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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븐 님의 서재입니다.

천재 피아니스트의 영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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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븐
작품등록일 :
2023.05.10 13:41
최근연재일 :
2023.06.25 23:55
연재수 :
3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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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8
추천수 :
372
글자수 :
205,830

작성
23.05.25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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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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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싸라기눈

DUMMY

“우승하면 비행기티켓 보내줄 테니까, 꼭 보러와야 해?”

“어어, 그래.”


리나가 노헌과 했던 약속이었다.


‘분명 온다고 했으면서···.’


우승한 당일, 그녀는 잔뜩 기대하며 노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령 부모님의 반대로 못 온다 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줄 거라 믿고.

하지만.


“뭔 우승?”


그는 약속은커녕, 그녀의 콩쿨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진 괜찮았다.

사람이란 망각의 동물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었다.


“미안한데, 이거 환불해라.”


단호한 그의 목소리.

그 순간, 서러움에 목이 메어왔다.


‘내가 어떤 기분으로 보냈는데···.’


물론 노헌의 부모님이 허락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리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물어보기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최소한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단칼에 거절해버리는 그의 태도에 그녀는 너무나도 서러웠다. 무심코 참아왔던 울음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정도.


“어? 이리나, 너 설마 울어?”


곧바로 아차 싶어, 그치려 했지만, 한 번 쏟아진 눈물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미, 미안해. 그렇게까지 기대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노헌의 당황한 목소리.

한평생, 그의 앞에서 울었던 적이 없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아, 울면 안 돼.’


그녀가 온 힘을 발휘해 감정을 억누르기 성공했을 때.


“아, 알았어! 환불하지 마! 나 독일 갈게! 네 연주 보러!”


들려온 희소식.

곤란하게 해버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쁜 마음이 먼저 앞섰다.


“진짜지?!”


자신이 말해놓고도 감정이 이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놀란 그녀였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기회.


“나, 이거 녹음도 해놨어. 이제 발 뺄 생각 마.”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을 연기라고 속이기 위해, 리나는 농담을 섞으며 평소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니··· 야, 다 연기였어?”

“설마, 내가 울었겠어?”


그리고 간신히 속아 넘어간 노헌.


“하, 진짜 깜짝 놀랐네! 너 피아니스트 왜 하냐? 차라리 배우를 하지.”

“·····뭐래, 너니까 통한 거지.”


연기라고 믿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노헌이가 둔해서 다행이야.’


예전부터 느꼈지만, 노헌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가끔은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눈치가 없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도 일단, 우리 부모님이 허락 안 해주실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


자신이 실망할 것을 생각해 미리 이야기해주는 그의 배려에 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노헌은 여전히 소중한 친구였다.


“그럼 여쭤보고 올 게···.”


그 말을 끝으로 노헌은 장시간 대답이 없었다.

그동안 그녀는 어렸을 적 노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엄마, 아빠는 나보다 나은이가 더 소중한가 봐.”

“왜?”

“맨날 나은이 말만 들어주고, 내 말은 안 들어줘···.”


초등학교 시절, 울면서 털어놓았던 노헌.

리나는 항상 곁에서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이 이야기는 몇 번 더 그의 입에서 나왔고, 중학교에 들어간 순간부턴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는 리나가 그에게 물었다.


“노헌아, 요즘은 그··· 부모님이 네 말 잘 들어주셔?”


만약 그랬다면 정말 기쁜 일이었을 터였지만, 노헌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아니, 똑같아. 그래서 앞으로는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려고.”


어차피 들어주지도 않는데···. 하고 덧붙이는 그의 어깨는 모든 걸 체념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리나는 그의 친구로서 화가 났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가족이 아니라 친구, 해결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내가 진짜 가족이었다면 항상 들어줬을 텐데···.’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돈이 문제라면 내가 비행기티켓도 사줬으니까, 이번엔 들어주셔도 되는 거 아니야?!’


노헌의 부모님이 군말 없이 허락하셨으면 하는 바람에 그녀는 지금껏 콩쿨에서 모은 장학금을 턴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부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친구의 말을 들어달라고, 그녀는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그녀의 기도를 들은 것처럼.



“리, 리나야! 나 허락받았어! 독일 갈 수 있어―!”



기적이 일어났다.



♪♪♪



“드디어, 여권이 나왔네요.”

【축하해.】


겨울방학을 하루 앞둔 목요일.

노헌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권을 들고 시청을 나섰다.


독일에 가는 것이 확정되고 벌써 몇 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허락해주실 줄이야···.’


처음으로 노헌의 말에 귀 기울여 주셨다는 것 자체가 노헌은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것도 아니고, 혼자 독일에 가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용돈까지 주시다니···.’


노헌은 허락받은 당시를 떠올렸다.



“그래, 다녀오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노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맞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부모님의 시선 끝엔 오직 노헌뿐이었다.


“그리고, 아빠가 용돈 두둑이 챙겨줄 테니, 리나 만나면 비행깃값 돌려주고 오거라. 기왕 간 겸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오고.”

“가··· 감사합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모님이 방으로 들어가시고, 거실에 홀로 남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마치 이 순간이 꿈인 것 같았다.


‘아! 어서 리나에게 말해줘야지?!’


눈가를 대충 소매로 비비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려던 순간.


“뭐, 뭘 봐! 이나은!”


방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던 동생, 나은과 눈이 마주쳤다.


“솔직하게 말하면 들어주실 거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맞지?”


씨익 웃더니, 이내 자신의 방문을 닫는 여동생.

조금 얄밉긴 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리, 리나야! 나 허락받았어! 독일 갈 수 있어―!”


리나를 만나러 갈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노헌이 회상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

귓가에 익숙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쇼팽의 「흑건」?】


영화에서 들었던 유명한 클래식.

아니, 이젠 콩쿨에서 더 많이 듣게 된 곡이었다.


소리가 흘러나오는 방향은 중앙 광장.

노헌이 그곳을 향해 걸어가자, 광장 가운데에 연주 중인 피아노를 기준으로 사람들이 동그랗게 퍼져 있었다.


“에이, 설마?”


어딘가 드는 위화감.

중앙으로 도착해, 까치발을 들고 사람 틈 사이를 엿보았더니.


“역시나.”


피아노에 앉아있던 것은 재은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쇼팽의 빠른 선율.


‘왜 얘는 맨날 「흑건」만 치는 거지?’


하고 의문이 드는 순간, 노헌의 머릿속엔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현재 이 장소는 사람들이 자주 몰리는 문화의 공간.

모두가 즐기는 장소였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피아노를 치는데, 전혀 모르는 클래식이 흘러나온다면 재미가 있을까? 아니, 대부분이 사람들이 지루해할 것이다.


‘설마, 그런 이유로 항상 「흑건」만 치는 거였어?’


그녀의 배려심에 감동하고 있자니, 어느새 끝난 연주.


“와, 진짜 잘 친다!”

“나도 피아노 배울까?”

“저렇게 치려면 몇 년 걸릴걸.”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재은은 멋쩍은 듯 웃고 있었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난.

노헌은 곧바로 사람들 틈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 이노헌?”


그가 도착한 곳은 피아노 앞.

의자에 앉아있는 이재은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피아노 한 번만 쳐도 돼?”


노헌의 말을 듣고 깔깔 웃던 그녀는 이내 그의 장난에 어울려주기로 한 듯 다음 대사를 내뱉었다.


“뭐? 지금 내가··· 하, 아니다. 그래 쳐보든가.”


바로 재은과 처음으로 연관된 그 날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때 피아노를 쳤던 건 현묵이었지만.


‘지금은 나야.’


노헌은 재은이 비켜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스타카토로 가볍게 시작하는 선율.

그리고 동시에.


“어? 이거!”

“많이 들어봤는데?”

“호두까기 인형 아니야?”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행진곡」이 광장에 울려 퍼지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심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내일 눈이 올까?”


내일 하얀 눈이 펑펑 내리게 해주세요.

산타 할아버지 저는 인형이 갖고 싶어요.

설마, 아빠가 산타 할아버지는 아니겠지?


각자 설렘과 기대를 품고 잠드는 그 순간.


벽난로 앞에선 축제가 열린다.


북을 치는 장난감 병정들.

춤을 추는 인형들.

별사탕을 뿌리는 요정들.


그것은 한 겨울밤의 꿈.

타닥타닥 벽난로의 불씨가 튀기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보낸다.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된 빨간 양말에 매달리기도 하고, 노릇노릇한 칠면조 구이를 베어 먹기도 한다.


모두가 웃고 떠들며 밤을 지내지만, 축제가 끝나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벽난로의 불을 끄는 것.

마지막 손님, 산타클로스를 위해서였다.


나이 든 그를 도와 양말에 사탕을 채우고, 자는 아이들 머리맡에 선물을 놓는다.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 허허허.”


별이 반짝이는 밤, 썰매를 타고 떠나는 그의 배웅이 끝나고 나서야 모두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내일 눈이 오길 빌며.

모두가 기뻐하길 빌며.

내년에도 울지 않기를 빌며.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는 끝이 난다.



노헌이 연주를 끝마쳤을 때, 광장에는 여전히 크리스마스이브의 여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니, 왜 분위기는 신나는데 감동적이지?”

“그래, 산타는 있었어!”

“행복했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각자 동심을 회상하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들.

그들을 뒤로하고 노헌은 재은과 함께 광장을 떠났다.


한동안 말없이 걷는 둘.

먼저 입을 연 건 재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호두까기 인형이야?”

“네가 「흑건」친 거랑 똑같은 이유야.”


연주를 듣는 사람들이 조금 더 즐겨주길 원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자 노헌을 빤히 쳐다보는 재은.


“아니, 그 며칠 전이 크리스마스기도 했고 그래서···.”


어쩐지 민망해진 노헌은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풋! 뭐라는 거야.”


그런 노헌이 뭐가 웃기는지, 깔깔대는 그녀.

그래도 짜증만 내던 예전보단 그 모습이 나았다.


“그러고 보니, 내일 천예중 연말 연주회 하는데, 같이 갈래?”


그 순간 떠오르는 준서의 초대장.

재은 또한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말해본 것이었다.


“너 그거 정하린이나 김준서한테 받은 거 아니야?”


노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거절하는 그녀.


“그럼 난 됐어, 어디까지나 초대받은 건 너 혼자고, 나는 천예중 애들이랑 그닥 사이가 별로거든.”

“과연 네가 사이 나쁜 게 천예중 애들뿐일까?”

“뭐?”


그렇게 투덕거리며 도착한 교차로.

노헌은 그녀와 헤어져 홀로 걷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 눈 오네?”


시야에 들어온 하얀 싸라기눈.

그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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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탑의 정상 +2 23.06.24 64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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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밴드부 탈퇴? +3 23.06.18 78 8 11쪽
34 벚꽃이 흩날리던 밤 +3 23.06.16 88 8 11쪽
33 데이트 신청 +3 23.06.15 86 9 11쪽
32 쇼팽 콩쿨 +2 23.06.13 97 7 11쪽
31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3 23.06.11 99 7 11쪽
30 나은과 나비 (2) +2 23.06.09 88 9 12쪽
29 나은과 나비 (1) +3 23.06.07 88 10 12쪽
28 재회 +2 23.06.06 98 7 12쪽
27 All in +2 23.06.05 103 8 12쪽
26 엇갈림 +2 23.06.04 117 8 12쪽
25 졸업식 +2 23.06.03 110 8 11쪽
24 김준서의 목적 +2 23.06.02 119 9 12쪽
23 피아니스트의 대답 +2 23.06.01 122 11 11쪽
22 소년의 답장 +2 23.05.31 134 10 11쪽
21 걱정이 너무 많아 +2 23.05.30 136 11 12쪽
20 독일에서의 만남 +2 23.05.29 150 9 12쪽
19 그거 거짓말이지? +2 23.05.28 154 11 11쪽
18 리나의 선생님 +2 23.05.27 147 12 12쪽
17 랩소디 인 블루 +2 23.05.26 172 10 12쪽
» 싸라기눈 +2 23.05.25 173 9 11쪽
15 기적 +2 23.05.24 186 11 12쪽
14 두 번의 사과 +2 23.05.23 184 10 12쪽
13 그래도 나는 +2 23.05.22 193 11 12쪽
12 이미 늦었어 +2 23.05.21 205 11 11쪽
11 여정의 끝 +3 23.05.20 223 13 11쪽
10 천재와 범재 +2 23.05.19 217 1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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