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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삼일생 님의 서재입니다.

왕씨세가 초대가주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구삼일생
작품등록일 :
2022.05.25 17:28
최근연재일 :
2022.07.08 11:00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32,856
추천수 :
731
글자수 :
240,503

작성
22.05.30 13:28
조회
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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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글자
11쪽

011 - 가출

DUMMY

“······.”

“······.”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볼 뿐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 척영은 아직도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어안이 벙벙했다.

왕운은 왕운대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괜히 위로 비슷한 거라도 했다가 척영의 자존심이 상할까 싶어서였다.

척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졌어.”

“그래.”


왕운이 쥐고 있던 척영의 칼날을 손에서 놓고 척영의 얼굴을 향해 뻗고 있던 오른손을 거두었다.

척영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후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놀랍네. 봐주고 있던 쪽이 내가 아니라 너였다니.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숨긴 거야?”

“오해하지 마. 이 정도 경지가 된 거는 지극히 최근이니까.”


왕운이 척영에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척영의 다리를 바라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다리는 괜찮아?”

“괜찮아. 며칠 지나면 다시 쌩쌩해질 거야.”

“미안해. 누나가 너무 빠르다 보니 발을 묶는다는 게 그만 힘 조절을 못 했네.”

“어쭈, 벌써 하수 취급이야?”

“그게 아니라······”

“농담이야.”


척영이 물었다.


“맨손으로 검을 쳐내는 것도 놀라운 데, 그 붉은색 기운은 뭐야?”

“일전에 스님 한 분께서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무르다 가셨는데······ 그분이 떠나기 전에 가르쳐 주셨어. 부동명왕(不動明王)이라고 알아, 누나?”

“처음 듣는데.”

“절에 가면 그 사람 그림 볼 수 있다던데. 화염 속에서 무서운 표정 짓고 있는 분이라던데.”

“아······ 나 절에서 본 거 같다.”

“그분 받드는 불교 종파의 무공이래나 뭐래나······ 그래서 그 그림 속 화염처럼 이렇게 화기(火氣)를 다룰 수 있는 건가 봐.”

“이렇게 훌륭한 무공을 배우는 줄도 모르고 할아버지는 계속 밖에서 헛고생만 하고 계셨네.”

“미안, 내가 누나 좀 놀래주려다 그 생각을 못 했다. 진작 할아버지께라도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됐어, 언젠가는 들어오시겠지. 어디서 다치실 분도 아니고.”


척영이 갑자기 고개를 확 돌리며 왕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무슨 일 있지? 이 누나한테 속 시원히 얘기해봐.”

“없다니까.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이상해. 평소의 너 같았으면 패배한 나를 있는 힘껏 비웃어 줬을 텐데 말이야.”

“이제 그런 유치한 짓 할 나이는 지났잖아?”

“뭐래, 이 꼬맹이가.”


이젠 꼬맹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이젠 자신이 상대도 안 되는 수준이 되어버렸으니.

사실, 어린 시절 척영은 자신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졸졸 쫓아와서 구경하던 왕운에게 늘 미안해했었다.


- 할아버지! 왜 운이는 검을 배우면 안 된다는 건가요?

- 그럴만한 사정이 있단다.

- 할아버지가 못 가르치시겠다면 제가 가르칠게요. 제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운이가 어떤 눈빛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는지 아시긴 하세요?

- 절대로 안 된다! 나중에 모든 것을 다 말해주마. 너도 운이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왕운이 친손자가 아니라고 차별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척영이 아는 할아버지 유신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신이 왕운을 가르칠 사람을 찾는 것을 기다렸었다. 오히려 당사자인 왕운보다도 더 애타게 기다렸다.

그랬는데 어느새 자신이 어쩌지도 못하는 고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 스스로.

척영은 그런 왕운이 대견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왕운은 척영이 고마웠다. 그동안 척영에게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 같으면 자기를 우습게 보고 가지고 놀았다고 여기고 엄청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척영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강해진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자신의 비밀을 말해주지 못하고 숨겨야 하는 것을.

왕운은 언젠가 어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께서 모든 것을 얘기해준다면 그때는 자신이 누나에게 먼저 털어놓겠다고 다짐했다.

척영은 왕운에게 친누나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마음을 다잡은 왕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잘 지내고 있어, 누나.”

“뭐야, 너 어디 가?”

“뭔 소리야. 내가 갈 데가 어딨다고.”

“근데 왜 한동안 못 볼 사람처럼 말해? 너 오늘 정말 이상해.”

“그냥 누나의 착각이야. 수련이나 부지런히 하고 있으셔. 나한테 이대로 진 상태로 끝낼 거야?”

“벌써 건방 떠는 거야? 기다려. 다음번에는 네 몸에 내 칼자국 하나 반드시 만들어내고 말 테니까.”

“꿈도 야무지지. 암튼 잘 있어, 누나.”


그렇게 척영과 인사를 한 왕운은 산에서 내려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짐을 싸더니 갑자기 지필묵을 꺼내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


다음날, 왕운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침 식사 때 왕운이 나오지 않아 서연이 왕운의 방으로 가봤더니 서찰 하나만 남겨져 있을 뿐 왕운이 보이지 않던 것이다.

남겨진 서찰에는 1년 정도 홀로 수련을 하고 돌아오겠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 간단히 적혀있었다.

서연은 갑자기 무슨 일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를 않아서 급히 하엽을 찾아서 서찰을 보여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서찰을 본 하엽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 도련님, 결국······.”

“하 총관님. 뭐 짚이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아무래도 용봉지회에 참가하러 떠나신 거 같습니다.”

“예!?”


충격을 받은 서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엽은 어제 왕운과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제가 도련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어디로 가실지는 대충 예상이 가니까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안 됩니다, 부인.”


따라가겠다는 서연의 말에 하엽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곳에는 아직 부인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 총관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저는 그나마 혼자라도 몸을 피할 수는 있지요. 하지만 부인께 그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운이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마음 편하게 기다릴 수는 없어요.”


갑자기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서연과 하엽이 깜짝 놀라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유신이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유신의 뒤에는 처음 보는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왕운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보였다.

서연은 유신을 만나니 감정이 복받쳐 올랐는지 울음을 터뜨리고 말을 하지 못했고, 하엽이 유신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모든 얘기를 들은 유신이 서연에게 말했다.


“서연이는 여기에 남아있거라. 내가 엽이와 다녀오마.”

“어르신, 하지만······”

“내 말대로 해. 엽이 말이 옳아. 너를 알아보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다.”

“어르신 말대로 하시지요, 부인.”


순간 정신없는 와중에도 유신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하엽이 유신에게 물었다.


“어르신, 그런데 손님이랑 같이 오신 모양입니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인사하거라. 저 노인네는 내 오랜 벗이다. 운이 사부로 삼을 예정이었지만······.”

“누가 누구보고 노인네라는 게야!”


유신의 소개에 노인이 발끈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엽과 서연이 황급히 예를 차리며 인사를 했다.


“경황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어르신. 하엽이라고 합니다.”

“유서연이라고 합니다. 모처럼 찾아오셨는데 집에 소란이 일어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닐세. 자네들의 얘기는 많이 들었지. 유대웅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네. 저 늙은이의 친구일세.”

“누가 늙은이야?”


대웅은 유신의 말을 무시하고 옆에 있는 아이를 소개했다.


“내 손자 유사걸이네. 올해 나이가 열다섯이 되었지. 사걸아, 인사드리거라.”

“안녕하세요.”

“어서 오렴. 우리 운이와 나이가 똑같구나.”


사걸이 인사하자 서연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유대웅은 조선을 건국했던 이성계의 수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려 제일의 신궁으로 불렸던 이성계에게 궁술을 배웠다. 이성계가 전장을 누빌 때부터 따라다니며 명성을 날리자 사람들은 이성계의 뒤를 이을 신궁이 될 것이라고 대웅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의 충신이었던 그는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자 이성계의 곁을 떠났다.

그 후 조용히 초야에 은거하여 가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던 중에 남부지방에 왜구가 기승을 부린단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가 직접 궁술을 가르친 손자 사걸과 함께 길을 떠났다.

유신이 왕운의 스승을 부탁하려고 그를 찾았을 때가 하필 이 시기였다. 그러다 유신도 그에게 합류하여 왜구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다가 이렇게 늦게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서로 간의 인사가 마무리되자 유신이 말했다.


“유 노인네. 자네도 보다시피 자네에게 부탁하려던 아이가 집을 나간 모양일세. 내가 다녀오는 사이 이곳에서 쉬고 있게나. 어디 싸댕기지 말고 제발 여기 붙어있어!”

“알았어, 척 늙은이. 안 그래도 한동안은 좀 쉬려던 참이야.”


유신이 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연아. 저 노인네가 겉보기엔 저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니 어려운 일이 있거든 저 노인네에게 부탁하도록 해라. 가끔 좋은 술이나 좀 챙겨주면 될 거다.”

“네, 어르신.”

“엽이 자네가 짐작 가는 곳이 있다고 했지. 어서 출발하세. 운이가 어제 나간 듯하니 서두르면 금방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게야.”


그런데 세 사람의 대화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저도 가겠어요.”


놀란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말소리가 들린 곳에는 아까부터 들어와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척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척영은 어제 왕운과 헤어질 때 왕운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었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아침이 되자마자 달려온 것이었다.


“영아!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막으셔도 소용없어요, 할아버지.”


척영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이제 스물하나에요. 저도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 나이가 되었어요. 제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에요.”

“······.”


척영이 서연을 바라보더니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제 운이가 찾아왔었어요.”


척영은 어제 왕운과 만났던 것과 평소와는 달랐던 왕운의 모습을 얘기해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미리 막았을 텐데.”

“영아······ 흑!”

“걱정 마시고 기다리고 계세요. 아주머니.”


척영이 서연을 달래준 후 대웅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척영이라고 해요.”

“내 손녀일세.”

“그래. 척 늙은이에게 이렇게 예쁜 손녀가 있었구나.”

“과찬이세요. 그럼 아주머니 좀 부탁드릴게요.”

“그래. 걱정 말고 다녀오거라.”


그런데 척영이 들어온 이후부터 척영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멍하게 바라보던 사걸이 갑자기 외쳤다.


“저, 저도 함께 가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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