 꺼낸 어사패가 아니오. 그러니 답해보시오.”

감태정은 들었던 손을 내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군사의 뜻은 충분히 알았으니 원하는 걸 말씀하시오.”

제갈진성은 탁자 한쪽에 둔 두 개의 서첩을 감태정 앞에 내려놓았다.

“안찰사 증안표의 죽음을 조사한 문건이오. 감 총령의 답에 따라 어느 것이 중서시랑에게 전해 질지가 결정될 것이고.”

감태정은 서찰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군사.”

“······.”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소이까.”

제갈진성은 두 개의 서찰 중 하나를 뒤로 뺐다.

“읽어 보시고 가르침이 있다면 주시지요.”

한숨을 내쉰 감태정은 남은 서찰을 집어 들었다.

서서히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감태정의 미간이 좁혀졌다.

“신비 세력?”

“안찰사 증안표와 절도사 윤지평 둘 다 주요 서신과 재물을 도난당했다고 하더군요. 신투라 해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감쪽같이.”

“그건 절도사 윤지평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외다.”

“헛소문입니다. 절도사 윤지평 역시 황실의 금원보를 도난당하였으니까요. 윤지평이 아무리 간담이 크다 해도 대놓고 황실의 재물에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것도 태자 책봉을 앞둔 시점에서 말이죠.”

감태정은 제갈진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건 그렇다 칩시다. 그렇다면 안찰사의 사인에서 독고세가의 삼공자 이야기는 왜 빠진 것이오?”

“총령은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죽었다 깨어나 얼마 되지 않은 삼공자의 피가 독혈이라는 것이?”

“그야 혈교의 혈옥수에 당해······. 설마 신비 세력이라는 것이 혈교를 지칭하는 말이오?”

“아직 모릅니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그러니 그 부분도 하오문에서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

“소문을 내 달라?”

“잘못된 소문은 바로잡아야죠.”

감태정은 코웃음을 치며 서찰을 내려놓았다.

“독고세가의 삼공자가 운이 좋군. 이리되면 절도사도 더는 뒤를 캐지 못할 테니.”

“절도사가 삼공자의 뒤를요?”

“이유는 나도 모르오. 소주 지부장이 그 사달이 있던 날 독고세가의 삼공자를 배에 태운 모양인데 안찰사의 집 주변을 돌아달라 했답디다. 우연찮게 물품을 도난당한 딱 그 시점에 말이오.”

“그 이유만으로 뒤를 캔단 말입니까?”

감태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절도사의 집이 털릴 때도 그 주변을 배회했다는 말이 있소. 허나 이 소문이 돌게 되면 다 헛소리가 되지 않겠소. 혈교와 독고세가의 관계를 중원 천지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감태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군사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혹여 삼공자를 이 일에서 빼기 위함이오?”

“총령, 만약에 삼공자의 행적이 보고에 포함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거로 예상하십니까?”

잠시 고민하던 감태정이 고개를 흔들었다.

“소주가 뒤집히겠구려.”

“그리된다면 가장 고통받는 곳이 어디라 여겨 지십니까,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려 드는 황실이 누굴 가장 먼저 찾을까요?”

감태정은 탄식을 내뱉었다.

“우리 하오문이겠지. 후, 제갈 군사와는 한자리에서 숨도 쉬지 말라더니 왜 그런 말이 도는지 알겠소이다.”

“그런 말도 있나요?”

“공연히 말 몇 마디 보태려다 공으로 소문을 내야 하는 데다, 빚까지 진 모양새가 되지 않았소.”

“빚을 진 건 맞으실 겁니다.”

감태정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말씀 끝났으면 이만 가보리다.”

“총령. 빚은 제가 아닌 독고세가 삼공자에게 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것도 알고 있소. 소혜가 그대로 안찰사에게 끌려갔으면 우리로서도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을 테니.”

“그러니 하려던 일을 계속해 주십시오.”

흠칫 놀란 감태정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무슨 소리를······.”

“어차피 황실의 눈을 돌릴 방책도 없이 안찰사 일을 도모하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대로 진행하세요. 절도사를 끌어내리려 준비하던 일.”

감태정은 혀를 내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간 불알까지 털리겠군. 난 이만 가겠소.”

“믿겠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감태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몸을 돌리던 감태정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난 어떻게든 삼공자가 안찰사의 일에 관여했다고 의심했었소. 일이 공교로워도 너무 공교로웠거든. 삼공자가 여기 있는 은향의 행수에게 안찰사의 추문에 대해 알아봐 달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디다. 안찰사라는 추물을 어디까지 작살낼지 결정하는데 쓸 거라고.”

미간을 찌푸리는 제갈진성을 보며 감태정이 말을 이어갔다.

“그 말을 남긴 그날, 안찰사가 황천길에 올랐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의심을 지우기 힘들더이다.”

제갈진성에게 포권을 취한 감태정이 피식 웃었다.

“납득이 안 되지만 이상하게 난 이 일이 모두 삼공자가 꾸민 일이 아닐까 싶소이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태정도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향 밖으로 발도 내딛지 않고 지낸 화화공자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 그냥 객기에 내뱉은 허황된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고민하는 제갈진성을 보며 감태정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난 이만 가겠소이다. 머리 좋은 군사가 한 번 가능성을 따져 보시오. 난 포기했으니.”



*



소혜와 유하가 찾아온 건 사시巳時 말경이었다.

제갈소소도 부록처럼 함께 딸려 왔다.

무슨 일인지 소혜와 유하의 표정이 별로다.

새 삶의 시작에 대한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선 얼굴들이다.

“출발 준비는 다 된 거야?”

소혜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날 향했다.

“공자님······, 정말······.”

“소혜야,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어. 느낌만으로 충분한 것들 말이야. 그러니 애쓰지 마.”

입술을 깨문 소혜가 대례를 올렸다.

마주 서서 예를 받고 미소 지었다.

“가서 잘 지내. 여기서처럼 덜렁거리지 말고.”

소혜는 붉게 물든 눈을 곱게 휘었다.

“네, 공자님.”

소혜는 품에서 술이 달린 작은 목조각을 꺼냈다.

“이게 뭐야?”

“아버님께서 제게 남기신 거라 들었어요. 제가 가진 것이 이것뿐이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귀한 거라면 받을 수 없어.”

“공자님, 세상에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을까요?”

목조각을 두 손으로 내게 내민 소혜의 눈에는 물기가 가득하다.

나중에 돌려주더라도 받아야 할 거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들려온 건 유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공자님께 차를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차?”

유하는 품에서 작은 대통을 꺼냈다.

“벽라춘입니다.”

차 한잔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작은 다실에 함께 하기 어려워 후원 처소에 딸린 널찍한 방으로 자릴 옮겼다.

큼직한 탁자에 둘러앉자, 유하는 준비한 화로를 뒤적여 불씨를 키웠다.

차를 준비하는 유하의 몸짓에는 기품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예가 묻어있다.

물이 데워지고 찻잎을 우려내는 찻물에서 차향이 피어올랐다.

향긋한 향이 방안을 맴돌 때 다소곳하게 자리에 앉은 유하가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이 차가 벽라춘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를 아시나요?”

“차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

“이야기를 좋아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유하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제갈소소와 소혜도 귀를 기울였다.

“태호太湖 동정산洞庭山 서쪽 지역에 벽라라는 여인이 살았습니다. 그 여인은 매우 아리따웠을 뿐만 아니라 현명했고, 춤과 노래에도 능했지요. 그런데 매년 봄이면 태호에 교룡이 나타나 벽라를 자신에게 시집 보내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에 계속 응하지 않자, 호수에 풍랑을 일으키고 어선을 뒤집으며 행패까지 부렸다고 해요.”

차향을 마음에 담듯 향을 들이쉰 유하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아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곡식 창고를 부수고 사람까지 해쳤지요. 결국 동네 사람들이 벽라에게 등을 돌리게 되고, 이를 틈 타 교룡은 벽라를 납치했어요. 그 소식을 들은 동쪽에 사는 아상阿詳이라는 청년이 교룡을 잡기 위해 나섰습니다. 아상은 건장하며 무예에도 능한 어부였거든요.”

말을 잠시 멈추며 유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실은 아상은 벽라를 몰래 연모하던 청년이었어요. 그녀의 노래를 듣는 걸 좋아했었지요. 아상은 태호에 뛰어들어 교룡과 7일 밤낮을 싸웠습니다. 마침내 교룡을 죽이고 벽라를 구해낼 수 있었지만 몸에 큰 상처를 입었죠. 교룡의 독에 중독되어 하루하루 병세가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온갖 약을 구해 보살폈어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어요. 죽음을 예감한 아상은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 벽라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유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그 얘길 전해 들은 벽라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아상을 제 집으로 옮기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기 시작했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차도는 없었고, 고심하던 벽라는 약초를 구하기 위해 각처를 돌아다녔죠. 그러던 어느 날 벽라는 아상과 용이 싸웠다는 태호변 언덕에서 독특한 차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어요. 그 차나무를 집으로 옮겨와 뜰에 심었답니다. 하지만 때는 겨울이었고, 몹시 추웠죠. 벽라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차나무에 돋아나는 작은 싹을 돌봤습니다. 지극 정성을 담아 입김을 불고 입술로 찻잎을 따뜻하게 데워가면서요. 하지만 찻잎이 자라는 건 더디기만 했어요. 벽라는 실망하지 않고 더욱 정성을 들여 차나무를 돌봤어요. 어느덧 몇 달이 지났고, 아상의 병세는 더욱 심각해졌죠. 그 시기의 아상은 물만 겨우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병세가 깊어졌습니다. 그제야 벽라의 정성으로 자라난 찻잎은 차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자랐어요. 벽라는 찻잎을 따서 막 우려낸 차를 아상에게 먹였죠.”

잠시 말을 멈춘 유하는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벽라가 내린 차를 마신 아상은 은은한 차향에 정신이 차리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차나무를 키우는 데 온 힘을 쏟은 벽라는 큰 병을 얻었고요. 시름시름 앓던 벽라는 자신이 죽으면 차나무가 발견된 곳에 묻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어요. 그 뒤로 몇 년 뒤, 벽라가 묻힌 언덕 주변은 온통 차나무가 자라나 무성한 숲을 이루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차가 벽라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지요.”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알았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자리에서 유하가 벽라춘을 내려 내게 준 의미를.

유하는 벽라의 심정으로 차를 내리고 내게 대접한 모양이다.

차 한잔에 담긴 의미가 작지 않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전해졌다.

나는 천천히 잔을 비우고 한 잔을 더 청했다.

“좋네, 차도 이야기도. 한 잔 더 부탁해도 될까?”

유하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오랜만에 누군가의 마음을 받은 느낌이다.

그것도 차향보다 짙은 사람의 향기가 물씬한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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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40. 습격(襲擊)(1) NEW +1 21시간 전 534 35 15쪽
39 39. 비익연리(比翼連理) +4 24.06.28 751 54 14쪽
» 38. 벽라춘(碧羅春) +3 24.06.27 864 50 16쪽
37 37. 세가의 칠현금(七絃琴)(2) +8 24.06.26 945 60 14쪽
36 36. 세가의 칠현금(七絃琴)(1) +2 24.06.25 1,051 49 16쪽
35 35. 대가代價(8) +5 24.06.24 1,120 52 13쪽
34 34. 대가代價(7) +5 24.06.23 1,128 55 13쪽
33 33. 대가代價(6) +7 24.06.22 1,164 62 13쪽
32 32. 대가代價(5) +2 24.06.21 1,199 53 14쪽
31 31. 대가代價(4) +4 24.06.20 1,276 58 14쪽
30 30. 대가代價(3) +1 24.06.19 1,293 59 17쪽
29 29. 대가代價(2) +1 24.06.18 1,271 57 19쪽
28 28. 대가代價(1) +2 24.06.17 1,319 57 15쪽
27 27. 무릇 사냥이라 함은(5) +2 24.06.16 1,307 58 16쪽
26 26. 무릇 사냥이라 함은(4) +3 24.06.15 1,314 54 17쪽
25 25. 무릇 사냥이라 함은(3) +3 24.06.14 1,334 59 13쪽
24 24. 무릇 사냥이라 함은(2) +2 24.06.13 1,332 53 14쪽
23 23. 무릇 사냥이라 함은(1) +4 24.06.12 1,403 55 14쪽
22 22. 작당作黨(2) +2 24.06.11 1,386 54 14쪽
21 21. 작당作黨(1) +2 24.06.10 1,470 63 17쪽
20 20. 검지(劍池)의 담로검((湛盧劍) +1 24.06.09 1,602 68 18쪽
19 19. 혼밥의 단초(端初) +2 24.06.08 1,558 68 14쪽
18 18. 신투(神偸) 비휴(豼貅) +2 24.06.07 1,610 80 13쪽
17 17. 무릇 내기라 함은(2) +2 24.06.06 1,604 68 14쪽
16 16. 무릇 내기라 함은(1) +2 24.06.05 1,637 66 15쪽
15 15. 천록(天禄)과 벽사(僻邪) +1 24.06.04 1,623 72 12쪽
14 14. 초월시공적사념(超越時空的思念) +5 24.06.03 1,650 80 16쪽
13 13. 현천접무(玄天蝶舞) +5 24.06.02 1,754 75 18쪽
12 12. 비휴(貔貅) +1 24.06.01 1,829 64 16쪽
11 11. 현천구검(玄天九劍) +3 24.05.31 1,894 75 15쪽
10 10. 세가의 가법(家法) +2 24.05.30 1,934 71 14쪽
9 9. 절단신공(切斷神功)(2) +7 24.05.29 1,946 81 14쪽
8 8. 절단신공(切斷神功)(1) +1 24.05.29 2,028 78 15쪽
7 7. 화벽주(和璧珠) +1 24.05.28 2,159 81 15쪽
6 6.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혼담(婚談) +3 24.05.28 2,262 82 14쪽
5 5. 그만해! +3 24.05.27 2,353 86 14쪽
4 4. 세가(世家)의 빈객(賓客)들 +3 24.05.27 2,335 93 12쪽
3 3. 기원(妓院)의 화화공자(花花公子) +3 24.05.26 2,462 93 13쪽
2 2.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2) +5 24.05.26 2,605 100 13쪽
1 1.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1) +8 24.05.26 3,339 9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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