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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삼일생 님의 서재입니다.

왕씨세가 초대가주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구삼일생
작품등록일 :
2022.05.25 17:28
최근연재일 :
2022.07.08 11:00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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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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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0,503

작성
22.05.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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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005 -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DUMMY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왕씨 일족의 장원에는 척영과 하엽의 목검 대련이 펼쳐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유신으로부터 검을 배운지 8년이란 시간이 지나 어느덧 14살이 된 척영은 웬만한 성인 남자도 당해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베고 찌르고 막고.

보통사람은 눈으로 좇을 수도 없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두 사람은 실로 화려한 대결을 펼쳤고,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척영과 하엽의 비무를 보는 것이 왕씨 일족의 하루 일과가 되어 있었다.

아리따운 얼굴과 그에 어울리지 않은 매서운 검술 솜씨에 하엽은 속으로 매우 감탄하고 있었다.


‘6살 때부터 어르신의 지도에 따라 검을 휘둘렀다더니만 어린 나이에도 실력이 과연······ 하지만 아직 순순히 져줄 생각은 없다.’


비록 14살의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검술 실력을 뽐내던 척영이었지만, 표국 내에서도 왕혁 다음가는 실력자였던 하엽을 꺾기엔 아직 무리가 있었다.

두 사람이 비무를 시작한 지 어느덧 일각의 시간이 흐르고, 하엽이 마지막 승부를 걸겠다는 표정을 하고 내력을 끌어올린 뒤 자신의 검을 척영의 검에 크게 맞부딪쳤다. 아직 하엽에 비해 내력과 힘이 모자랐던 척영이 목검을 놓치고, 척영의 눈에는 어느새 눈앞으로 재빨리 신형을 움직인 하엽의 목검이 척영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많이 느셨습니다, 아가씨.”

“오늘도 많이 배웠어요.”

“하루하루 성장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십니다.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저도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겠습니다.”

“고마워요, 아저씨.”


하엽이 검을 회수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척영도 하엽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의 인사에 답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왕운이 척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누나, 대박! 이제 엽이 아저씨도 누나를 쉽게 이기지 못하네?”

“엣헴! 이 누나 좀 멋있었지?”

“응! 그런데 말이야 누나······.”


왕운이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하고 척영을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그렇게 난폭하게 검만 휘두르면 남자가 다가오겠어? 시집은 어찌 가려고······.”

“죽었어!”


척영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고 왕운에게 꿀밤을 때리려 했다. 그러자 왕운이 척영의 주먹을 슬쩍 피한 후 먼발치서 손녀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유신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의 등 뒤로 숨었다.


“이게 툭하면 할아버지 뒤로 가서 숨네. 이리 안 나와?”

“메롱, 약 오르지?”


왕운이 유신의 등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혀를 날름거리며 척영의 약을 올렸다. 보다 못한 유신이 척영에게 말했다.


“너는 누나가 돼서 어린 동생이 농담 한마디 했다고 뭘 그리 발끈하고 있느냐······. 쯧쯧, 언제 철이 들는지······.”

“흥! 할아버지는 언제나 운이 편만 들고.”


척영이 툴툴거리며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유신이 왕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녀석아. 누나를 놀리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느냐?”

“왠지 의기양양한 모습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헤헤.”


실실거리며 웃던 왕운은 척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웃음을 멈추고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하고 유신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저는 언제쯤 할아버지께 검을 배울 수 있을까요?”

“!”


놀라움에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유신을 왕운이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더 늙어서 검을 잡으실 수 없게 되면, 제가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지키면서 살고 싶어요. 그런데 저는 누나보다도 약하잖아요. 약한 주제에 누가 누굴 지켜요?”

“······.”

“할아버지는 저에게 권각술(拳脚術)만 가르치실 뿐, 검을 가르쳐 주시지 않잖아요. 누나는 6살 때부터 검을 잡기 시작했다던데······.”


친누나와 다름없이 지내던 척영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구경하며 자랐던 왕운은 어려서부터 무술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유신은 어린 왕운에게 손과 발을 이용하는 기본적인 무술만 가르칠 뿐, 검술을 가르치진 않았다. 어느덧 8살이 되자 마음이 급해진 왕운이 유신에게 직접 청하기로 한 것이었다.

왕운의 직접적인 질문에 안쓰러운 눈빛으로 왕운을 바라보던 유신이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 줄 이 할아버지가 미처 몰랐구나. 하지만 이 할아버지는 네게 검술을 가르칠 수는 없단다.”


왕운이 실망한 표정을 짓자 유신이 왕운을 안아서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가 없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언젠가 네가 좀 더 크면 모든 것을 말해주마.”

“······.”

“이 할아버지의 말대로 해줄 수 있겠지?”

“······네.”


유신이 웃으며 왕운을 내려 주었다. 왕운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아직 납득하기 어려운 모양이군. 휴······, 미안하다. 이게 다 널 위해서란다.’


***


밤이 되자, 유신은 서연이 머무르는 방으로 찾아갔다.


“서연아. 잠시 들어가도 되겠느냐?”

“네, 어르신. 어서 들어오세요.”


서연이 방문을 활짝 열고 반갑게 웃으며 유신을 맞이했다.


“차는 됐고,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느냐?”

“그럼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서연이 의자를 내주자 유신이 자리에 앉고, 서연도 그 맞은편에 유신을 마주보고 앉았다.


“오늘 운이가 내게 검을 가르쳐달라 하더구나.”

“결국 그 아이가 직접 어르신께 청했나 보군요. 영이가 수련할 때마다 부러운 눈으로 늘 바라보더니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고 보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더구나.”

“······.”


유신이 왕운에게 검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자신이 가르친 검술 때문에 왕운의 아버지 왕혁이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는 사실에서 온 막연한 죄책감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애제자가 죽을 때 옆에서 아무런 도움조차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둘째는 언젠가 그의 애제자를 죽였다는······,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과 왕운이 마주쳤을 때 벌어질 일 때문이었다.

왕운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다던 왕혁의 유언이 있었기에, 유신 또한 왕운을 언제까지나 이곳에 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 왕운이 자라면 세상을 돌아다니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자유를 느끼며 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빌어먹을 놈들의 눈앞에 왕혁과 닮은 비슷한 외모에 검술까지 흡사한 사람이 있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결과가 뻔한 일이었다.

왕운에게 검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 이유조차 설명할 수 없었던 유신은 답답한 심정이었다.

두 사람은 왕운이 쓸데없는 복수심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왕혁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유일한 진실을 알고 있던 하엽과 말을 맞추고 왕운에게 진실을 숨겼다.


“검을 배우고 싶다는 이유가 강해져서 나중에 커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더구나.”

“참, 오라버니의 아들답네요. 주변 사람 챙기질 못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보여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런 호구가 따로 없구나 싶을 정도로 순진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닮은 것은 얼굴과 성품뿐만이 아니더구나.”

“예?”

“내가 그 아이에게 검을 다루는 것 말고 간단한 무술을 가르쳤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예, 어르신.”

“체술을 습득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더구나. 언제 힘을 쓰고 언제 힘을 빼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아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몸을 쓰는 일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것이 혁이 그놈 어릴 적이랑 똑같더구나.”


유신은 눈을 감고 잠시 옛일을 떠올렸다.

답답한 궁에서 살기 싫어 뛰쳐나왔다며 대뜸 자신을 찾아와 검을 가르쳐달라던 맹랑한 어린 소년.

하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으로 찬란하게 빛났던 그 소년의 모습.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가르치는 족족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던 그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바라보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던 그 옛날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앞의 소년과 비슷한 생김새의 소년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심지어 눈부신 재능을 보이며 밝게 빛나는 모습까지도 비슷한.

유신은 앞의 소년을 가르치며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이 아이 역시 나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을 아이였기에.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욕심과 즐거움 때문에 이 아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처음 왕운에게 간단한 권각술을 가르치던 유신은 왕운의 천재성에 전율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재능이 넘치는 아이에게 자신의 검을 전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에 좌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왕혁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다시 찾아왔다.

유신은 왕운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이 아이를 위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추스를 수밖에 없었던 유신이었다.

눈을 뜨고 옛 추억에서 벗어난 유신이 한숨을 푹 내쉬며 서연을 한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남궁세가······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것들······.”

“어르신······.”

“운이에게 검을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운이에게 그 이유조차 설명해주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 유신에게 서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그래도 평생 진실을 숨기고 싶어요, 어르신.”

“······.”

“병으로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사실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똑같은 검을 익혔다가는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그놈들이 너를 알아볼 수도 있다. 과연 운이가 이 가혹한 얘기를 들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자랄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아이가 느낄 아픔과 분노······ 생각조차 하기 싫어요. 저는 오라버니의 유언처럼 운이가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합니다, 어르신.”

“네 말이 옳구나. 둘러댈 다른 말을 천천히 생각해보자꾸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서연만큼이나 왕운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유신이었다. 왕운만큼은 억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자신의 제자와는 다른 인생을 살게 하고 싶었다.

유신은 평소에 주변의 미세한 움직임도 쉽게 알아차릴 정도로 날카로운 감각을 지녔던 달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왕운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운 심정에 마음가짐이 흐트러졌는지, 아니면 서연과의 대화에 집중하다 그랬는지는 몰라도 바깥의 상황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머니를 잠시 뵈러 왔던 한 어린아이가 문밖에서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처소로 발걸음을 돌렸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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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006 - 수련 그리고 또 수련 22.05.27 955 21 11쪽
» 005 -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4 22.05.27 977 21 11쪽
4 004 - 만남 +6 22.05.26 1,004 25 12쪽
3 003 - 척 사부를 찾아서 +3 22.05.26 1,054 22 12쪽
2 002 - 탈출(2) +5 22.05.25 1,127 30 12쪽
1 001 - 탈출(1) +7 22.05.25 1,597 3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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