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악마로 변한 옐러가 나에게로 달려오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일 년 전 반란 때에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압박감과 두려움은 그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노드가 나를 노리고 돌진할 때는 그래도 도망칠 수는 있었지만 지금은 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여왕님을 지켜라!”
“스미스 경을 막아라!”
화들짝 놀란 바르테인 군이 우르르 몰려 나가 악마가 나에게 접근하는 걸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부질없었다. 그 기세뿐 아니라 무위에서도 옐러는 노드를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귀찮은 잔챙이들. 죽어 버려!-
옐러의 세검으로 변한 마검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다. 그러자 그 검에 닿는 것은 방패와 갑옷이고 가릴 것 없이 쇳물로 화해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검에 베인 병사들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끄아악!”
방금 전까지 사람의 형체를 갖추고 있던 병사들이 시커멓게 타버리면서 재가 되어 허공에 부스러진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광경이었다. 옐러는 남아 있는 병사들을 순식간에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 버렸다. 그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면서 말이다.
아니, 옐러가 아니라 마검이 한 짓이다. 그 많던 바르테인 군을 저 검 하나가 전멸시켜 버렸다. 검은 색으로 변한 옐러의 얼굴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가려 뽑은 각별한 부하들을 잃은 것을 슬퍼하고 있었다.
“....절 죽여.... 주십....”
옐러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귀에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미약한 소리였지만 옐러의 입장에서는 필사적으로 쥐어짜내 외친 것이리라. 그러나 그 말과 달리 옐러의 팔은 타오르는 불꽃이 서린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나를 수직으로 베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절 공격 하십... 망설이지 마시....”
옐러는 진심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한 것이다. 겁에 질려 손가락 까딱할 수 없던 나는 그의 간절한 목소리와 표정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내 앞에 당도하자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칸딘이 기습적으로 마법을 펼쳤다. 그의 마법의 팔은 이번에는 검을 들고 있었고, 그것으로 옐러의 심장을 정확히 찔렀다.
-멍청한 놈! 적성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구나! 인간에게도 치명상을 주지 못하는 허접한 공격이 악마에게 통할 줄 알았더냐?-
마검은 가소롭다는 듯 큰소리로 칸딘을 비웃는다. 그의 말처럼 악마가 된 옐러는 희뿌연 마법 검에 찔린 것에 조금도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이에 당황한 칸딘은 급히 나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어, 휘렌델! 네가 직접 공격해! 나를 휘둘러!-
십여 명의 바르테인 군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악마에게 나의 검이 먹힐까? 놀랍게도 가능해 보였다. 진즉에 나를 베어야 했을 마검이 아직까지 옐러의 머리 위에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악마의 두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옐러가 마검의 지배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옐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준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악마를 향해 힘차게 한 발 내딛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드래곤의 뼈를 옐러의 목에 대었다.
옐러가 나 몰래 솔피리스를 붙잡으려 한 건 왕으로서의 나의 권위를 철저히 무시한 것이었다. 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 또한 바르테인을 위해 한 일이다. 그래서 옐러 같은 충신을 이렇게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악마로 변화시켜 지배해버리는 무시무시한 마검. 그러나 솔피리스는 그 검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에 그 비결은 바로 이 드래곤의 뼈인 것 같았다. 이 뼈가 마검의 마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입증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옐러의 피부는 여전히 새까맸고 마검은 여전히 시뻘건 화염을 뿜어내고 있었다.
-옐러가 악마로 변한 건 마법이 아니야, 휘렌델! 드래곤의 뼈는 아무 소용없어!-
칸딘이 안타깝게 외쳤을 때는 이미 옐러의 마지막 저항을 뿌리친 마검이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 정령놈 만큼이나 멍청한 년이구나.-
마검이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비웃는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듣게 될 말이라는 걸 직감하는 순간 고속으로 움직이는 무언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죽기 전으로 마지막으로 보게 될 광경.... 나는 이내 그것이 붉은 바위족의 복장을 한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검이 나를 두 동강내기 직전에 다급히 나를 밀어냈다.
“크윽!!”
솔피리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들은 후 나는 아직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대신 그가 마검에 가슴을 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걸려들었구나, 그림자 매! 네 놈이 저 년을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마검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탄성을 질렀다. 어쩌면 저항하는 옐러와 실랑이를 벌였던 것부터가 솔피리스에게 확실하게 일격을 먹이기 위해 장치한 함정일지도 모르겠다.
솔피리스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목에 걸고 있는 드래곤의 뼈다발이 강철도 녹여버릴 만큼 뜨거운 화염은 잠재웠지만 마검이 그의 살갗을 가르고 근육을 찢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동강이 나 갈라져 버린 뼈다발 사이로 보이는 상처에서 엄청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시손톱!”
솔피리스는 이를 악물며 악마에 맞서 싸우려 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몸이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이미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중상이었던 것이다.
-크하하하!-
그 광경을 본 마검은 의기양양하게 광소를 터뜨렸다.
-어떻게 죽여줄까, 그림자 매? 약속대로 최고의 고통을 선사해주지!-
나는 칸딘을 조심스럽게 고쳐 쥐었다. 녀석이 솔피리스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뒤를 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믿음직스러웠던 솔피리스마저 쓰러져 버렸다. 이제 저 끔찍한 마검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악마로 변한 옐러는 그 모습만으로도 엄청난 공포를 자아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냈다.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마검은 솔피리스에 이어 나까지 죽일 것이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지막 발악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미안해요, 옐러. 당신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네요.
“이얏!”
나는 기합소리와 함께 악마의 등을 향해 칸딘을 뻗었다. 그러나 나의 검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옐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볍게 피한 것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검의 지배를 받는 옐러는 칸딘을 쥐고 있는 내 양손을 우악스럽게 낚아챈 후에 오른손을 강제로 정령검에서 떼어냈다.
-네 놈에게 육체적인 고통은 줘봤자 별로 의미가 없겠지. 이미 극한의 고통을 맛보았을 테니. 그렇다면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마.-
그 말과 함께 옐러는 나의 빈 오른손에 마검을 강제로 쥐어 주었다.
“안 돼! 그녀는 내버려 둬! 네 놈이 원하는 건 나잖아!”
솔피리스가 사색이 되어 소리친다. 그의 이런 반응은 마검을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네 놈이 그렇게나 지키려 했던 여자다. 그녀의 손에 죽는 기분은 어떨까?-
마검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나는 그가 방금 말한 극한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마치 수천 발의 벼락에 맞은 듯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녀석은 잔인했다. 온 몸 구석구석에서 마지막 한 줌의 고통마저 끌어올려 고스란히 내가 느끼게 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미쳐버릴 것 같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모든 고통을 합한 것의 몇 갑절이나 되는 고통이 한 순간에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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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분량조절은 정말 어렵네요 ㅠ
짧을 줄 알았는데.... 쓰다보니 너무 길어 절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반토막은 내일 낮에 올리겠습니다 ^^;
옐러 : 마지막에 마검이 휘렌델을 죽이기보다 사로잡는 쪽을 택한 건 제 의지력이 어느 정도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감동적이죠?
가시손톱 : 아닌데? 그냥 내 맘대로 한 건데?
옐러 : ....‘어느 정도’ 라고요;; 본인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세하지만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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